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면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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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552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이달 그믐에 동곡으로 돌아오신 다음날 형렬을 데리시고 김 광찬이 가 있는 만경에 가셨을 때에 최 익현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때는 모를 심는 시기이나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직업에 안착치 못하고 의병에 들어가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더욱 의병의 군세가 왕성하여지는지라。 상제께서 수일간 만경에 머무시면서 비를 흡족하게 내리게 하시니 비로소 인심이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더라。 이때 최 익현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약세로 순창에서 체포되니라。 그가 체포된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는 만경에서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떠나시며 가라사대 “최 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동에 인함이나 그의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한재까지 겹쳤으니 무고한 생민의 생명만을 잃을 것이니라。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고 하셨도다. (공사 1장 24절)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833년(순조 33) 12월 5일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의 자택에서 동중추 지헌(同中樞 芝軒) 최대(崔岱)와 경주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이 별빛 같아 관상가가 아이를 보고 범의 머리에 제비꼬리와 같은 턱의 모습을 한 호두연함(虎頭燕?)형이니 한없이 귀하게 될 상이라고 했다 한다. 이렇듯 귀인의 골상을 지녔다 하여 어릴 때의 그의 이름은 기남(奇男)이었다.
최익현은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글을 배우게 되는데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기억했으므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아홉 살 때에는 문식(文識)이 넓어 사물에 막힘이 없던 김기현(金琦鉉)에게 사사하여 유학의 기초를 익혔다. 열네 살 되던 해 봄에는 벽계(蘗溪)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하던 전 공조참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01를 찾아가 인사하고 그대로 머물러 학문을 익혔다. 이때 이항로는 최익현에게 ‘낙경민직(洛敬閩直)’네 글자를 써주며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고 격려하였다. 낙경민직은 낙양(洛陽)의 정자(程子)가 주장한 거경궁리(居敬窮理)02와 민중(閩中)의 주자(朱子)가 주장한 경이직내(敬以直內)03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익현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스승 이항로는 최익현에게 힘쓰는 사람이란 뜻이 있는 ‘면암(勉庵)’이란 호를 직접 써서 선물했다. 이항로는 최익현이 읽은 책은 족히 도서관이 될 것이라며 그의 박학다식함을 칭찬하는 한편, 글을 읽는 것은 마음을 보존하고 이치를 밝히려는 것인데 기송(記誦:외워서 기억함)에만 힘쓰면 글이란 역시 외물(外物)이라 본심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기송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04
스승 이항로는 주자의 주리적 화이사상을 우국ㆍ애국적 민족정신으로 승화시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이항로는 지켜야 할 정(正)과 물리쳐야 할 사(邪)를 엄격히 구분하여 서구열강의 도전을 제국주의적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의 전통적 문화의식과 정치제도를 계승하면서 서양인들의 문명일체를 배격함으로써 민족보전의 길을 찾으려 하였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가 주장한 주리적 위정척사의 사상을 계승하여 척양척왜(斥洋斥倭)05를 주장하며 주리척사(主理斥邪)06의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위정척사파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의 사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위기상황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위한 항일의병투쟁과 독립운동 등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안으로는 안동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여 조선의 전통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제도적인 모순에 항거하는 민중의 항쟁에 의한 도전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열강의 정치적ㆍ경제적 침략을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이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최익현은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30세에 신창(충남 아산시)현감으로 나갔으나 충청감사의 부당한 명령에 굴할 수 없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34세에는 언관(言官)의 지위인 지평(持平)이 되어 바로 6개항의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만두었다. 36세(1868년)에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라는 중책을 맡아 바로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시폐(時弊) 4조를 지어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무진소(戊辰疏)인데 첫째,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둘째, 취렴정치를 금하며, 셋째, 당백전을 혁파하고, 넷째, 사문세(四門稅) 폐지를 주장하여 대원군을 공격하였다. 대원군의 실정으로 언로가 막히고 민정이 절박했던 상황에서 최익현이 올린 무진소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최익현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왕족의 후손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30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 파락호 행세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감추고 기회를 엿보던 대원군은 12세의 어린 아들[고종]의 등극으로 일약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대원군이 권력을 쥐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전국의 서원을 안동김씨 외척세력들의 권력의 근간으로 단정하고 서원 철폐령을 내려 안동김씨 일파에게 철퇴를 가한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안동김씨뿐만 아니라 당시 유학자들의 혹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실추된 조정의 위신을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의 중건으로 다시 세우려 하였다.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면서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자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는가 하면 자진해서 내는 돈이라 하여 원납전(願納錢), 사대문을 통과할 때 내는 통과세, 나라의 남자라면 모두 부과하는 장정세(壯丁稅), 호포세(戶布稅)07 등 수많은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자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파산자가 속출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치관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조야(朝野)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운현궁을 출입하던 권중록이 대원군의 지시를 받고 상소를 올려 최익현을 탄핵하자 고종은 부득이 사직의 벌을 내렸다. 38세(1870년 6월)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체직(遞職)08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왔고, 40세(1872년 6월)에 또 돈령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1세(1873년 10월)에 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최익현이 무진소를 올린지 5년 만에 다시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疎)를 올렸다. 이때는 대원군의 위세가 혁혁하여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고, 부자 사이의 인륜을 어지럽힌다 하여 10년 동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을 시작할 때부터 이와 같이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는 일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매우 싫어하였다. 고종의 나이 22세로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간절히 원하던 때에 선생의 말이 매우 시의적절 하였다. 고종은 선생의 충언에 힘입어 친정을 선언하고 대원군의 궐내 전용 출입문을 폐쇄하여 출입을 금하자 마침내 대원군은 권력을 내려놓고 양주 땅으로 하야하게 된다.
그러나 임금과 나라를 위한 최익현의 충정은 결국 부자를 이간시켜서 천륜(天倫)을 끊은 결과가 되어 반대파(남인세력)의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최익현은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09를 비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내용의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疎)를 올렸으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 땅에 위리안치(圍籬安置)10 되는 처지가 된다. 3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의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위정척사(衛正斥邪)11의 길을 택하게 된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 앉아 일본과의 조약을 결사반대 하였다. 도끼를 들고 올리는 상소는 받아들일 수 없다면 목을 쳐달라는 강력한 의지와 왕에 대한 압박인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렸으나 결과는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4년 후 흑산도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그 후 20여 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왜인(倭人)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최익현은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疎)를 올리면서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 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 경기도 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소투쟁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한 최익현은 언론을 통한 위정척사 운동을 적극적이고 무력에 의한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최익현은 74세 때(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임병찬(林秉瓚, 1851~1916) 등과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하여는 일본이 저지른 16조목에 걸친 배신행위에 대하여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한 의병은 태인읍을 무혈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주민과 관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창에 입성할 때는 그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전주경무고문지부 소속 일본 경찰대를 물리치고 전남 곡성에 들어갔을 때의 의병 수는 천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소총 등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고 사기는 충천하였다. 1906년 6월 8일에는 남원 진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얼마 후 왜병이 군(郡)의 동북쪽으로부터 추격하여 온다고 보고하는 이가 있어서 선생이 임병찬(林秉瓚)을 시켜 나아가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그들이 왜병이 아니라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의 진위대(鎭衛隊)임을 알려왔다. 이에 최익현은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나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물러가라.” 하였으나 양대군(兩隊軍)은 모두 듣지 않고, 전주병이 먼저 포를 쏘아 포환이 비오듯 쏟아지니 천여 명의 의병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죽거나 흩어졌다. 이에 선생은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모두들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살아남은 의병이 모두 해산하였으나 임병찬, 정낙언(鄭樂彦, 1872~1906) 등 21명은 끝까지 선생 곁에 남았다. 선생은 이들과 함께 순창 객사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의 시체인지 알 수 없으니 각자 이름을 써서 벽에 붙이고 이름 밑에 바른 자세로 앉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城) 안에 있으면서도 관을 쓰고 예를 행하여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 앉았다. 곧이어 추격해 온 양대 지방진위대의 빗발치는 탄환에 21명 중 정낙언 등 9명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12명은 체포 구금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12
1906년 6월 11일 서울로 압송된 최익현 일행은 조선의 백성이면서 왜인의 재판에 의해 3년형을 받아 대마도의 엄원 위수영 경비대에 피금되었다. 피금된 상황에서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단식으로 항거하여 조선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최익현은 적지인 대마도에서 노쇠하고 지친 몸에 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고국으로 운반되어 충청도 노성군 월오동면 지경리 무동산 아래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사지냈으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는 강제로 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이장케 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1962년 선생의 항일의병투쟁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노인숙, 「면암 최익현 한시연구」, 국학자료원, 2002.
노인숙, 「면암 최익현의 사상연구」, 청어람교육 26집, 2003.
박석무,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경향신문.
이태룡, 「최익현의 순창의병과 유소연구」, 배달학회, 1992.
최익현/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면암집」, 솔, 1997.
<대순회보> 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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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화서(華西).
02 『대학』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주희의 이론으로 항상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여 자기 덕성을 닦고, 널리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다.
03 敬으로써 내면을 정직하게 함.
04 노인숙, 『면암 최익현 한시연구』, 국학자료원, 2002, pp.60~62.
05 서양과 일본을 배척함.
06 정통문화가 이질문화(異質文化)의 도전(挑戰)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의식(意識)으로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
07 봄과 가을에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 무명)나 저포(苧布, 모시)를 징수하던 세제(稅制).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 받던 군포제(軍布制)를 호포제(戶布制)라는 균일세(均一稅)로 개혁하여 강제로 양반도 세부담을 지도록 하였다.
08 벼슬을 갈아 냄. 체임(遞任).
09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
10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11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이념으로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 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12 최익현/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면암집』, 솔, 1997, pp.181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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