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방연(龐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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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5,766회 댓글0건본문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 빈(孫)의 재조는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능(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 량(諸葛亮)의 재조는 조 조(曺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데 있느니라. (교법 3장 28절)
방연(龐涓, 기원전 374~342)은 위(魏)나라 호족(豪族)의 자제로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태어난 위나라는 원래 제후국이 아니었다. 위의 시조인 위사(魏斯)는 원래 진(晋)나라의 신하였으나 후에 진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의 삼국으로 분할된 뒤, 주(周)의 천자로부터 제후로 추인(追認)받은 것이다.
위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데다 적극적인 인재등용과 정치, 경제 등의 개혁을 통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윽고 위사의 손자인 혜왕(惠王)에 이르러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당시 서쪽은 진(秦), 동쪽에는 제(齊), 남쪽에는 초(楚)나라가 각각 강성해져 위(魏)와 함께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세력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병법에 능한 군사 전략가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각국은 많은 재물을 들여가며 인재를 찾아 헤맸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은 방연은 병법을 공부하면 입신과 출세가 보장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주(周)나라 양성(陽城)의 귀곡(鬼谷)에 학식이 깊고 특히 병법에 정통한 귀곡자(鬼谷子)01라는 현인이 은거하고 있었다. 방연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하고 고향을 떠나 귀곡자를 찾아갔다. 같은 시기에 병법을 배우고자 귀곡자를 찾아온 청년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손빈(孫)02이었다.
두 사람은 출신과 처지가 달랐지만 서로의 빼어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기(知己)로 존중하다가 나중에는 의형제를 맺고 같은 오두막에 거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방연의 재기는 뛰어난 편이었지만 학업 성적은 손빈을 따라가지 못했다. 귀곡자가 어떤 문제를 제시하면 그는 항상 손빈보다 먼저 대답을 했으나 종종 틀려 칭찬을 받지 못했다.
3년 후, 위나라 혜왕이 방연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내 장수로 쓰려고 했다. 귀곡자는 그의 공부가 좀 더 무르익은 뒤에 떠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방연은 자신이 출세하면 잊지 않고 동문(同門)을 불러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위나라로 떠났다. 그 후 손빈은 더욱 공부에 정진하였고, 귀곡자는 그를 기특히 여겨 오랜 세월 소장하고 있던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13편을 전부 손빈에게 전수하였다.
한편 방연은 위(魏)나라의 장군이 되어 위(衛)와 송(宋)나라를 연이어 정벌하여 혜왕의 신임을 얻고, 적은 병력으로 제(齊)나라의 군대를 격퇴한 공로로 대장군이 되었다. 방연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을 즈음, 묵자(墨子)의 문하생 금활(禽滑)이 귀곡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손빈의 학식과 인품에 감탄하여 출사를 권했다. 손빈은 그의 권고를 사양하며 동문이 자신을 불러줄 때를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금활은 그 길로 위나라에 가서 혜왕을 알현했다. 손빈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혜왕은 즉시 방연을 불러 왜 손빈을 초빙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방연은 그가 위나라와 적대관계인 제나라 사람인지라 첩자(諜者) 노릇을 할까 염려되어 그랬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혜왕이 자신의 염려보다 손빈의 재능을 더 원했기 때문에 그를 초청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손빈은 동문의 부름에 즉시 행장을 꾸려 위나라로 향했다. 방연이 친히 그를 맞이하여 왕에게 데려갔다. 혜왕은 병법을 토론하다 그의 독창적인 안목에 크게 감복하여 손빈을 부군사(副軍師)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때 방연이 우선 그를 객경(客卿)03에 임명하고 나중에 손빈이 공을 세우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혜왕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말대로 하였다.
반년 후, 제나라 사람 하나가 손빈에게 사촌형이 쓴 편지를 가져왔다. 숙부가 세상을 떠났으며 남은 두 사촌형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으니 속히 귀향하라는 내용이었다. 손빈은 크게 슬퍼하며 자신이 지금 위나라의 벼슬자리에 매인 몸이라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답장을 써서 보냈다.
손빈은 까마득히 몰랐으나 사실 그 편지는 가짜였다. 제나라 사람인 척했던 방연의 심복은 손빈의 답장을 방연에게 전달했다. 방연은 편지 말미에 손빈이 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꾸민 내용을 추가로 써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혜왕에게 그 편지를 올려 손빈이 첩자라는 명백한 증거이니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혜왕은 그가 위나라에서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편지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손빈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친척이 많이 그리울 것이니 왕에게 청원하여 휴가를 받아 제나라에 다녀오라고 부추겼다. 손빈은 함께 설득해 주겠다는 방연의 말에 혜왕을 알현했지만, 제나라와 내통하기 위해 휴가를 청원한 것으로 오해받아 포박을 당했다. 방연은 손빈에게 자신이 혜왕을 찾아가 선처를 받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왕에게는 그를 폐인으로 만들어 제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결국 손빈은 양쪽 무릎 뼈를 들어내는 빈형(刑)과 얼굴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죄인임을 표시하는 묵형(墨刑)을 당해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방연은 의지할 곳이 없어진 손빈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손빈이 몸을 조금 추스릴 수 있게 되자 그가 암기하고 있는 병서(兵書) 『손자』를 필사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손빈은 동문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었던 터라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빈을 감시하던 시종이 그의 인간성을 흠모하게 되어 방연의 흉계를 모두 폭로하고 말았다. 손빈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음을 크게 한탄하며 병법을 필사해 둔 죽간(竹簡)을 모두 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온갖 미친 짓을 해댔다. 방연은 혹시 손빈이 연기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그를 돼지우리에 가두었다. 그 안에서도 손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혼자 지껄이거나 사람이 먹는 음식 대신에 돼지 먹이를 집어먹곤 했다.
때마침 제나라 대장군 전기(田忌)가 손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순우곤(淳于)과 묵자의 문하생 금활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방연은 손빈이 정말로 미쳤다고 생각한 터라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고, 손빈은 금활을 믿고 따른 덕에 무사히 구출되어 제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방연은 뒤늦게 손빈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혜왕이 추궁할 것을 염려하여 그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손빈은 제나라에서 자신의 기지와 능력을 발휘하여 점점 인정을 받아 마침내 제왕의 군사(軍師)04가 된다. 그러다 기원전 354년, 혜왕의 명령으로 방연이 조(趙)나라를 침공하였다. 위나라의 대군을 상대할 실력이 없었던 조나라는 즉시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손빈은 지금 도와주러 가도 늦을 것이라 판단하고 위나라 수도를 포위하여 자신들이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을 내도록 하였다. 도성의 위기를 전해들은 방연은 재빨리 회군(回軍)했지만, 계릉(桂陵)에 매복해 있던 제나라 군대의 급습을 받았다. 그는 그제야 이 모든 것이 죽은 줄 알았던 손빈의 계책임을 알고 분통을 터트렸으나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1년 후인 기원전 342년, 혜왕은 다시 방연에게 한(韓)나라를 합병하도록 명령했다. 한나라는 제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손빈은 거짓 퇴각하는 방법으로 적을 멀리 유인하는 계책을 내 놓았다. 위군이 제군을 추격하여 첫 번째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대략 10만 군사의 밥을 할 수 있는 규모의 아궁이를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은 5만 명, 그 다음 날은 3만 명분 정도의 아궁이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을 본 방연은 필시 사기가 떨어져 탈영자가 대거 속출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소수의 기병부대만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제군을 추격하였다.
이윽고 한밤중에 마릉(馬陵)에 도착한 방연은 앞길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나무들 때문에 행군을 멈추게 되었다. 이때, 길가의 큰 나무 한 그루에 어슴푸레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밝혀 보니 ‘방연. 이 나무 아래에서 죽다(龐涓死於此樹之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손빈의 계략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1만 명의 제나라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위군은 급습에 대처하지 못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져갔다. 방연도 화살 때문에 부상을 입어 도망을 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적과 싸울 여력도 되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끝내 손빈의 이름만 높여주고 말았구나!”라고 탄식한 후 자결하고 만다. 위군은 수장(首長)이 자결하자 사기가 급격히 꺾여 투항하거나 도망쳤다. 위나라는 마릉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여 결국 기원전 225년,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 참고문헌
ㆍ렁청진 編著, 『변경』, 더난출판, 2004
ㆍ화 장, 『지모와 책략』, 시아출판사, 2007
ㆍ박덕규 編著,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이야기 1』, 일송북, 2008
<대순회보>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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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기원전 5~4세기경 전국(戰國)시대에 실재한 인물이다. 본명은 왕허(王)이나 귀곡(鬼谷)에서 은거생활을 했다 하여 세간에는 ‘귀곡자’로 불려졌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천문과 수학에 정통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계략을 결정하는 데 능란하였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이 없었으나 출사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제자로 받아들여 교육을 하였는데, 각기 학생의 특징에 맞추어 유세, 병법, 음양, 술법 등의 학문을 전수하였다. 전국시대 군사전략가 손빈(孫)과 위나라의 명장 방연(龐涓)은 물론,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으로 각국의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02 기원전 약 380년경 제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병서(兵書) 『손자』를 저술한 손무(孫武)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손빈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 가난하고 고독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탓에 조숙하고 강인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청년이 되자 세상을 전란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귀곡자의 문하에 들어가 병법을 공부했다. 이후 동문이었던 방연에게 속아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제나라로 도망쳐 군사(軍師)가 된다. (사실 ‘손빈’은 빈형을 받고 붙여진 이름으로, 그의 본명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위나라 군과 대전하여 모두 승리하는 쾌거를 이뤄낸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손빈병법』을 저술하였다.
03 다른 나라에서 와서 공경(公卿)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당시에 객경이라는 벼슬은 신하보다는 높았지만 실권이 전혀 없는 자리였다.
04 사령관 밑에서 군기(軍機)를 장악하고 군대를 운용하며 군사 작전을 짜던 사람. 또는 책략이나 수단을 교묘하게 잘 꾸며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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