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생(賈生) > 인물

본문 바로가기

인물
HOME   >  교화   >   인물  

인물

전경 속 인물가생(賈生)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6,162회 댓글0건

본문

  상제님께서 김송환에게 외워주신 시 가운데에는‘賈生何事怨長沙(가생은 무슨 일로 장사를 원망하는가)’01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생(賈生, BC200~BC168)은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유명한 학자 가의(賈誼)의 별칭이다. 그는 하남(河南) 낙양(洛陽)사람으로 한고조(漢高祖) 7년(BC200년)에 태어났다. 작문에 능통하여 이미 18세에 군내(郡內)에 그 명성이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명성은 당시 하남태수(河南太守)이던 오공(吳公)02에게도 알려졌는데 오공은 가생을 자신의 문하로 불러들여 매우 총애하였다.  

  문제(文帝)가 즉위하면서 하남태수 오공(吳公)의 치적이 천하제일이며 그가 동향(同鄕)인 이사(李斯, ?~BC208)03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이유로 그를 정위(廷尉)04으로 발탁하였다. 이때 오공은 가생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정통하다고 황제에게 천거하였고 황제는 그를 불러 박사(博士)05으로 임용하였다. 가생의 나이 20세로 여러 박사들 중에서 가장 어렸지만 매번 조령(詔令: 천자의 명령)에 대해서 의논할 적마다 답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가생의 이러한 재능에 흡족해하여 박사가 된지 1년 만에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06까지 오르게 하였다.  

  태중대부가 된 가생은 당시 사용되고 있던 진(秦)나라의 법제를 완전히 바꾸기 위해 의례와 법률에 대한 전반적인 개정안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가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을 인정하여 그를 공경(公卿)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건국공신들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모든 일을 문란케 한다.’고 반대하면서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문제는 그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장사(長沙)07로 내보내게 되었다. 이때 가생에게 수여된 직책은 장사왕(長沙王) 오차(吳差)의 태부(太傅)08으로 직급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분명 좌천된 것이었다. 이처럼 가생이 주발을 비롯한 건국 공신들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은 그의 제안이 진나라의 법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 이외에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황제권 강화는 기득권을 쥐고 있던 공신세력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황제의 위상을 보면 이미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많은 건국 공신들의 도움으로 한을 건국(BC206년)하였기 때문에 이들 공신에 대해 일정한 권한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당대의 황제인 문제 역시 태위(太尉) 주발과 승상(丞相) 진평(陳平) 등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사(長沙)로의 좌천은 가생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는 습한 그곳에 가면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생은 자신의 이런 우울한 심사를 상수(湘水)09을 건너면서 「조굴원부(吊屈原賦)」를 지어서 나타내었는데 이는 굴원(屈原, BC343?~BC278?)10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것이었다. 다음은 「조굴원부(吊屈原賦)」이다.  

 

공손히 임금의 명을 받들어,  

장사(長沙)에서 죄를 기다린다네.  

얼핏 굴원에 대해서 들으니,  

멱라강(汨羅江)에 투신하였다고 하네.  

상수(湘水)의 조류에 몸을 맡기게 되니,  

굴원선생을 삼가 애도하도다.  

법도가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  

그 몸을 물에 던지셨도다.  

아, 슬프도다!  

만난 시대가 좋지 못하였으니.  

난새11와 봉황이 숨고,  

올빼미가 활개를 치는구나.  

재주 없는 자들이 존중받고,  

아첨꾼이 뜻을 얻는구나.  

현자와 성인은 난관에 봉착하고,  

방정(方正)한 자는 좌절하도다.  

세상에서 백이(伯夷)12를 탐욕스럽다고 하고,  

도척(盜)13을 겸손하다고 말하네.  

막야(莫邪)14의 칼을 무디게 만들고,  

납으로 만든 칼을 날카롭게 만드네.  

아,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선생의 무고함이여!  

주(周)나라 솥을 내다버리고,  

큰 호박을 보배로 여기는구나.  

지친 소에 멍에를 씌우고,  

절름거리는 나귀를 곁마15로 삼는지라.  

준마는 두 귀를 늘어 뜨리고,  

소금 수레를 끌고 있다.  

머리에 쓸 관을 신발로 삼고 있으니,  

어찌 오래 유지되겠는가.  

아, 가련한 선생이여,  

홀로 이런 재앙을 만나셨도다!  


두어라, 온 나라가 나를 몰라주니,  

홀로 우울할 뿐 누가 위로 하겠는가?  

봉황이 의연하게 높이 나니,  

스스로 날개짓하며 멀리 갔도다.  

깊은 연못의 신령스러운 용을 본받아,  

깊숙이 잠겨 자신을 지키도다.  

밝은 빛을 마다하고 은거하니,  

어찌 왕개미와 지렁이와 더불겠는가?  

성인의 덕성을 숭상하는 바,  

탁한 세상 멀리하고 자신을 숨겼도다.  

준마에게 고삐를 맬 수 있다면,  

어찌 개나 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지러운 곳을 떠나 억울함을 당하였으니,  

선생에게도 원인이 있도다.  

천하를 돌며 군주를 보좌할 수도 있는데,  

하필 고국만을 고집하셨을까?  

봉황은 천길 높이 올랐다가,  

덕이 빛나는 것을 보면 내려오도다.  

소인배들의 험괴한 징조를 보면,  

까마득히 날개짓하여 날아간다네.  

저 조그마한 구덩이에,  

어찌 배를 삼키는 고기를 담을 수 있겠는가!  

강호를 떠다니던 큰 물고기,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제압되는구나.16  

  

  이로부터 4년 뒤 그는 다시금 황제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때 황제는 귀신에 대해서 달리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가생에게 귀신(鬼神)의 본질에 관해서 물었다. 가생이 귀신의 이치를 상세히 말해주니 문제는 탄복하면서 다시 그를 우대하여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인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임명하였다. 이때도 가생은 제후들이 여러 군을 병합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의 삭감을 주장하지만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양회왕(梁懷王)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이때 그는 태부(太傅)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자학하며 1년 남짓 애도하다가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대순회보> 76호 

-------------------------

01 행록 4장 5절. 이 시의 원문은 김정국(金正國)의 『사재백언(思齋言)』과 한충(韓忠)의 문집인 『송재집(宋齋集)』에 실려 있다.  

02 그의 이름이 전하지 않은 관계로 그냥 오공이라고 함. 

03 초(楚)나라 상채[上蔡: 하남성(河南省) 상채현]사람이다. 순자(荀子)에게서 배운 법가류(法家流)의 정치가로 진(秦)의 당시 승상(丞相)이었던 여불위(呂不韋)에게 발탁되어 객경(客卿)이 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창립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위(廷尉)에서 승상(丞相)으로 진급한 실력자였으나 2세 황제 때 조고의 참소로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04 구경(九卿)으로 총칭되던 중앙행정기관의 하나로 형옥(刑獄)을 관장하였다. 

05 고금의 사사(史事)와 문헌전적(文獻典籍) 등을 관장했는데 황제의 학술고문에 해당했다. 각각 전문적인 학문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사의 통론에도 참여했으며, 아울러 순행하며 시찰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태상[太常, 구경(九卿)의 하나]의 속관(屬官)이었다. 

06 의논(議論)을 주관하던 벼슬. 진(秦)에서 처음 두어 역대로 계승되었으나 북위(北魏) 이후 산관(散官)으로 직함만 있었다. 

07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장사현(長沙縣). 상강(湘江) 하류(下流)에 위치함. 

08 ①삼공(三公)의 하나로 주대(周代) 천자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스리던 벼슬. ②태자(太子)를 보좌하는 벼슬, 전한(前漢)시대에 태자태부라 함. 

09 광서성(廣西省) 흥안현(興安縣)에서 발원하여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들어 가는 강. 

10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 때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그들의 모함으로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절명시(絶命詩)를 통해 죽어서 이 세상의 모범이 되고 죽음으로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남기고 장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辭)』가 있다. (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11 란(鸞): 영조(靈鳥)의 이름. 봉황(鳳凰)의 일종으로 털은 오채(五彩)를 갖추었고 소리는 오음(五音)에 맞는다 함.  

12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했다.  

13 춘추시대의 대도(大盜). 

14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유명한 보검(寶劍). 

15 두 마리 이상의 말이 마차를 끌 때, 옆에서 끌거나 따라 가는 말. 

16 정범진(丁範鎭) 외 옮김, 『司馬遷 史記』, 까치, 1994를 참조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2616)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전화 : 031-887-9301 (교무부)     팩스 : 031-887-9345
Copyright ⓒ 2016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