전경 속 인물진묵대사(震默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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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756회 댓글0건본문
또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默)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교운 1장 65절)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 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권지 2장 37절)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진묵대사에 관해 여러 번 언급하셨다. 이 글에서는 전해져 내려온 저술과 설화를 바탕으로 진묵대사의 삶과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진묵대사는 고려 말 나옹 혜근(懶翁惠勤)과 더불어 한국 불교에 있어 부처님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진묵대사의 호는 일옥(一玉)으로 조선 중기인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하였으며 조선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승(禪僧)이었다. 그는 1562년 현 전북 김제시 만경면 불거촌(佛居村)에서 출생하여 1633년 10월 28일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묵은 7세에 출가하여 봉서사(鳳棲寺)와 인연을 맺고 변산 월명암, 진산 태고사 등 전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수많은 일화와 종교적 체험을 통해 많은 민중의 추앙을 받았다. 특히 진묵은 부처님의 화신으로 불려 왔고 말과 글이 아닌 삶 그 자체로 불교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진묵이 살았던 시기는 당쟁과 전쟁이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 시기에 불교계와 그가 살았던 호남지역은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특히 진묵의 청년 시절 전주에서 발생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전라도 지역의 1,000명의 유생과 승려가 목숨을 잃게 된다.01 이 사건이 전라도 지역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였으며 민심은 중앙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진묵이 한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그리고 진묵이 31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진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상을 목격하였지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처럼 승병을 조직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살면서 그들의 숭상을 한 몸에 받았다. 부처님의 화신으로 여겨진 그는 고통받는 민중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 진묵의 생애
진묵은 조선 민중에게 많은 추앙을 받았으며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지만 의외로 진묵과 관련된 저작은 거의 없다. 진묵이 직접 쓴 저작으로는 전해오는 시 한 수와 모친을 위해 쓴 제문이 유일하다. 그에 관한 최초의 저작은 진묵 사후 약 200년 후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이며 이를 바탕으로 몇 권의 저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진묵조사유적고』에 나오는 내용은 정확한 연대기 순이 아닌 사건 중심으로 진묵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진묵조사유적고』에 실린 여러 일화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묵이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 동안 시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세상에 드문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수군대었다. 그가 태어나자 사람들은 “불거촌에서 부처님이 나셨다.”라고 하였다. 진묵은 천성이 슬기롭고 자비로웠으며 7세에 봉서사에 출가하여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만 보아도 다 외우곤 하여 아무도 스승이 되어 가르칠 수 없었다고 한다.
진묵이 봉서사02 동자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주지가 진묵으로 하여금 절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신장단(神將壇)에 향불을 올리는 소임을 맡겼다. 얼마 후 주지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나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들인데 도리어 부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봉향(奉香)하게 하니 송구하기 그지없다. 그분으로 하여금 향을 사르도록 하지 말아 달라.”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산내 대중들은 진묵의 비범함을 알았고 “부처님이 다시 이 땅으로 오신 것”이라 했다.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奉谷) 선생이라 불리는 유학자 김동준(金東準)이 살고 있었다. 봉곡은 당시 걸출한 인물로 알려졌었다. 진묵은 봉곡과 정신적ㆍ학문적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하루는 봉곡이 진묵에게 『성리대전』을 빌려주고 사람을 하나 딸려 보냈다. 진묵은 책을 짊어지고 걸으며 한 권씩 대강 훑어본 뒤 길가에 버렸다. 뒷날 봉곡이 진묵에게 “책을 빌려 가서 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요?” 하고 묻자, 진묵은 “고기를 잡은 뒤에는 고기를 잡는 통발은 잊는 법이지요.”라고 대꾸하였다. 이에 봉곡이 책을 꺼내어 그 내용을 물으니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대답하였다.
한번은 길을 가다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 시냇가에서 끓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진묵은 솥 안을 보고는 “잘 놀던 물고기들이 죄 없이 삶아지는 괴로움을 받는구나.”라며 탄식하였다. 이에 한 소년이 “선사께서 이 고깃국을 잡숫고 싶은 게로군요.”라고 하며 진묵을 조롱하였다. 진묵은 “준다면야 먹지.”라며 솥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소년들은 놀라서 “부처님께서 살생을 금하셨거늘 스님으로서 고깃국을 자셨으니 어찌 참다운 스님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묵은 웃으며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것은 내 하기에 달렸지.”라고 하고는 아랫도리를 벗고 냇가에서 설사하자 고기들이 살아 물 위로 솟구치며 뛰놀았다.
진묵이 봉서사 근처 상운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탁발승이 먼 곳으로 탁발을 떠났다가 한 달쯤 지나서 돌아와 보니 진묵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졌고 무릎 사이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먼지를 떨어내고 거미줄을 걷어낸 다음 이름을 아뢰니 진묵은 도리어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반문하였다.
진묵이 변산 월명암에 있을 때 모든 스님이 출타한 후 홀로 『능엄경』을 읽다가 삼매에 들어서 바람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고 하는 바람에 문지방에 놓고 있던 손가락에 피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전주부의 한 관리가 죄를 지어 도망을 가려다 진묵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도망가는 것이 어찌 남자가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공양을 올리라.”고 하였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진묵은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주라.”고 하였다.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에 나타나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도와주고 싶지 않으나 대사의 명령이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며 그를 구해 주었다.
진묵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전주 우아동 일출암에 살 때 어머니를 인근에 모셔와 머물게 하였다. 여름이면 모기가 극성을 부려 모기 때문에 고통을 겪자 이를 안쓰럽게 여겨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남김없이 쫓아버렸다.
진묵이 하루는 사미승을 만나 사미승을 앞세우고 냇물을 건넜다. 사미승이 냇물을 건너기에 그 깊이를 가볍게 여긴 진묵은 건너다 물에 빠지게 되었다. 사미승은 나한으로 변하여 “대사라 하기에 도력이 출중한 줄 알았더니 아니구먼!”이라고 말하며 진묵을 놀려댔다. 물에서 나온 진묵은 “내 신통력은 비록 너에게 미치기 어려우나 대도의 진리는 마땅히 나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라며 나한을 꾸짖었다.
하루는 진묵이 시내를 거닐다 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가리켜 말했다. “저게 바로 부처의 그림자로구나.” 그러자 시자가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라고 하자 진묵은 “너는 다만 나의 허망한 모습만 알 뿐, 부처의 참모습은 모르는구나!”라며 탄식하였다.
⊙ 진묵의 사상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 의하면 “중생을 교화한 기연(機緣)과 어구(語句)의 상이한 궤적과 꽃다운 발자취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비록 기록된 것이 있다 하여도 이는 모두 참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선사께서 아마 통렬히 금하여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란 내용이 있다. 이 말처럼 진묵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아마 자신에 관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진묵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사상을 후학들이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진묵조사유적고』와 전해오는 몇 가지 설화를 통해 그의 사상을 추정할 따름이다.
1. 유ㆍ불ㆍ도의 회통 사상
진묵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법통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굳이 붙이려면 서산(西山) 휴정에게 대라고 하였다. 서산은 유불도 삼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가귀감』, 『선가귀감』, 『도가귀감』 등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유불도 삼교의 이론적이고 근원적인 회통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반면 진묵은 굳이 유불도 삼교의 회통을 강조하려는 것보다 더 나아가 차라리 이에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03 그러면서도 당시 유학의 대가인 동곡 김동준과 교유를 하였고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효심을 지녔다는 사실은 유교에 대하여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묵은 조사(祖師)로 불리고 있고, 일생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삶을 자유자재한 선승(禪僧)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진묵이 평소 참선을 통해 수행하였으며 그러한 경지가 심히 깊었음을 『진묵조사유적고』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곧 진묵은 당시 유불도의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이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선수행에 있어서는 높은 경지에 오른 선사임을 알 수 있다.
2. 진속일여(眞俗一如)와 대자유 사상
진묵은 항상 헐벗고 가난한 민중과 더불어 어울렸다. 때로는 선수행에 깊이 정진하여 속세를 떠나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은 항상 민중에게 있었으며 그들과 호흡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가 한줄기 법맥과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민중에게 종교적인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진묵이 남긴 여러 일화에서 진묵은 진(眞)과 속(俗)을 구별하여 이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불국토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와 같이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바로 민중이 딛고 사는 이 현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진묵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그는 생과 사, 진과 속을 넘어 대자유의 정신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게송(偈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로 하며 天衾地席山爲枕
달은 촛불로 하고 구름은 병풍으로 바다를 술동이로 하여 月燭雲屛海作樽
크게 취해서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大醉遽然仍起舞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却嫌長袖掛崑崙
이 게송에서 진묵은 마치 『장자』의 ‘소요유’에 등장하는 진인의 모습처럼 자유자재한 절대자유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진묵이야말로 그의 삶의 시기가 전란과 기근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참 자유의 삶을 추구했음을 볼 수 있다.
3. 효 사상
진묵의 삶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여느 스님과 다르게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실이다. 진묵의 탄생지로 알려진 현재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는 성모암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로 알려진 진묵 모친의 묘소이다.
진묵이 출가를 할 때 모친이 “나는 아들이 너 하나인데 네가 스님이 되면 내 제사는 누가 지내주느냐?”라며 걱정을 하자, 진묵은 “그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천 년 동안은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할 테니.”라고 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진묵은 직접 묘지를 이곳으로 정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모친 묘에 제사를 지내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이니 향과 초를 올려 참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지어 자신의 효심을 드러내고 있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 무엇으로 갚으리오. 슬하에서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 없습니다. 만 년 위에 다시 만 년을 더해도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한데 백 년 생애에 백 년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 노상에 걸식하는 이 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녀를 꽂고 규중에 있으며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제단에 올라 불공을 마치고 중들은 제각기 방으로 찾아 들어가고 앞산 뒷산만 첩첩한데 영영(英靈)은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아! 애닯도다.”
‘무자손 천년향화지지’란 곧 자손이 없어도 천 년 동안이나 참배객이 찾아와 정성을 들이는 명당이란 말로, 성모암에는 현재까지 참배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성모암은 옛날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졌다고 하며, 기원을 드리면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항상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참고자료]
1. 황의동, 「진묵대사와 유교와의 대화」, 『한국사상과 문화 56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2. 박윤호, 「진묵 일옥 일화 연구: 유적고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사연구소, 2005.
3. 김방룡, 「증산교와 진묵대사」, 『신종교연구 4』, 한국신종교학회, 2001.
4. 김방룡, 「설화를 통해 본 진묵 일옥의 삶과 사상」, 『한국불교학 제44집』, 한국불교학회, 2006.
5. 정륜, 「모악산과 불교: 진표율사와 진묵대사를 중심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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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정여립의 모반사건에는 유생들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스님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다. 선조 22년(1589년) 역
모에 가담된 사람들이 모조리 잡혔고 정여립은 자살하였다. 스님들과 관련된 것은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
과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절이었기 때문이며 당연히 많은 스님들이 잡혀들었다. 이때 문초를 당하던 무업스
님이 서산 휴정과 사명당 유정이 모반에 관여되었다고 하여, 서산과 사명당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
었다. 하지만 서산 휴정의 의연한 태도와 그의 시에 선조가 감동하여 서산을 석방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임진왜란 당시 서산에게 팔도선교십육도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을 내리게 된다.
02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龍進面) 간중리에 있는 절.
03 김방룡, 「증산교와 진묵대사」, 『신종교연구 4』, 한국신종교학회,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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