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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소진(蘇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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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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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가사(東學歌詞)에 세 기운이 밝혔으니   

말은 소ㆍ장(蘇秦ㆍ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ㆍ두(李太白ㆍ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 고 이르셨도다.(교법 2장 42절)     

 

  위의 구절에서 보듯이 상제님께서는 『동학가사』의 내용을 인용하시며 말과 지식, 문장 각 분야에서 인류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신 바가 있다. 이들 중 소진(蘇秦, 기원전 330년경에 활약)은 장의(張儀, ?~기원전 309)와 더불어 언변(言辯)으로 전국시대를 풍미해 책사(策士)의 제1인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소진은 동주(東周)의 낙양(洛陽) 출신으로 자(字)는 계자(季子)이다. 약소국에서 태어난 그는 동쪽의 제(齊)나라로 유학을 떠나 당시 설득의 귀재였던 귀곡자(鬼谷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살았던 주(周)나라는 기원전 1046년경 은(殷)나라를 몰아낸 때부터 기원전 236년 진(秦)에게 항복할 때까지 거의 9백 년 동안 존속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경에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서쪽 위수(渭水) 유역의 호경(鎬京: 西安부근)에서 동쪽의 낙양으로 옮기면서 천도(遷都) 이전을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렀다.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403)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로 나뉘게 된다. 춘추시대에는 주 왕실을 받드는 봉건제가 약하게나마 유지되었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마저 사라졌다. 주 왕은 낙양 주변을 지배하는 약소세력이 되었고, 유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약육강식의 풍조가 만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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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과정에서 작은 나라들은 차츰 큰 나라에 병합되어 갔다. 춘추시대에는 170여 개에 달하던 나라들이 존재했으나, 전국시대엔 위(魏)ㆍ한(韓)ㆍ조(趙)ㆍ제(齊)ㆍ진(秦)ㆍ초(楚)ㆍ연(燕)의 일곱 나라만이 남아 이른바 전국칠웅(全國七雄)을 구성한 것이다.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강성한 나라는 서북방의 ‘진’이었고, 효산01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여섯 나라를 ‘산동 6국’이라 불렀다.   

  산동 각국의 당면과제는 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 것이 자국(自國)에 득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주장이 있었으니, 하나는 맨 서쪽에 위치한 진에 대항해 동쪽의 여섯 나라들이 세로로 뭉쳐야 한다는 합종설(合從說)이고, 다른 하나는 여섯 나라가 진과 가로로 연결해야 안전하다는 연횡설(連衡設)이다. 합종설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전개해 진의 동쪽진출을 막은 사람이 소진이고, 이에 맞서 연횡설을 전개해 진의 전국통일을 도운 사람이 장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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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진과 장의는 귀곡자의 문하에서 함께 유세학(遊說學)을 공부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이들 외에도 지난날 병법을 배워 먼저 하산한 방연(龐涓)과 손빈(孫)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유세학은 열국의 형세를 꿰뚫고 이해득실을 따져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에 나아가 실제적으로 군대를 운용하여 적군을 제압하는 병법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귀곡 선생 밑에서 몇 해 동안 유세학을 공부한 소진은 이론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 생각해 하산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제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소진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유세(遊說)로써 출세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뒤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접근했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파산한 채 낙향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형제는 물론 형수와 아내,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비웃었다.   

  “주나라 사람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나머지는 장사를 하거나 물건을 만들어 2할의 이익을 남기는데 시숙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세 치 혀로 출세를 하려고 하니 그 일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공연히 출세하겠다고 재산만 탕진하지 마세요.”  

  소진의 형수는 시동생을 나무라며 밥조차 주지 않았다. 소진은 몹시 부끄러웠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서글펐다.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서가에 있는 책들을 두루 살펴보며 다짐하였다.  

  “사내대장부가 고개를 숙이고 배웠으면 배운 것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하여 그는 스승 귀곡자가 건네주었던 『음부경(陰符經)』이라는 책을 펼쳐놓고 그것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음부경(陰符經)』은 강태공이 남긴 비서(秘書)인데, 1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에 담긴 비법을 터득한 소진은 제후들을 설득할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다시 가족들을 설득해 노자를 마련한 뒤 유세의 길을 떠났다.  

  처음에 소진은 당시 명목상의 천자(天子)에 불과했던 주 왕실의 현왕(顯王)을 찾아가 유세를 펼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왕의 측근들은 평소에 소진이 어떤 인물인지 들은 바가 있어 유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서쪽의 진효공(秦孝公)이 어진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때 진나라는 효공이 죽고 유세객들을 싫어하던 혜왕(惠王)이 즉위해 있었다. 진나라에 당도한 소진은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보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방법을 저술한 책을 진혜왕에게 바쳤고 직접 대면해 통일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진혜왕은 진나라의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소진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소진은 진혜왕에게 실망하여 이번에는 조나라로 갔다. 조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봉양군도 그와 같은 유세객을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소진을 반기지 않았다. 또다시 허탕을 친 소진은 산동 6국 중 가장 약소국이던 연나라로 들어갔다. 그곳에 1년 남짓 연나라 곳곳을 떠돌다가 겨우 연문후(燕文侯)를 알현할 수 있었다. 연문후를 대면한 소진은 약소국인 연나라의 약점을 파고들어 진으로부터 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인접한 나라들과 합종(合從)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천하는 강대한 진나라의 횡포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열국(列國)들에게 국토를 떼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사를 끌고 와서 침략하곤 했다. 연나라도 진나라의 위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연문후는 소진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합종을 하라고 했는데 어느 나라와 합종을 하라는 말이오?” 하고 물었다. 소진은 “천하는 전국칠웅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진나라여서 다른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을 제외한 6국이 합종을 하여 진을 방비하는 것입니다. 6국이 합종했다는 말만 들어도 진나라는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소진의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에 크게 감동한 연문후는 그를 연나라 재상에 임명하고 마차와 황금, 비단 등을 주어서 인접한 조나라로 파견했다. 소진은 연나라의 재상이란 신분으로 당당하게 조나라에 들어갔다. 마침 봉양군이 죽고 없었으므로 소진은 조숙후(趙肅侯)를 알현할 수 있었다. 합종 전략이 성사되려면 진나라와 인접한 조나라가 전면에 나서야만 했으므로 소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유세를 펼쳤다. 세 치 혀로 천하의 정세를 논하며 합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소진의 도도한 웅변에 조숙후도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화려한 수레와 상당한 양의 금과 옥, 비단 등을 하사하며 그로 하여금 산동 6국의 협력방안을 추진케 했다.  

  연나라와 조나라의 전폭적인 지지에 한껏 고무된 소진은 내친김에 한나라 선왕, 위나라 양왕, 제나라 선왕, 초나라 위왕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제후들과 만난 자리에서 소진은 각국 국력의 장단점을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해 산동 연합국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처럼 소진은 6국을 순행하면서 언변(言辯)으로 제후들을 움직였고, 기원전 334년에 드디어 합종전략을 성사시켜 6국의 재상이란 지위에 올랐다.   

  소진이 합종의 성사를 알리고자 조나라로 가기 위해 주나라를 지날 때 그 행차는 여느 국왕보다 더 화려하고 거창했다. 주왕은 소진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길을 깨끗하게 청소시키고 교외까지 특사를 파견해 영접케 하였다. 낙양에 살고 있던 소진의 형제들은 물론 아내와 형수, 일가친척들이 그의 출세소식을 듣고 모두 몰려나왔다. 그러나 막상 소진이 도착하자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쪽에 서 있었는데 특히 형수가 가장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물었다.   

  “형수께서는 지난번에는 그렇게 오만하시다가 어찌하여 지금은 이렇게 공손하시오?”  

  형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아뢰었다. 

  “도련님은 귀하신 몸이 되었고 돈도 많기 때문이지요.” 

  이에 소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사람은 똑같은데 부귀하면 일가친척도 두려워하면서 공경하고 빈한하면 업신여기는 것이 세상인심이구나.” 하고는 천금을 뿌려 일가친척은 물론 그가 조금이라도 덕을 본 사람에게는 수백 배로 보답하였다.  

  소진은 조숙후에게 연합국의 성공적인 탄생을 보고하였다. 조숙후는 노고를 치하하며 소진을 무안군에 봉하고, 6국이 합종한 맹약을 진나라의 함곡관에 보냈다. 진나라는 6국이 합종하여 진나라에 대처한다는 말을 듣고 발칵 뒤집혔다. 진혜왕은 급히 대부들을 불러들여 대처방안을 물었다. 

  “6국이 합종을 하면 우리 진이 그들의 군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합종이 깨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일제히 아뢰었다.  

  “유세객 한 놈이 세 치 혀를 놀려 진이 천하를 통일하려는 데 방해를 하다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고 진혜왕이 탄식했다. 소진이 주도한 합종체제는 성공을 거둬 이후 진이 15년 동안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 합종체제는 소진의 비극적인 최후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연나라 재상으로 지내던 소진은 죽은 연문후의 부인과 사통하였다. 그는 이 일이 새로 왕위에 오른 연이왕(燕易王)에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연을 위해 제나라에 가서 책략을 펴겠다는 핑계를 대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 왕은 소진을 총애했지만 대신들이 그를 시기해 자객을 보내 치명상을 입혔다. 

   제왕이 사람을 시켜서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자 죽음을 앞둔 소진이 제왕에게 말했다. “제가 죽으면 소진은 연나라의 첩자라는 말을 유포하시고 시체를 수레에 매달아 사지를 찢는 형벌에 처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암살한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린다는 방을 붙이면 저를 해친 자를 붙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이 그대로 했더니, 과연 소진을 해친 자객이 스스로 나타나 그의 원수를 갚아 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서로 싸워서 증오와 불신이 깊고 이해가 엇갈렸던 여섯 나라의 연합은 원래 오래가기 힘든 것이었다. 부지런히 6국을 오가며 합종체제를 보살피던 소진이 죽자 여섯 나라의 합종은 이내 깨지고 말았는데, 연횡책을 써서 6국의 합종을 깬 사람은 장의였다. 소진은 합종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진의 침략을 우려했다. 그래서 계책을 써서 관직을 얻지 못해 실의에 빠져 있던 장의를 분발시키고 진에 중용될 수 있게 뒤에서 도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의는 소진의 뛰어난 계책에 혀를 내둘렀고 그의 은혜에 보답코자 진이 6국의 연합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기여했다. 하지만 소진이 죽은 후 장의는 연횡책을 써서 합종책을 깨뜨리고 진의 전국통일을 도왔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ㆍ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 『사기5』-열전(上), 까지, 2003  

ㆍ이인호 저,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천지인, 2007 

ㆍ복거일 저, 『역사를 이끈 위대한 지혜들』, 문학과지성사, 2003 

ㆍ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上)』, 현암사, 2007 

ㆍ이수광,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일송북, 2002 

ㆍ미야자키마사카츠 저 오근영 옮김,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1 

<대순회보>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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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효산은 지금의 하남성 낙령현 서북방이며 효산 부근에 함곡관이 있으므로 함곡관을 기준으로 동쪽 6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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