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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송구봉(宋龜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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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3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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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임진란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震默)이 당하였으면 석 달이 넘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불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 (예시 73절)   

 

  조선시대 중종에서 선조 때까지 살다간 송익필(1534~1599)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낯선 이름이다. 그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에게 스승같은 벗으로 존중받았고, 조선 예학의 대가로 불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출신 성분과 부친이 지은 허물 때문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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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한재, 충남 당진군 송익필 위패를 모신 사당 

 

  “송익필은 비록 송사련의 아들이나,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이리하여 이이, 성혼도 모두 존경하는 친구로 여겨… 이이가 서얼의 임용을 허가하자고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송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린다.”  

<『선조실록』 선조 19년 10월 1일조>  

 

  송익필은 본관이 여산(礪山)이며,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峰)·현승(玄繩)이다. 1534년(중종 29)에 송사련과 연일 정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인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는 고려 원종 때 상장군을 지낸 인물로 무신집권기 말에 국권을 왕에게 환원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집안에 벼슬한 이가 없다가 조부 송린(宋璘)에 와서 직장(直長)01의 벼슬을 하였다. 

  부친 송사련(宋祀連)은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는 이 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 신사년에 송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 등을 고변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원래 송사련의 외조모인 중금(重今)은 안씨 집안 노비로 후에 정승 안당의 부친인 안돈후의 비첩(婢妾: 종 출신의 첩)이 되었다. 첩이 된 중금은 딸 감정(甘丁)을 낳아 송린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들이 낳은 아들이 바로 송사련이다. 그는 서자이긴 했지만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과는 외삼촌과 외사촌지간인 셈이다. 안씨 집안에서는 송사련을 크게 신임하였고, 그는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02이란 벼슬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광조를 따르던 안당이 기묘사화(己卯士禍)03로 파직되면서, 이 일로 아들인 안처겸·처근 형제가 사화를 주도한 남곤과 심정에 대해 불평스런 심사를 내비치고 다녔다. 송사련은 출세를 목적으로 이를 조작하여, 안당의 부인 사망 시 온 문상객과 장례를 도운 일꾼들을 거사세력으로 꾸며 고변하였다. 이 일로써 안당의 집안은 멸문되고 재산은 송사련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벼슬도 당상관까지 오르게 된다. 신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유생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히 비난하였다. 송사련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렸지만, 그 화(禍)는 송구봉 형제들에게 대물림된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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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봉에 관한 정사나 야사엔 반드시 율곡이 등장하는데, 조선 역사상 유례없이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그 조차도 구봉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율곡이 23세에 ‘천도책(天道策)’이란 시제로 시험에서 장원했을 때, 그에게 몰려드는 선비들에게 “송구봉의 학문이 고명하고도 넓으니 그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에 송구봉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막힘없이 명쾌하게 답변하니 이후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져 교유관계도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송구봉은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한다. 1566년(명종 21) 안당이 신원(伸寃)04되어 그 직첩이 환급되고, 사관 이해수는 서손의 과거 응시는 부당하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이후 경기도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峰山) 아래에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쓴다. 그의 호인 구봉은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1575년(선조 8) 그의 나이 42세 때, 부친 송사련이 사망한다. 그리고 그 해에 신사무옥이 송사련의 음모 때문임이 밝혀지고, 죽은 안당에게는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구봉 일가의 앞날에 일어날 파란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1584년(선조 17) 그의 막역한 벗인 율곡이 격무와 과로를 못 이겨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율곡의 죽음은 구봉의 남은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한창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서인인 율곡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그의 사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우계 성혼과 제자였던 이귀(李貴)가 이에 맞서 율곡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송구봉도 이를 돕고 이귀의 상소초안까지 작성해 주었다. 결국 송구봉은 동인들에게 ‘서인의 모주(謀主)05’로 찍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면서, 율곡에 대한 비난이 그에게로 방향이 바뀐다. 이후 동인들은 송구봉의 제거를 위해 송사련에게 원한이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을 이용한다.   

  동인인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은 안씨 후손들을 사주하여, 구봉의 외증조모 중금이 속양(贖良)06되지 않은 천인(賤人)이며, 조모 감정은 안씨의 핏줄이 아닌 노비 소생이라면서 그 자손들은 안씨의 노비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4대에 걸쳐 내려온 송씨 집안의 양적(良籍: 양인임을 나타내는 문서)까지 모두 없애 버리고, 2대 이상 양역(良役)07하면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법 규정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1586년(선조 19)에 송씨 집안을 완전히 환천(還賤)시켜 버렸다. 아울러 부친 송사련은 관작이 삭탈되고 안씨 집안에 의해 무덤과 시신이 크게 훼손되는 변을 당한다. 꼼짝없이 안가네 노비가 되어 버린 송구봉 일가 70여 명은, 피맺힌 복수심에 온갖 핍박을 가하려는 그들을 피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중봉 조헌(重峯 趙憲)은 구봉을 변호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송구봉은 동인인 이산해(李山海)로부터 율곡을 비난하라는 권유를 완강히 거절하고, 오히려 시세에 결탁하는 그를 풍자하는 시를 씀으로써 그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게다가 조헌의 이산해 비난 상소까지 이어지면서, 송구봉은 이 일의 배후 조종 인물 혐의를 받아 왕명으로 아우와 함께 구속되었다. 그러다가 기축옥사(己丑獄死)08 후 풀려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기축옥사의 배후로도 지목되어 그 사실여부를 두고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1591년(선조 24) 송강 정철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실각되면서 이 문제에 연루되어, 송구봉은 아우 송한필과 함께 다시 구속되어 각각 강원도 이성(利城)과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를 간다. 60세 되던 1593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나, 여전히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라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는 삶은 노년에도 이어졌다.   

  1596년(선조 29) 63세 때, 그는 김진려의 도움으로 충남 당진군 마양촌(馬羊村)에 기거하게 되면서 잠깐이나마 안정된 말년을 보낸다. 그의 소식을 들은 문인들과 젊은 학도들이 속속들이 찾아왔다. 이미 노비가 된 데다 도망다니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으니 그의 높은 학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 설명한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짓고, 벗들과 교환한 서신들을 묶어 「현승편(玄繩編)」을 엮는다. 1599년(선조 32) 8월 8일에 타계하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현재 당진의 원당동에는 부인과 합장한 무덤과 그의 사당인 ‘입한재(立限齋)’가 남아있다.  

  그의 사후, 제자와 후학들은 스승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누대에 걸쳐 그를 위한 신원운동을 벌인다. 1625년(인조 3) 김장생 등의 제자들이 상소하여 스승의 양민 환원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752년(영조 28) 충청감사 홍계희(洪啓禧)의 노력으로 드디어 송구봉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증직된다. 그의 사후 153년 만에 비로소 천적(賤籍)에서 해방된 것이다. 또 1762년(영조 38)에는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구봉집』이 발간되고, 1910년(순종 4)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구봉은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성리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그 이치에 밝았다.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 손꼽는 율곡조차도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 형제 뿐”이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20대에 이미 당대 8문장가09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살던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이 중국의 주자학을 단순히 이해하고 수용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성리학자들이 사변적 탐구에 치우쳐 현실문제에 소홀히 할 때, 송구봉은 실천중심의 성리학을 연구 개척하여 예학을 정립함으로써 조선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그가 쓴 『가례주설』은 가례에 대한 빈약한 연구풍토 속에서 예절학의 내용을 조선조에서 사실상 최초로 체계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구봉은 뛰어난 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당대에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조선 후기에 와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쟁쟁한 제자들만 보아도 그의 학문적 경지가 결코 낮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율곡과 우계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송구봉의 신분문제로 인하여 그들의 학원(學原)을 율곡에게 두게 되었다. 제자들 중 김장생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는 송구봉에게서 예의 기본을 다지고 발전시켜 아들 김집(金集)과 함께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부자의 문하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배출되어 예학을 더욱 크게 계승 발전시킨다. 이 외에도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이 “송익필을 등용하면 임진왜란이 7개월 밖에 안 걸릴 것이다.”10라고 예언했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로 민간에서도 그를 비범한 인물로 간주하는 이야기가 많다.  

  송구봉은 인간본성인 선(善)을 회복하는 실천 방법으로 직(直:거짓됨이 없는 바른 행동) 공부를 강조하였다. 그는 평생 직(直)을 생활철학으로 삼아 직심(直心), 직언(直言), 직행(直行)의 3직 실천에 힘썼다. 높은 학문의 경지와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직(直)의 실천으로 행실도 바르고 곧았기에, 유교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부친과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도 당대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ㆍ이종호, 『구봉 송익필』, 일지사, 1999 

ㆍ이상미, 『학이 되어 다시 오리 - 구봉 송익필의 시세계』, 박이정, 2006 

ㆍ황준연, 『이율곡, 그 삶의 모습』, 서울대 출판부, 2000 

ㆍ홍웅표, 『구봉 송익필 연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사학과 93년도 석사논문   

<대순회보> 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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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시대 종7품의 벼슬. 

02 천문, 지리, 기후, 시간, 점치는 일을 맡던 관청. 판관은 이곳의 종5품 관직. 

03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사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04 부당히 씌워진 죄에서 벗어남.  

05 일을 주도적으로 꾸미는 사람.  

06 종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良民)이 되게 함. 

07 노비가 아닌 비양반 신분자로 일에 종사함. 여기서는 조부 송린은 직장 벼슬을, 부친 송사련은 관상감판관과 당상관을 지냈음을 나타낸다. 

08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혐의로 일어난 옥사로, 동인의 상당수가 희생된 사건.  

09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송구봉. 

10 이기형, 『한국구전설화집(고양·파주편)』, 민속원, 2005, p.327~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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