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이백(李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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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813회 댓글0건본문
하루는 형렬이 상제의 명을 좇아 광찬과 갑칠에게 태을주를 여러 번 읽게 하시고 광찬의 조카 김 병선(金炳善)에게 도리원서(桃李園序)를 외우게 하고 차 경석ㆍ안 내성에게 동학 시천주문을 입술과 이를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여러 번 외우게 하셨도다. (행록 5장 7절)
“동학가사(東學歌辭)에 세 기운이 밝혀있으니 말은 소ㆍ장(蘇秦ㆍ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ㆍ두(李太白ㆍ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도다. (교법 2장 42절)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이백은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두보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되며, 오늘날 이ㆍ두(李杜)라 병칭하며 두보를 시성(詩聖),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고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유추해보면 수나라 말에 그의 먼 조상이 서역(西域: 중국 서쪽의 국외 지역)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당나라 신룡(神龍) 원년(705)에 그의 부친 이객(李客)이 몰래 가족들을 데리고 촉(蜀)이라는 지방의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청련향(靑蓮鄕)에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은 서역에서 태어나 5세 때 서역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25세까지 20년 동안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련거사라는 그의 자작호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긴 청련향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이백은 학문에도 자질이 있어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교육을 받고 일찍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다방면의 지식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이백은 지방 관리에게 자신을 천거하는 편지글에서 5세 때 60갑자를 외우고 10세 때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하여 황제헌원 이후의 일을 알고 있었고, 15세 때 기서(奇書)를 읽고 부(賦)를 지어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 01를 능가하였으며 검술을 좋아하고 두루 지방 관리들을 배알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方輿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이백이 미주(眉洲)의 상이산(象耳山)에서 독서할 때 공부에 싫증을 내고 하산하다 한 노인이 시냇물 옆에 철을 가는 절구공이를 놓아두었는데, 이백이 노인에게 왜 철을 갈고 있느냐고 물으니 노인이 철을 갈아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하자, 이백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로 마음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마저성침(磨杵成針) 02의 고사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10대 후반에 민산(岷山)의 남쪽에서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를 스승으로 도술을 배우며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동강(潼江), 지금의 재주(梓州) 부근의 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은사 조유(趙蕤)를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이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백이 흠모하였던 역사상 인물들은 관중(管仲), 안영(晏嬰), 악의(樂毅),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소진(蘇秦), 노중련(魯仲連) 등이 있다. 특히 계책에 능하고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킨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존경과 추종은 지대하여 여러 편의 시에서 찬양하고 있다.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각별한 존경과 숭상하는 마음은 「고풍(古風)」 제10수에 잘 나타나 있다.
齊有倜儻生 제나라에 속세를 벗어난 선비가 있어
魯連特高妙 노중련이 가장 절개가 높았네
明月出海底 밝은 달이 바다 속에서 나와
一朝開光曜 하루아침에 밝은 빛을 비추었네
卻秦振英聲 진나라를 물리쳐 명성을 떨쳤고
後世仰末照 후세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네
意輕千金贈 천금의 상을 가볍게 생각하고
願向平原笑 평원군에게 미소지으며 사양했네
吾亦澹蕩人 나 또한 욕심 없는 담박한 사람이라
拂衣可同調 옷소매 털고 더불어 어울릴 수 있네
그는 한편으로 유가의 정치사상의 실천으로 제왕을 보필하여 이상세계의 실현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교의 신봉으로 속세를 초월하는 신선의 세계를 희구하였다. 이러한 두 세계는 이백의 삶 속에서 일관된 출사(出士)와 은일(隱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을 세운 뒤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자연에 묻히는 공성신퇴(功成身退)03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그는 일생을 통하여 출사로 공을 세우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좌절을 거듭 겪게 된다.
그의 나이 약관 20세에 예부상서 소정(蘇頲)이 익주 대도독의 장사(長史)에 임명되어 성도(成都)로 오다가 역정에 들렀는데 이때 소식을 들은 이백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곧장 역정에 가서 면회를 청하고 부(賦) 두 편을 바쳤다. 소정은 이백의 문장과 시를 읽고 한나라 때의 대문장가 사마상여에 비견할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이백이 “소생이 재능은 없으나, 대장부의 뜻은 경국제세에 있어 벼슬에 나아가 관중과 제갈량이 될 수 없다면 물러나 노중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문은 단지 잔재주일 따름입니다.” 하니 소정은 이 말을 듣고 그릇이 크고 의기가 드높은 이 청년을 더욱 달리 보았다.
이백은 24세에 유명한 선산(仙山) 아미산(峨眉山)을 찾았다. 그 후 양자강을 따라 파유(巴渝)를 거쳐 삼협을 지나 동정호(洞庭湖)를 유람하였다. 이 무렵 이백은 도교의 대사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났는데 그가 불자(拂子)04를 한 번 흔들고는 웃으며 말했다. “산 위의 흰 구름, 소나무 사이의 밝은 달, 가서 만나지 못할 것이 없다오.” 이백은 곧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공을 이루고 이름을 높인 뒤에는 물러나라. 이것이야말로 소생의 평소 뜻입니다.” 라고 말하며 기쁘게 인사하고 떠났다. 이때 쓴 시가 「대붕부(大鵬賦)」이다.
26세가 되던 해 가을,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멀리 유람하면서 대장부의 큰 뜻을 펴고자 하였다. 고향인 촉을 떠난 이백은 동정, 상수(湘水) 일대를 돌아다녔고 금릉(金陵), 양주(揚州) 등지를 거쳐 오(吳)와 월(越)을 돌아 안륙(安陸)에 이르러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한동안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이백은 품었던 이상을 구현하고자 정치적 현실 참여를 갈구하여 여러 사람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다. 맹호연(孟浩然, 689~740)과의 교제도 이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5세 무렵에는 산동(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 후 40세 무렵 공소보(孔巢父), 배정(裵政), 한준(韓準),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 등 은사(隱士)들과 함께 산동의 조래산(.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은거하여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냄으로써 ‘죽계육일(竹溪六逸)’의 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42세에 절강(浙江)으로 내려와 사마승정과 사형관계에 있는 도사 오균(吳筠)을 만났고 그가 현종에게 발탁되어 장안(長安)에 들어감에 따라 이백도 그를 따라서 장안으로 진출했다. 오균의 천거도 있었을 것이고 원단구(元丹邱)와 지영법사(현종의 여동생)의 천거로 입경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장안에 명성을 날렸다. 이백의 「대붕부」를 당시 조정의 대신이었던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읽고 이백의 문장에는 풍골(風骨)이 있어 적선자(謫仙子)라 불렀다. 유명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이 시기에 쓰여진 산문이 아닌가 한다.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音者는 百代之過客이라
而浮生이 若夢하니 爲歡이 幾何오 古人秉燭夜遊가 良有以也로다
況陽春은 召我以煙景하고 大塊는 假我以文章에랴
會桃李之芳園하여 序天倫之樂事하니
群季俊秀는 皆爲蕙連이어늘 吾人詠歌는 獨慙康樂이라
幽賞이 未已에 高談이 轉淸하야 開瓊筵以坐花하고 飛羽觴而醉月하니
不有佳作이면 何伸雅懷리오 如詩不成이면 罰依金谷酒數하리라
무릇 천지는 만물이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라
뜬구름 같은 인생은 꿈만 같으니 기쁨을 누린들 그 얼마나 계속되리
옛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밤늦도록 놀았음은 진실로 그 까닭이 있음이로다
하물며 화창한 봄날에 아지랑이 황홀한 경치가 나를 부르고
대자연은 나에게 문장을 빌려 주었음에랴
복사꽃 오얏꽃 만발한 화원에 모여 천륜의 즐거움을 펴니
젊은 수재들의 글 솜씨는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는 홀로 강락후에 부끄럽네
그윽한 감상이 그치지 않고 고상한 담론은 더욱 맑아
화려한 자리를 펴고 꽃 앞에 앉아 우상(새깃 모양의 잔)을 날려 달 아래 취하니
아름다운 글이 없다면 어찌 우아한 회포를 펴리오
만일 시를 짓지 못한다면 벌주는 금곡의 술잔 수를 따르리라.
그렇게 원하던 입경이었지만 현종은 이백을 중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패한 궁중행락에 흥을 돋우는 시를 짓게 하는 정도로 이백의 기재(奇才)를 활용하였다. 담대 자재한 이백의 언행은 당시 황실의 간악한 절대 권력자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게 되고, 현종과 양귀비의 불륜 등 조정의 부패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다. 자신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는데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개탄하면서 결국 세상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은일의 길을 택하여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로 결심하고 3년 만에 장안을 떠났다.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낙양에서 두보(杜甫, 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의 상봉은 중국문학사상 일대 사건으로 11살의 나이 차(두보 33세)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다. 중국 시문학의 양대산맥인 두 대시인의 교유는 1년의 기간으로 그리 길지 않지만, 일생을 두고 서로 주고받은 시를 통해 두 사람의 우정이 친형제처럼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었고,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이백은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다.
이백은 양자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10년 동안 각지를 떠돌아다녔는데 그의 순차적인 여행 경로는 역시 명확하지 않다. 이때 이백의 시에서는 자신을 축신(逐臣: 쫓겨난 신하)이라 표현하며 정치적 포부가 무너진 통절한 마음을 노래하였고, 비상식적이고 몰인정한 아버지의 자식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에 담기도 하였다. 도교의 신선신앙과 장생불로에 대한 신봉은 당대 유가의 사대부들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는데, 금단을 연단하는 수련 이외에 중요한 신선의 행위가 바로 유람이었다. 이백의 유람도 이러한 도교적인 행위의 하나였고 그가 평생 추구하던 신선에의 동경을 실천에 옮긴 행동이었다.
755년(天寶 14) 11월에 안록산(安祿山)이 범양(范陽)에서 모반하여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이듬해 6월에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가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여 숙종(肅宗)이 되었다. 당시 이백은 양자강을 따라 선성(宣城)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여산(廬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왕이 숙종의 임금자리를 노렸다는 반역죄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이백 역시 ‘내란 부역죄’로 심양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지기들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야랑(夜郞)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야랑으로 유배되어 무협(巫峽)까지 갔던 그는 천재일우의 사면으로 무죄 방면되어 심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정에서 이광필(李光弼)에게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반군세력인 사조의(史朝義)의 남하를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이백은 61세의 고령에 이것을 마지막 보국의 기회로 보고 이광필의 군대에 합류하려고 하였으나 중도에 병으로 부득이하게 금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혈성(血誠)으로 살았던 이백의 삶은 쇠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인고의 노력과 풍운에 용이 승천하고 구만리 장천에 대붕이 나는 자유로운 삶이 중첩하여 만들어내는 한 편의 대서사시라 하겠다.
이백은 그의 삶 마지막 2년간을 선성과 금릉 일대를 오고가며 처량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명예도 재물도 아무것도 없던 이백은 당도(當塗)의 현령을 지내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탁하여 노병 속에 만년을 지내다가 그에게 초고를 넘겨주고 761년 11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양빙은 초고를 모아 『초당집(草堂集)』 10권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이백은 임종하기 전에 일생을 종결하는 절필시 「임로가(臨路歌)」를 지었다고 한다.
大鵬飛兮振八裔 대붕이 날아 천하를 떨치고
中天摧兮力不濟 힘에 겨워 중천에 꺾였네
餘風激兮萬世 그 바람에 온 세상을 흔드니
游扶桑兮.石袂 부상에 놀다 옷소매가 걸렸네
後人得之傳此 후세 사람이 이를 전하겠지만
仲尼亡兮誰爲出涕 공자님 안 계시니 뉘라 눈물 흘리리
<대순회보>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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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중국 전한의 문인. 부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 초사(楚辭)를 조술(祖述)한 송옥(宋玉)ㆍ가의(賈誼)ㆍ매승(枚乘) 등에 이어 ‘이소재변(離騷再變)의 부(賦)’라고도 일컬어진다. ‘이소’ 는 조정에서 쫓겨난 후의 시름을 노래한 중국 초나라의 굴원이 지은 부(賦)로 초사 가운데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이소재변은 이러한 이소가 다시 변해서 온 뛰어난 부라는 뜻이다.
02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는 뜻으로 한마음으로 노력하면 아무리 힘든 목표라도 달성 할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03 『노자』제9장의 “공을 이루어 명성을 얻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功成, 名遂, 身退, 天道).”라는 구절에서 유래. 왕필본에는 이 구절이 “功遂身退, 天之道”라고 나온다.
04 불도(佛道)를 닦을 때 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내는 데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
참고문헌
ㆍ이해원, 『이백의 삶과 문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ㆍ안치 지음/ 신하윤ㆍ이창숙 옮김,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 이끌리오, 2004.
ㆍ다카시마 도시오 지음/ 이원규 옮김, 『이백 두보를 만나다』, 심산, 2003.
ㆍ장기근, 『물가에 백로 한 마리』, 서원, 2002.
ㆍ장기근 편저, 『이태백』, 서원, 1997.
ㆍ채지충/ 황병국 역, 『唐詩四傑 1』, 대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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