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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손병희(孫秉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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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2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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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義菴) 손병희는 천도교 3대 교주로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본명은 응구(應九)이며, 의암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도호(道號)이다. 그는 충북 청주(淸州)에서 아전(衙前)의 서자로 태어나 22세(1882)에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손병희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손병희는 북접(北接)의 우두머리로서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官軍)을 격파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결국 1895년 원산(元山)ㆍ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교주 최시형의 뒤를 이어 종통을 계승하고 3년 동안 교세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01년 동학의 지도급 인물인 손천민이 관군(官軍)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연이어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손병희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ㆍ이용구와 함께 몸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亡命)하게 된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이름을 이상헌이라 개명(改名)한 뒤 국내에서 국헌 문란 죄로 망명해있던 오세창, 권동진, 조희연, 박영효, 이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동학(東學)의 재건을 위해 여러모로 고심하였다. 그는 장차 한국에서 개화와 혁신운동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국내의 동학교도 자제들 중 뛰어난 인재 64명을 선발하여 일본유학을 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손병희가 젊은이들을 새로운 문명과 접촉시켜 세계적인 문명사조에 호응시킴으로써 부강한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한창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국이 이러하다 보니 당시 두 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조선은 러ㆍ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꼼짝없이 승전국에 예속되어야만 했다. 손병희는 장차 조선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세계정세를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고, 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발 빠르게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그는 러ㆍ일 양국 간의 지리적 조건과 정신자세ㆍ군사전략의 차이 등을 들면서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조선은 미리 승산이 있는 나라에 우의를 표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손병희 혼자만의 생각일 뿐 당시 친러파가 요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만무한 상황이었다. 이에 손병희는 국가의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친러파 정권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그의 계획에 일본군의 힘을 빌리고자 권동진으로 하여금 당시 일본군 참모장이던 다무라[田村]를 대면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곧 다무라는 손병희의 계획에 동참하겠노라며 흔쾌히 승낙해왔다. 이에 손병희는 자신의 친동생인 손병흠을 불러 일본군과의 합동 거사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내에 결집된 동학교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계획은 동학교도들이 모두 상인으로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각 항구에 대기하였다가 다무라가 지원하기로 한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이들과 함께 도성(都城)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거사를 목전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고국에 건너가 자신의 거사계획을 전달하고자 했던 동생 손병흠이 부산에서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1903년 8월 3일)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든든한 동조자 다무라마저 손병흠이 급사한 이틀 뒤 연이어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손병희가 다무라를 위시하여 일본의 군부세력과 국내교도들의 힘을 규합하여 시행하고자 했던 조선정부정복계획은 예기치 않은 동조자들의 급사로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침식하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실의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국에 있는 법무대신 이윤용과 의정대신 윤용선을 시켜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고 전국 360여 군에 민회(民會)01를 설치해야 한다고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군권(君權)통치가 절대시 되던 시기였던지라 민회를 설치하여 민권과 민주이념을 고취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수용되기 힘든 사안이었다. 하여 손병희는 스스로라도 강력한 정당조직을 결성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곧 그는 동학교단의 중진들을 일본에 오게 하여 개혁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민회를 조직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한 중진들은 곧 그의 의사를 교인들에게 전달하고 개혁[갑진개화혁신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표증으로 단발흑의(斷髮黑衣)차림을 할 것을 당부했다. 당시는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였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교도들의 마음을 또 한 번 불타오르게 했다. 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해져 1904년 8월 30일 단 하루 만에 상투머리를 자르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이 16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민중이 어지러운 사회풍토를 바로잡아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조하려는 개혁의지가 손병희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중의 이 같은 노력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에서는 그들이 조직한 민회가 동학의 잔여세력임을 알아차리고 탄압을 가해왔다. 이로 인해 손병희는 같은 해 9월 조직명을 진보회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진보회의 회장직을 맡은 부하 이용구가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로 넘어 감에 따라 손병희가 추진하고자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에 손병희는 자신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동안 실추된 동학의 오명을 회복하고자 교명(敎名)을 천도교로 개칭, 1906년 1월 일본당국으로부터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은 뒤 귀국하여 곧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였다. 귀국 후 그는 교단을 배반하고 교명을 팔아가며 동학의 지도자인양 행세한 일진회의 앞잡이 이용구와 그와 함께 일진회로 넘어간 두목 급 61명을 교단에서 출교시켜 교(敎)와 회(會)02를 분리시키고 교도(敎徒)들을 설교(說敎)하는데 주력하며 교세재건에 전념했다. 그가 교와 회를 분리시키자 이용구 일파의 만행은 더욱 더 악랄해졌다. 이용구가 함께 출교당한 61명의 두목들을 거느리고 마침내는 천도교에 항거하기 위해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교주가 되어 또다시 천도교에 응수해 온 것이다. 당시 손병희는 이용구와 함께 61명의 두목급 인사들을 출교시킨 상황이라 교단의 재정도 바닥난 상황이었다. 이에 손병희는 신앙과 포교에 지장을 초래한 그들의 행위를 더 이상 관망할 수 없다고 여겨 각 지방에 있는 일진회원들을 인도하여 다시 천도교로 복귀시키고, 두목급 61인의 출교로 인해 바닥난 교내재정을 해결할 차로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천도교 일각에서는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하여 민중을 봉기,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손병희는 이 일의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강화회의의 한 원칙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천도교 중견간부들과 민족자결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계획한다. 이들은 먼저 협의를 통해 운동의 방침을 대중화시킬 것과 일원화시킬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 3개 원칙에 우선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곧 그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동참을 얻은 후 고종의 인산일(因山日:국장)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손병희를 포함한 민족대표들은 거사를 실행하기로 한 오후 2시에 약속을 어기고 처음 계획과는 달리 태화관(泰和館) 요리집으로 거사장소를 변경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만해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로 이를 대신하고서는 간단하게 만세삼창을 한 후 곧 축배를 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행위를 거사당일 처음부터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후 진행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경찰에게도 단 한 번의 저항 없이 의연하게 연행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손병희는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병보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병환으로 인해 결국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였다.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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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동학교단의 재건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후에 대동회, 중립회, 진보회 등으로 명칭이 변경됨. 

02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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