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정낙언(鄭樂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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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398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 낙언(鄭樂彦)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최익현의 만장을 다음과 같이 지으셨도다.
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 (교법 3장 20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동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앞을 다투어 밀려왔다. 이러한 위난을 맞아 조선의 수많은 지사들은 국권을 수호하고자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충의로 분연히 일어났다.
구한말 일제에 항거해 민족정신을 드높인 의병운동은 흔히 3단계로 나눈다. 첫째가 을미(乙未)의병, 둘째가 을사(乙巳)의병, 셋째가 정미(丁未)의병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이 계기가 되었다.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운동 중 특히 74세의 나이로 창의(倡義)한 거유(巨儒) 최익현(崔益鉉, 1833.12.5~1906.11.17)은 충절의 표상이자 일심의 모본(模本)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1906년 2월 면암 최익현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처음에 상경하여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인들의 방해로 상경하지 못하였다. 다시 판서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판서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곽종석(郭鍾錫), 전우(田愚) 등 당시 반일애국하는 지도급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제자인 고석진(高石鎭)이 면암의 전략참모격으로 전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林炳瓚, 1851.2.5 ~ 1916.5.23)01을 천거하여 그와 함께 전라도에서 거의(擧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거의에 참여한 면암의 제자 중에 정시해(鄭時海, 1872.3.26~1906.4.20)가 있었다.
정시해의 자는 낙언(樂彦)이고 호는 일광(一狂)이다. 전북 고창군 성송면 삼태(全北高敞郡星松面三台)에서 부친 정종택(鄭鍾澤)과 모친 거창 신씨(居昌愼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친시하(嚴親侍下)에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조석문안과 출입절차를 선현들의 가르침대로 어김없이 지켜서 몸에 배었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1898년에 부친이 급환으로 운명에 이르자 손가락을 깨서 구급하였고, 다음 해에 돌아가시자 고산중턱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했다. 모친상에도 아버님 때와 같이 3년을 시묘하였으며 전후 6년의 시묘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으나,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겨짐을 개탄하고 집을 떠나 스승인 최면암을 찾아갔다.
토적소(討賊疏: 오적을 응징하라는 상소)를 올리다 한계를 느낀 최면암은 그를 통하여 영남지방의 지사규합을 독려하고 의병봉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는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선비들을 찾아 창의를 모의하고 동지규합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는 의미로 ‘일광(一狂)’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1906(丙午)년 윤4월 13일 최면암은 문하생 100여 명을 거느리고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도착하여 최고운(崔孤雲) 선생 영정에 봉심(奉審)하고 이어 강회(講會)로 들어갔다. 강회를 마치자 최면암은 “…나는 구신(舊臣)의 처지에 있어 진실로 종묘사직과 생민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함이요, 성공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어찌 성공치 못하겠는가. 나와 상대하는 그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석진을 비롯한 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맹서하였다.
의진(義陳: 의병의 지역별 진영)은 이튿날인 윤4월 14일 아침부터 행군하여 정읍(井邑) 한교(閑橋)에 이르러 모군하니 백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때 고석진은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와 함께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성세가 더욱 떨쳤다. 이미 의진의 수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은 내장사(內藏寺)에서 유숙하고 15일 아침 군사 훈련을 마치고 순창(淳昌) 귀암사(龜巖寺)로 들어갔다.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가 총포와 포수를 보완하고 쫓아온 왜병을 성 밖에서 물리쳤고, 17일 곡성(谷城)을 거쳐 18일 남원(南原)으로 향하려다 순창의 군사 중에는 창의군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순창으로 향하던 중 오산촌(鰲山村)에서 머물렀다.
19일 관군과 결탁하여 의병을 궁지에 몰려고 하던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을 붙잡아 격노한 최면암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가 만류하고 이건용이 땅에 엎드려 눈물로 사죄하므로 지방관으로 지역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이건용은 본군에 돌아가 주둔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고는 다음날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함께 왜병을 거느리고 돌아와 의병을 습격하였다.
20일 해가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 옥과(玉果)와 금산(錦山)에 관군과 일본군들이 출진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최익현은 그들을 맞아 싸우고자 하였는데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여 그들이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진위대(鎭衛隊)로 구성된 관군임이 판명되었다. 최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전주 진위대가 먼저 발포하여 탄환이 비 오듯 쏟아지니 의병 1천여 명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방안에 있던 정시해가 홀연히 탄알을 맞고 죽어가면서 스승을 부르며, “시해가 외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 선생이 적을 죽이는 것을 돕겠습니다.”02라고 말하였다. 최면암이 그를 붙들고 통곡하니 좌중이 모두 통곡하였다.
최면암은 형세가 이미 틀어진 것을 알고 연청(椽廳)03에 꼼짝 않고 앉아서 좌우에 이르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제군은 모두 떠나라.”하자, 그를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자가 21명이었다. 최면암은 임병찬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써서 벽 위에 붙이도록 하고 각기 그 이름 아래에 앉도록 명한 뒤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별안간에 뇌성벽력과 폭풍우가 몰아쳐 양대의 군사는 깜짝 놀라서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이에 포성은 그쳤으나 군사들은 사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은데 촛불은 없고 시신은 방 한가운데 있어서 피가 흥건한데, 여러 사람들은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앉아 있었다.
21일 새벽 9명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최면암과 호위 유생 12인이 남았고, 최면암은 나기덕으로 하여금 ‘大韓義士 鄭時海之柩’라고 명정을 쓰게 하고 김기술, 임현주는 시신을 거두어 들판에 초빈(草殯)04하도록 하였다. 22일 광주 고문관 츠나시마 고지로(綱島幸次郞)의 심문이 있었고, 23일 전주 진위대 김희진(金熙鎭)과 일본군이 그들을 압송하였다.
최면암과 임병찬은 가마에 타고 나머지 11인은 줄지어 묶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최면암을 끝까지 따라간 유생들은 임병찬을 비롯하여, 고석진(高石鎭), 김기술(金箕述),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柳鍾奎),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崔濟學), 나기덕(羅基德), 이용길(李容吉), 유해용(柳海容)이었다. 이들 모두 서울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에 갇혀 윤 6월 26일 형을 받게 되었다. 최익현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74세의 노령으로 거친 의병생활과 감금 유배 그리고 단식 등으로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충격 때문에 병을 얻어 1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가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이었다.
임병찬은 최면암과 함께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와, 1910년 왕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었으며, 1916년 단식(斷食) 끝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애국애족의 공로를 기리어 최면암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임병찬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정시해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ㆍ이세현, 『독립유공자공훈록 1』, 국가보훈처, 1986
ㆍ최익현, 『국역 면암집』1집, 2집, 3집, 민족문화추진회, 1977
ㆍ광복회전라북고지부,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전주보훈지청, 1989
ㆍ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 독립기념관, 1995
<대순회보>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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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낙안군수를 지냈던 임병찬이 임낙안으로 불린 정황이 최제학의 『습제실기(習齋實紀)』 「면암선생창의전말」 p.730에 보인다. “…注書曰 率爾動兵 大爲不可 且旣有林樂安之深謀遠慮 則須與雲峯朴注書相通 同時起兵 合勢馳驅然後 嶺湖間義聲大振矣 又與花開姜頭領 相通而南北相應 則其勢益不孤矣 先生曰可 遂與李注書約 林樂安動兵”
02 최익현, 『국역 면암집』 3집, 민족문화추진회, 1977, p.184 참조.
03 군아(郡衙: 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던 관아)에서 구실아치(조선 시대에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가 일을 보던 곳.
04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송장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에, 한데나 의지간(倚支間: 원래 있던 집채에 더 달아서 꾸민 칸)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 또는 그렇게 덮어 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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