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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한신(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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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6,3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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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백경언

 

  한신은 진말(秦末)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설한 한초삼걸(漢初三杰: 소하, 장량, 한신)의 한 사람으로 상제님께서는 병선(兵仙)01이라고도 칭했던 인물이다. 그는 무명시절 가난하고 처량한 역경 속에서 백정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과하지욕(跨下之辱)까지 당하면서도 뜻을 잃지 않더니 종내 파초대원수(破楚大元帥)가 되어서는 당대에 누구도 당할 수 없다던 초패왕 항우를 멸하여 초(楚)·한(漢) 간의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중국을 통일하는 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관심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고 상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을 이용해 허를 찌르거나, 물을 등 뒤에 두고 싸우게 하여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죽을 고비에 둠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등 신출귀몰한 전술을 운용하여 전장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으므로 가히 병법의 신으로 불렸다. 

  전술에서의 뛰어난 능력 못지않게 그는 보은(報恩)이라는 측면에서도 여러 일화를 남겼다. 어려웠던 시절의 조그마한 은혜를 잊지 않고 후하게 갚아 ‘일반천금(一飯千金)’했다거나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보다도 유리한 지경에 처하여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마저 퇴사식지(堆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 때문에 취하지 않았던 사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능력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의 시기와 의심을 받게 되었고 결국 여태후의 계략에 걸려 장락궁에서 체포되어 참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파란만장했던 한신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통하여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권력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를 끝까지 보여준 인물이란 인상을 준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회음후열전(淮陰候列傳)」에 나오는데 『사기』 130편 중에서도 문학적으로 백미에 꼽히고 있다.  

  사마천이 한신의 이야기를 「회음후열전」이라고 한 이유는 한고조 유방이 그를 초나라 왕에서 강등시켜 회음후(회음땅의 제후)로 삼았기 때문이다.02 「회음후열전」에 의하면 그는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사람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었다. 무위무관(無位無官) 평민일 때는 가난한데다가 선행이 없었으므로 추천을 받아 관리로 뽑히지도 못하였고, 또 장사하여 생계를 꾸릴 능력도 없었다. 이로써 언제나 남에게 붙어서 먹으니 사람들 가운데 그를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일찍이 회음의 속현(屬縣)인 하향(下鄕)의 남창(南昌)에 정장(亭長)03으로 있던 자에게 의탁하여 두어 달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아내가 한신을 귀찮게 여겨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 속에서 먹어치우고는 한신이 가도 밥을 주지 않았다 한다. 

  굶주린 한신이 회음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빨래 일을 하던 아낙이 그가 굶주린 것을 알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수십일 동안 밥을 주었다 한다. 이때 한신이 아낙에게 “내 언젠가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소이다.” 하자 부인은 화를 내면서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내가 가엾게 여겨 밥을 주었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느냐?”라 했다. 회음의 백정촌(白丁村) 젊은이들도 그를 업신여겨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음이 두려우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모욕했다.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04 온 저자의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조소(嘲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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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 / 위키피디아 

 

  기원전 209년 한신이 항우의 초군에 가담했으나 항우는 그를 낭중(郎中)으로 삼았을 뿐 중용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번 항우에게 계책을 올렸으나 채용되지 않자 항우가 진(秦)을 멸하고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여 남쪽의 촉(蜀)땅으로 보낼 때 초왕 항우에게서 도망하여 한으로 귀속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창고지기에 해당하는 연오(連敖)라는 보잘 것 없는 벼슬을 받았을 뿐이다. 오히려 어느 땐 법에 걸려 참형(斬刑)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그가 하후영(夏侯嬰)의 천거로 한왕으로부터 받은 벼슬은 군량미를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였을 뿐이다. 아무도 그를 뛰어난 인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일로 인해서 소하(蕭何)와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소하는 그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유방에게 한신을 다음과 같이 천거했다.

 

  “한신과 같은 인물은 국가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둘도 없는 인사입니다. 왕께서 한중(漢中)의 왕으로 만족한다면 몰라도 천하를 쟁취하려면 한신이 아니고는 함께 대사를 도모할 자는 없습니다.”

 

  소하의 말을 받아들인 한왕이 대장군을 맞을 준비를 하자 한의 진영에는 대장을 임명한다는 소식에 제장들은 모두 기뻐하며 각기 자신이 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대장에 임명된 자가 한신이었으므로 전군(全軍)이 모두 크게 놀랐다.05 파초 대원수(破礎大元帥) 한신은 이렇게 등장하였다. 한신은 대원수가 되자 한왕에게 초왕은 필부(匹夫)의 용(勇)과 아녀자의 인(仁)을 지녔을 뿐이라고 말하여 그를 위무(慰撫)했다. 특히 초왕이 통과하는 곳은 어디나 학살과 파괴가 일어나 천하에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나 한왕은 관중으로 들어가자 진(秦)의 가혹한 법률을 제거하고 삼장(三章)의 법06을 약속했을 뿐, 백성들에게 위해(危害)를 주지 않아 진의 백성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주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동진(東進)하면 격문 한 장으로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도도히 주장하였다. 이에 한왕은 크게 기뻐하며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생각했다.

  한신은 대장군으로서 먼저 17가지의 군율을 정하고 그 엄정함을 보였다.07 한신을 만나기 전까지 한의 진영은 유방(劉邦) 자신부터 무인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라 군율을 몰랐고, 병사들 역시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진 터라 수는 많았지만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불릴 만큼 군율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러한 군사를 한신은 불과 몇 달 만에 단순히 찌르고 베는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형태가 아닌 전법(戰法)을 운용하는 군대로 재탄생시켰다. 그리하여 한(漢) 원년(元年, 기원전 206) 8월에 유방은 한신이 키운 군대를 거느리고 항우와 싸우기 위해 한중을 나올 수 있었다. 이는 항우가 진을 멸하고 여러 장수를 봉건(封建)함으로써 유방이 한중에 들어온 4월로부터 불과 넉 달만의 일이었다. 

  한신은 번쾌를 불러 한중(漢中)으로 들어 올 때 불살라 버렸던 잔도(棧道)를 한 달 안에 복구하라 명했다. 물론 군령을 어기면 참수형이 가해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잔도는 험한 벼랑에 나무를 박아 만든 길인데 삼백리나 되었다. 유방이 지금의 쓰촨(四川)성 지역인 한중으로 들어올 때 관중으로 통하는 이 길을 스스로 태워버림으로써 항우에게 자신은 관중을 넘볼 마음이 없다는 뜻을 보였던 길이다. 그러나 이는 자국의 병사들마저 속이는 한신의 전략으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고, 자신은 남정(南鄭)의 옛길을 통해 진창(陳倉)으로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 한 번의 진격으로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일거에 관중을 점령했다. 이로써 기원전 202년에 끝나는 초·한 전쟁 4년의 서막을 열게 된다.

  한(漢) 2년 (기원전 205) 한신은 함곡관에서 나아가 위(魏)의 황하 이남의 땅을 점령했다. 한왕(韓王: 鄭昌)·은왕(殷王: 司馬印)이 모두 행복했으며 제(齊)·조(趙)의 군대와 연합하여 초(楚)를 공격하였다. 유방의 한군은 4월에 팽성에 도착했다. 이때 유방은 한신의 진언을 듣지 않고 60만 대군이라는 숫자만 믿고 항우가 거느린 3만 5천과의 싸움에 직접 나섰다가  50만이 괴멸되는 타격을 입었다. 한신이 나서 다시 군대를 수습하고 한왕과 형양(滎陽)에서 합류하여 경수·삭수(모두 지금의 하남성) 사이에서 초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초군(楚軍)의 서진(西進)만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팽성에서 한나라가 패하자 색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가 한에서 도망하여 초에게 항복했다. 제와 조가 한을 배반하고 초와 동맹했다. 위왕(魏王) 표(豹)는 초와 화친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한군이 어이없이 패퇴하자 여러 왕들이 초에 가담함으로써 국면은 순식간에 초나라의 압도적 우위로 변하였다. 이에 한고조는 한신을 대장군 겸 좌승상으로 삼았다. 이후 한신은 위를 공격하였다. 위왕 표는 포관의 군비를 강화하고 임진을 방어하였다. 한신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배를 이어 임진을 건너가는 것처럼 가장하고는 군사를 숨겨서 하양(夏陽)으로부터 군사를 도하시켜 위도(魏都) 안읍(安邑)을 습격했다. 위왕 표가 놀라 병사를 이끌고 한신을 맞아 교전했으나 사로잡혔다. 한신은 위나라를 한(漢)의 하동군(河東郡)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한신은 북으로 조와 연을 치고 동으로는 제를 치며 남으로는 초의 양곡 수송로를 끊기 위해 병사 3만을 유방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유방은 한신이 든든하면서도 한편 두렵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북 지역을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장량과 상의한 후 한신의 배반을 감시할 인물로 장이(張耳)를 붙여 병사 3만을 내 주었다. 장이는 한신의 배신을 감시하는 역할로 파견된 만큼 그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고 쓸데없는 걱정인 것을 알았다한다. 한신이 다만 투박스럽고 우직하고 순진한 표정으로08 장이를 맞았기 때문이다.

  한신은 장이와 같이 조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대(代)나라를 공격하여 9월에 대국군을 격파하고 알여(閼與)에서 대나라 재상 하열(夏說)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의 출전으로 대를 굴복시키자 한신의 군사는 크게 불어났다. 한왕은 곧 사람을 시켜 그의 정병(精兵)을 보내 형양으로 가서 초군을 방위하게 했다. 한신은 여세를 몰아 조(趙)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조나라 군대는 정형구(井陘口)로 집결했는데 그 수가 20만으로 한신의 군대에 비하여 3~4배는 되었다. 한신은 경기병(輕騎兵)  2천을 선발하여 붉은 기치 하나씩을 가지고 다른 길로 해서 조군을 바라보게 하고 1만 군사를 정형구로 나가 배수진을 치게 하였다.

  한신이 대장기를 앞세우고 싸우다 거짓 패하여 하수가의 군진으로 달아나니 조군이 누벽(壘壁)을 비우고 이들을 다투어 추격하였다. 이때를 틈타 한신이 앞서 출동시켰던 기습병 2천이 비어있는 누벽으로 달려가 조의 기치를 모두 뽑고 한의 붉은 기치 2천개를 꽂으니 때마침 솟아오른 태양빛을 받아 깃발이 불꽃 피어오르는 듯하였다. 누벽을 나왔던 조군은 등 뒤에 시퍼런 강물을 두고 필사의 결의로 싸우는 한군을 이기지도 못하고 있던 터에 자신들의 누벽이 한에 함락된 것을 알자 어지러이 도망했다. 이 전투를 정형(井陘)의 전투이라 하여 제나라에서 벌인 유수(維水)의 전투과 더불어 그의 가장 유명한 전사(戰史)가 된다. 전투가 끝난 뒤 휘하 장수가 한신에게 물을 배후에 두고 싸우게 한 이유를 묻자 한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게 할 수 있으며 망하는 땅에 둔 뒤에야 존재하게 할 수 있다.09 나는 본래 사대부를 길들여 전투하는 것이 아니고 저자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하는 것이니 그 사세(事勢)는 그들을 사지(死地)에 두어서 스스로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생지(生地)를 준다면 다 달아날 것이니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이후 한신은 연(燕)과 제(齊)나라를 차례로 평정했다. 기원전 202년에는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패퇴시키는 대업적을 남겼다.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었던 한신으로 인해 한나라는 4년간에 걸친 초·한전을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한신은 천하명장으로서의 재능 이외에도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보답한 인물이다. 대장군으로 있던 어느 날, 한신은 자신이 굶주리고 있을 때 먹을 것을 베풀어주던 노파를 가까스로 찾아내었다. 그는 “할머니! 할머니는 제가 굶주리고 있을 때, 당신이 드셔야 할 점심을 매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생명을 부지하여 오늘이 있었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답례치곤 하찮은 것이나 이 돈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며 노파의 손을 잡고 천금을 건넸다. 이 소식을 들은 남창의 정장이 “나도 예전에 수개월 동안 한신을 우리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재워준 적이 있다. 설마 그 일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한신을 찾아왔다. 한신은 그들에게 일백금을 주었다. 

  한신은 또 자신을 조롱하던 회음의 백정을 불러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면서 장수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나온 그를 장수들 앞에 서게 하고 “그때의 인내가 오늘의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셈이었소.”라며 칭찬한 다음 즉석에서 그를 경호원으로 임명하였다. 한신의 보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제나라를 돕기 위해 항우가 초군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다고 여겨 보냈던 용저가 한신에게 패하여 초군의 형세가 약해지고 유방 역시 광무산에서 항우와 대치하느라 힘이 빠져 한신은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때에 있었다. 이를 당하여 괴철이 한신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초왕도 한왕과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 두 왕의 운명은 대왕께 달려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의 편을 들면 한이 이기고, 초를 편들면 초가 이깁니다. 대왕께서는 초와 한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마시고 그대로 양립시킨 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세 방면에서 할거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그러면 아무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와 한이 미치지 않는 후방을 제압하고 제후들을 복속시키면서 차츰 세력을 넓히시면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받는다는 말이 있으니 모쪼록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10

 

  이에 대하여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왕의 나에 대한 신뢰가 극히 두텁소. 나를 자신의 수레에 타도록 하시고 자신의 옷을 입도록 하시고 자신의 식사를 내가 먹도록 하시었소.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의 근심을 대신 품고, 남의 식사를 먹는 자는 그를 위해 죽으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내 이익을 위해 어찌 의를 배반할 것이오?”

 

  한신이 차마 한을 배반하지 못하자 괴철은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어버렸다. 한신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유방이 베푼 퇴사식지와 탈의의지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202년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고조가 되자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겨 앉혔다. 한신이 초의 풍속에 익숙하므로 초나라 오랑캐들을 다스리는 데 적임자라는 이유였다. 한신이 초나라를 다스리던 기원전201년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한신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였다. 황제의 의심을 풀기 위해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알현했으나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낙양으로 돌아온 후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했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자 유방은 그를 석방하고 회음후로 강등하여 장안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신은 기원전 196년 조나라 승상으로 있던 진희(陳稀)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다. 사마천은 「회음후 열전」에서 진희와 함께 모반을 하려다 들켜 처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희가 거록군 태수로 임명되어 회음 땅의 제후로 있던 한신에게 온 지 10년이 지나서 단독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한신과 직접 연관 지은 것이나, 한신이 진희를 만나고도 10년 동안 반란을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작 감옥의 죄수나 이용하여 반란을 획책했다는 기록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또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면 여태후가 꾸민 가짜 소환에 아무런 무장과 대책도 없이 혼자 입궐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한신이 죽은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50세를 약간 넘었으리라 생각된다. 부모·형제·처자 3족이 모두 몰살당했다. 추운 겨울의 일이었다. 사마천은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나라를 창업한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해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11이라 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란을 꾀했다고 폄하했던 사마천은 『사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자신의 생각과 소감을 말한 「태사공 자서」에서는 「열전」을 지은 이유를 “정의를 부지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몸으로 하여금 때를 잃지 않게 하고 공명을 천하에 세워서 70열전을 지었다”12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내용과 다소 다른 느낌을 준다. 

  어쩌면 한신이 주살당한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마천 자신이 이릉(李陵: ? ~ 기원전 74)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에 의해 궁형을 받은 몸13으로 다시 한신을 변호하기 어려웠던 것을 『사기』의 총평이라 할 자서(自序)14에서 이렇게 대범하게 말했는지 모를 일이다.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모반을 기도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한신은 모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이에 대한 논란은 학계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포박당하여 장락궁 종실에서 참수당할 때 “내 괴통15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이에 아녀자의 속임수에 떨어졌으니 어찌 하늘이 시키는 일이 아니겠느냐?” 했던 말이 그의 의중을 짐작케 할뿐이다. 상제님께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신(韓信)은 한 고조(漢高祖)의 퇴사 식지(推食食之)와 탈의 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한 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 신을 저버린 것이니라.(교법 2장 49절) 

 

【참고】 

『전경』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서울, 민음사, 2007)

사마천, 『사기열전』,남만성 역, (서울, 을유문화사, 1987)

사마천, 『사기열전』, 홍석보 역, (서울, 삼성문화개발, 1992)

이시야마 다카시, 『유방의 참모학』, 이강희 역, (경기, 사과나무, 2006)

<대순회보> 1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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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3장 39절: 束手之地葛公謀計不能善事  瓦解之餘韓信兵仙亦無奈何

02 한신의 직위변화는 집극낭중 - 연오 - 치속도위 - 대장군겸 좌승상 - 대장군겸 상국 - 초왕 - 회음후였다.

03 진한 시기에는 십 리마다 정(亭)을 두고 그 우두머리를 정장(亭長)이라 했다.

04 사마천, 『사기열전』, 홍석보 역, (서울, 삼성문화개발, 1992), p.316.

05 위의 책, p.317.

06 기원전 206년 한나라 고조(高祖:유방)가 진(秦)을 격파하고 함양(咸陽)에 들어갔을 때 백성(百姓)과 약속(約束)한 세 가지 법규(法規)로, 살인자(殺人者)는 사형(死刑)하고, 남을 해친 자 및 도둑질한 자는 엄벌(嚴罰)하며, 진(秦)나라 법은 폐한다는 것.

07 호출에 늦게 도착한 감군대장 은개(殷蓋)를 참수형에 처한 것. 이를 만류하려고 유방이 보낸 역이기(酈食其)도 ‘경군(輕軍)’의 죄로 참수하려다가 그와 함께 온 장령을 참수했다.

08 이시야마 다카시, 『유방의 참모학』, 이강희 역, (경기, 사과나무, 2006), p.143. 

09 陷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

10 이시야마 다카시, 『유방의 참모학』, 이강희 역, (경기, 사과나무, 2006), p.225.

11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서울, 민음사, 2007), p.811.

12 사마천, 『사기열전(하)』, 남만성 역, (서울, 을유문화사, 1987), p.850.

13 한무제가 노여워 한 것은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며 이광리를 깎아 내렸기 때문이다. 이때 이광리는 한무제와 처남, 매부간 이었다.

14 책을 쓴 사람이 직접 쓴 서문을 자서라 한다. 「태사공자서」는 사기의 맨 뒤에 실려 있으나 실상은 『사기』의 서문에 해당한다.

15 괴철의 이름이 무제의 휘와 같다하여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름을 바꿔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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