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강감찬(姜邯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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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6,695회 댓글0건본문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에 자리한 강감찬 동상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이자 문신이다. 시호(諡號)01는 인헌(仁憲)이고,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태어난 곳은 금주(衿州)로,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奉天洞)에 있는 낙성대(落星垈)이다. 이곳은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며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 : 정치에서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淸白吏)의 모범이었던 충신이자 영걸(英傑)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일생에 있어 수많은 공적(功績)들이 있지만, 단연 으뜸은 귀주대첩일 것이다.
▲ 안국사 내에 설치 된 귀주대첩 벽화
당시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성종 12년(993)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강동 6주)02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 6주는 거란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기에 현종 1년(1010) 거란의 성종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였다. 이때에 거란군은 개경(開京)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철수해 버렸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거란의 침략 기도를 간파하고 있던 고려는 상원수(上元帥)03 강감찬을 지휘관으로 하는 20만 명의 방어군을 편성하여 주력부대를 영주(지금의 평남 안주)와 그 이북 지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임무를 맡은 강감찬은 여기서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뛰어난 지휘력과 용병술(用兵術)을 발휘한다. 그것은 쇠가죽으로 물막이를 만들어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의주 위원면) 동쪽 강물을 막게 하고, 거란군이 접근할 때 이를 터뜨려 침략군에 물벼락을 가한 후 적의 혼란을 틈타 매복시킨 기병을 동원해 강력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밖의 기습에 당황한 거란은 처음 접전에서부터 막대한 손실을 당하자 산간 지대를 택해 고려군과 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개경을 향해 밀고 내려갔다.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은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면서 적을 피로하게 하고 약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후 거란군은 계속되는 전투에 사기가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추격하던 고려군은 귀주에서 전면포위 작전에 돌입하였다. 적군이 귀주에 이르자 이곳에 집결해 있던 고려군들은 일시에 공격을 가하였다.04 마침내 고려군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승리를 기록하였으니, 이 전투가 우리나라의 삼대대첩(三大大捷)의 하나인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이렇게 큰 전공(戰功)을 세운 강감찬에게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 : 지금의 의흥)까지 마중을 나왔고,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 장식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었을 정도로 극진한 영접(迎接)을 하였다.
한편 강감찬이 국난(國難) 속에서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용병술로 그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그의 신이(神異)한 행적들도 많이 나타나 있다.
대개 강감찬의 외모는 키가 작고 추남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는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앞날에 여자들로 인해 큰일을 그르칠까봐 마마신(神)을 직접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강감찬이 한양판관(漢陽判官)으로 새로이 부임했을 때, 부(府)의 경내(境內)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그 피해가 적지 않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아전(衙前)을 불러 “내일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가 말한 곳에 가보았더니, 과연 남루한 옷에다 흰 베로 만든 두건을 쓴 늙은 중이 새벽 서리를 무릅쓰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아전이 찾아온 이야기를 전하자 중은 곧바로 판관을 찾아뵙고 머리를 조아렸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너는 비록 금수(禽獸)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害)하느냐. 너에게 5일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하니,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전은 강감찬에게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물었다.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본 모양으로 화하라.”하니, 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오르니, 그 소리가 경외(境外)에까지 진동하였으며 아전은 넋을 잃고 땅에 엎드려 버렸다. 강감찬이 “그만두어라.”하니, 호랑이는 다시 늙은 중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이튿날 아전이 동쪽 교외에 나가 살펴보았는데, 늙은 호랑이가 앞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 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고 한다.05
한편 그는 문곡성(文曲星)06의 화신(化身)으로도 불려졌다. 어느 날 송(宋)나라의 감식안(鑑識眼 : 어떤 사물의 가치나 진위 따위를 구별하여 알아내는 눈)이 뛰어난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여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사신의 눈에는 딱 한 사람만이 뜨였다. 그는 맨 앞줄에 서 있는데, 허름한 옷에 키도 작고 얼굴이 못생겼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현듯 그쪽으로 가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몰랐는데, 여기 동방(東方) 고려(高麗)에 있으시군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다름 아닌 강감찬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특히 강감찬의 설화 중, 『典經』 권지 1장 23절에 나오는 벼락 칼에 대한 것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와서 그 사람을 치고 벌을 주는 것인데 옛적에는 벼락 치는 일이 흔했단다. 부모한테 잘못해도 벼락 맞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어도 벼락 맞고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밥풀 하나가 모르고 시궁창에 들어간다든가 콩나물 깍대기나 호박씨 같은 것을 버린다든가 하는 하찮은 짓에도 벼락을 맞게 되니 사람들이 맘 놓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런데 강감찬이란 옛날 훌륭한 분이 이렇게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해서 벼락 칼을 분질러 없애려고,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똥을 누었다. 그러니까 당장 하늘에서 벼락 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이란 분을 치려고 했다. 강감찬이란 분은 얼른 벼락 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 칼도 도막 칼이 되어서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한다.07
이 외에도 귀신을 물리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동물들을 퇴치하는 등 수많은 신이한 행적을 남겼다. 그리고 강감찬의 설화는 어느 곳에서나 구전될 만큼 백성들에게 있어 강감찬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친근한 존재였다. 또한 그가 관직에 머물던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功德)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고매(高邁)한 인품과 탁월한 자질을 인정받았던 구국(救國)의 영웅 강감찬은 향년(享年) 84(1032년)세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려 덕종(德宗)은 그에게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3일간 국정(國政)을 멈추게 하여 모든 대신들에게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로 그를 우대하며 슬퍼하였다고 전한다.
<대순회보>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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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제왕·경상(卿相)·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직접 추증(追贈)하던 호(號)
02 994년(고려 성종 13) 평북 해안지방에 설치한 것으로, 흥화(興化 : 현 의주)·용주(龍州 : 현 용천)·통주(通州 : 현 선천)·철주(鐵州 : 현 철산)·구주(龜州 : 현 구성)·곽주(郭州 : 현 곽산)를 가리킨다.
03 고려 시대의 무관직. 출정(出征)하는 군대의 모든 병권(兵權)을 통솔하는 장수(將帥)를 말함.
04 『우리 역사 이야기 1』, 돌베개, 1997, pp.128∼129
05 손병국, 『인문사회과학눈문집 제 26집 - ‘名將과 異人으로 추앙받은 삶(강감찬 설화의 전승 양상과 의미)’』, 광운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7, p.40
06 인간의 공명(功名) 이록(利祿)을 관장하는 성신(星神)이다. 탐랑성·거문성·녹존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과 함께 칠성(七星)을 이룬다. 이 칠성이 북방(北方)에 자리하여 두형(斗形)을 이루고 있으므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 한다.(『도교사상사전』,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4)
07 『한국구전설화 - 임석재전집 7』, 전라북도편, 평민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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