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증자(曾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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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436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최정락
“어느 날 상제께서 형렬에게 대학에 있는 우경일장을 외워주시니 그 글은 다음과 같도다.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傳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舊本 頗有錯簡 今因 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爲序次如左”(교운 1장 56절)
위의 구절은 상제님께서 『대학』(대학장구) 경문(經文) 1장 마지막에 있는 주자(朱子, 1130∼1200)의 말을 외워주신 것이다. 원문의 해석은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것을 증자가 기술하였고, 전문(傳文) 10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 구본(舊本)에 자못 착간(錯簡)이 있으므로, 이제 정자(程子)가 정한 것을 따르고, 다시 경문(經文)을 상고하여 별도로 차례를 만들기를 왼쪽과 같이 하였다.”로 풀이된다. 여기서 증자(曾子, 기원전 505∼436년)는 상제님께서 강조하셨던 『대학』01의 전술자로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언행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증자의 생애
증자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로 공자의 제자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가상현)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 아래였다. 그는 아버지 증석(曾晳)02과 함께 공자에게 배웠는데, 공자의 제자 중 특히 효(孝)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후세에 『효경(孝經)』 또한 공자가 증자를 위하여 효도를 진술한 내용이라고 알려졌을 정도이다.03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그의 효행이 잘 드러나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제나라에서 그를 불러 경(卿)으로 삼고자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해야 할 터인즉 그렇게 되면 나의 늙은 부모는 멀리 해야 할 터이니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계모 밑에서 구박을 몹시 당했으나 변치 않고 잘 봉양했다.04
『논어(論語)』 안에서 그는 열다섯 번 등장하는데 흔히 증자(曾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정이(程頤, 1033∼1107년)는 『논어』가 유약(有若)과 증삼(曾參)의 문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자(子)의 칭호가 붙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魯鈍: 어리석고 순박함)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뜻이 성실했기 때문에 공자 도(道)의 진수(眞髓)를 얻었다고 한다.
증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가 많았다. 공자가 죽은 뒤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도를 전하기도 하고 경(卿)·대부(大夫)의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고향 수사(洙泗)에서 종신토록 강학(講學) 활동을 하여 7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언언(言偃), 전손사(顓孫師) 등이 그를 공자처럼 섬기려고 하였으나, 증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이것이 자사의 제자를 통해 맹자(孟子)에게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宋代) 주자가 『대학』의 전(傳)을 증자가 쓴 것이라고 진술한 이후로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거쳐 자사, 맹자에게로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증자를 흔히 종성(宗聖)이라 칭하기도 한다.05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1740∼1816년)은 “성도(聖道)의 밝힘은 대부분 단목사(端木賜: 子貢)에 의해서였고, 성도의 전함은 대부분 증삼에 의해서였다. 단목사의 공은 당시에 있었고 증삼의 공은 후세에 있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청대의 완원(阮元, 1764∼1849년)은 “공자의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마땅히 증삼에서 비롯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학자들은 그를 종성(宗聖)으로 받들고 안회(顔回), 자사, 맹자 등과 같이 사성(四聖)으로 일컬었으며,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에 안회 다음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낸다.06
증자의 저술로는 『효경』과 『대학』이 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공자께서 증자가 효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어 『효경』을 짓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송대의 형병(邢昺, 932∼1010)은 『효경』이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십삼경(十三經)’에 속하는 『효경』의 내용과 형식만을 보면, 증자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 확실하다.07 다음으로 『대학』을 보면, 『대학』이라는 제목의 글은 본래 『예기(禮記)』의 총 49편 중 제42편의 글이며, 주자에 의해 독립된 경전으로 정리되어 사서(四書)의 하나가 되었다. 『대학』의 전문은 1,753자에 지나지 않는 단편이다.08 『대학』의 저자에 관해 여러 이설이 있었지만 주자는 공자의 수제자였던 증자와 그 문하생들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09 주자는 『대학』의 내용을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經)은 공자의 뜻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들이 찬술한 것이라 하였다. 주자의 『대학』 개정본인 『대학장구』가 간행된 이후 『대학장구』는 사실상 대학의 표준 판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증자의 언행
『논어』에는 증자의 언행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그는 공자의 도(道)를 충(忠)과 서(恕)라고 설명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한 가지 이치[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시니, 증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증자가 대답했다. “부자(夫子)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10
충(忠)은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다. 공자 사상의 근본 개념은 인(仁)이고 인은 타인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다. 이런 점에서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충서(忠恕)로 파악한 것은 스승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11 충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해소된 자타일여(自他一如)의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인(仁)의 본질은 충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즉 충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구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실천을 위주로 하여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을 수양 방법으로 삼았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붕우(朋友)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전수(傳受)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12
증자는 이 세 가지로 매일 자신을 반성하여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서 자신을 다스림에 정성스럽게 하였다. 이는 학문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며, 세 가지의 순서는 충(忠)·신(信)·전습(傳習)하는 근본이다.13
한편 그는 효(孝)로 유명했는데, 『논어』와 『맹자』에 그의 효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그는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아 효의 내용을 심화시켰다. 『맹자』에는 증자가 아버지 증석을 어떻게 봉양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증자가 아버지를 봉양할 때 식사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아버지가 다 드시고 난 뒤 아버지에게 “이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시렵니까?” 하고 물었으며, 아버지가 “이 음식이 아직 남은 것이 있느냐?” 하고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아버지의 뜻이 다시 남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까지 헤아린 대답이었다.14 증자는 부모님의 몸만 봉양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봉양했던 것이다. 또한 증석은 생전에 대추[羊棗]를 즐겨 먹었는데 증자는 아버지가 별세한 뒤, 차마 대추를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15 이것은 증자가 얼마나 경건한 자세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실천했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또한 『논어』에는 증자가 죽기 직전의 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증자가 병이 위중하자,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였다. “(이불을 걷고) 나의 발과 손을 보아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전전(戰戰)하고 긍긍(兢兢)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하였으니, 이제야 나는 (이 몸을 훼상시킬까 하는 근심에서) 면한 것을 알겠구나, 소자(小子)들아!”16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며 손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런 까닭에 죽기 전에 자기 몸에 아무런 손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몸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려던 평생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17 『시경』의 구절과 같이 마치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세심히 주의하며 살았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효도에 대한 투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상으로 증자의 생애와 언행이라는 주제를 살폈다. 증자는 효를 위해 평생토록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가졌고 수양을 위해서 매일 자신을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는 대순진리를 수행하는 수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그의 삶의 자세가 잘 드러나는 『논어』 「태백」의 구절로 글을 마친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논어』 「태백」)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군자(君子)는 인(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멀지 않은가?”
참고문헌
『전경』
성백효, 『(懸吐完譯) 論語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성백효, 『(懸吐完譯) 孟子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성백효,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김학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서울: 명문당, 2003).
김현식, 『공자와 제자들의 유쾌한 교실』 (서울: 이순, 2012).
이기석·한용우, 『大學』·『中庸』 (서울: 홍신문화사, 2001).
이민석, 『공자가어』 (서울: 을유문화사, 2003).
유교사전편찬위원회, 『儒敎大事典』, (서울: 박영사, 1990).
황태현, 『공자와 세계 1』 (서울: 청계, 2011).
勞思光, 정인재 역, 『中國哲學史(古代篇)』, (서울: 탐구당, 1986).
司馬遷·李公麟, 이찬구 역, 『72 孔子제자』, 서울: 동신출판사, 1992.
<대순회보>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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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경』에는 『대학』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교운 1장 55절, 교운 1장 56절, 교운 1장 57절 등 총 12군데 나온다.
02 증자의 아버지로, 이름은 점(蒧) 자는 자석(子晳)이다. 공자를 모시다가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고 “늦봄에 봄옷이 이미 만들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 동자(童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해 공자께서 감탄하시며 칭찬하셨다. (『논어』 「선진」) 이를 보아 증석은 안빈낙도의 청빈한 삶을 산 제자로 보인다.
03 김학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서울: 명문당, 2003), p.374.
04 『공자가어』 권9 「72제자해」
05 유교사전편찬위원회, 『儒敎大事典』 (서울: 박영사, 1990), p.1480.
06 같은 책, p.1481.
07 황태현, 『공자와 세계 1』 (서울: 청계, 2011), p.162.
08 『중용』은 3,568자, 『논어』는 15,917자, 『맹자』는 35,374자이다.
09 이기석ㆍ한용우, 『대학』ㆍ『중용』 (서울: 홍신문화사, 2001), p.10.
10 『논어』 「이인」
11 勞思光, 정인재 역, 『中國哲學史(古代篇)』 (서울: 탐구당, 1986), p.89.
12 『논어』, 「학이」
13 『논어』, 「학이」, 朱子 註,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이르고, 성실히 하는 것을 신(信)이라 이른다. 전(傳)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고, 습(習)은 자기 몸에 익숙히 함을 말한다.”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傳, 謂受之於師. 習, 謂熟之於己.)
14 『맹자』, 「이루ㆍ상」
15 『맹자』, 「진심ㆍ하」
16 『논어』, 「태백」
17 김학주, 앞의 책,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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