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공자(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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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5,809회 댓글0건본문
▲ 공자(孔子)
어느날 상제께서 형렬에게 대학에 있는 우경 一장을 외워주시니 그 글은 다음과 같도다.
盖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餘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舊傳 頗有錯簡 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有序次如左(교운 1장 56절)
공자(孔子: BC 551~BC 479)01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은(殷)왕조의 후손으로, 송나라 사마[司馬: 주나라 때 벼슬로 군정(軍政)을 맡아봄]였던 공보가(孔父嘉: 공자의 6대 조상)는 화독(華督)에게 살해되고, 그의 후손인 공방숙(孔防叔: 공자의 3대 조상)은 화씨의 핍박에 노나라로 도망가서 방대부(防大夫)로 있었다. 공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숙량흘은 말년에 처녀 안징재(顔徵在)와 결혼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드려 태어났다 해서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짓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숙량흘은 대부(大夫)란 칭호를 갖고 있었지만 생활은 평범하였다. 공자가 세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자, 평민 신분으로 몰락하면서 어머니는 공자와 같이 현재 공자의 공묘(孔廟)가 있는 곡부성 안의 궐리(闕里)로 갔다.
▲ 공자묘 (중국 산동 곡부 소재)
당시 춘추시대(BC 770년~BC 476년)는 주(周) 왕조가 분봉(分封)제도를 실시하여 각 제후들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줘 다스리게 하였다. 주(周) 초기 주공[周公: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은 무왕(武王)의 친동생으로 정치·군사·역사·문화에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전장(典章)제도와 예악(禮樂) 등 주 왕조의 기초를 만들었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백금(伯禽)은 노나라를 다스리면서 「주례(周禮)」02의 규정을 엄격히 하고, 원래의 풍속과 예악을 개혁하여 주례의 문화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공자가 태어나기 전 이미 토지 사유의 합법화와 노나라 대부 삼환(三桓: 孟孫氏, 叔孫氏, 季孫氏)이 노나라 군대를 삼군으로 편성03하고 있었기에 군주의 권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궁정 악사들도 흩어지면서 주례를 대표하는 문화 전통이 노나라에서도 몰락하고 있었다.
공자는 어릴 때 일반 아이들과 달리 제기를 진열해놓고 제(祭)를 지내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점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가문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귀족의 정치 규범과 주례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 “내 나이 15세, 학문에 뜻을 두었다.”라고 하였듯이 이때부터 자신의 기량 쌓기와 주례의 문화 전통을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17세 되던 해,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노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계손씨(季孫氏)가 명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공자는 상복을 입은 채로 갔으나, 그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공자의 형색(形色)을 보고 문전박대를 하였다. 이후로 공자는 공부에만 매진하게 되었다.
공자는 배움에 있어서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기회만 있으면 주공의 태묘(太廟)를 찾아 제사 의식에 대해 꼼꼼히 묻기도 하였으며, 가야금을 배움에 있어서도 곡조만 배우지 않고, 작자의 풍모(風貌)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그리고 몇 년을 공부에 열중하여 20세경에 ‘육예(六藝)’04에 정통하면서 그의 명성은 밖으로 전해졌다. 공자는 19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축하로 노나라 소공(昭公)이 보내준 잉어 한 마리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리(鯉)라 지었고, 생계를 위해 하급 관직인 승전(乘田: 가축 관리)과 위리(委吏: 창고의 물품과 장부를 관리)에 있으면서 책임을 다 하였다.
30세경에 공자는 ‘육예(六藝)’에 초월하고, ‘육경(六經: 『詩經』, 『書經』, 『禮記』, 『樂經』, 『易經』, 『春秋』)’에 관통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성에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집 앞뜰에 강단을 세워 주변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고, 이때부터 행단강학(杏講學)을 시작하였다.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정치에 대해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효(孝)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이치를 응용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어찌 반드시 관리 노릇을 해야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교육을 정치에 참여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여겼다.
공자의 교육 목표는 수세기 동안 정치 안정과 사회질서에 기여해 온 주례의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일으켜 바르지 못한 전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최초로 강학을 시작해, 귀족관료들이 독점했던 교육을 신분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사학(私學)의 기풍을 만들어 원래의 전통을 깨뜨렸다. 공자의 교육은 몇 년도 안 되어 성황을 이루어 귀족들은 물론 나라 밖에서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는 학문, 인격 모든 면에서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음으로써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이 공자의 사상을 전수받아 전파함으로써 훗날 유가학파(儒家學派)가 형성되었다.
한편 공자는 노나라에 주나라의 문화전통을 부흥시키려고 정치 참여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하고 있었던 노나라 소공이 삼환과의 충돌로 제나라로 쫓겨나고, 계손씨의 후손인 계평자(季平子)가 정권을 잡자,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자신의 이상을 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전통을 간소화하여 그것을 준수하고 있었던 제(齊)나라를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첫 번째 지역으로 생각하고, 제나라 경공(景公)의 대신인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여기 있으면서 소악(韶樂: 순임금의 음악)을 듣고 3개월간 고기 맛을 알지 못할 정도로 음악에 감동하기도 하였다.
『논어』 「안연」편에 한번은 제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경공은 당시 노나라와 제나라의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었기에 크게 찬동하였고, 공자의 조언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나라의 집정대신인 안영(晏)의 반대로 경공은 공자를 임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37세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와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다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공자는 주대와 같은 이상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예기』 「악기」편에서 “악(樂)은 호오(好惡)를 같이하도록 하는 것이고, 예(禮)는 귀천(貴賤)을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다. 호오가 같을 때는 서로 친하고 귀천의 구별이 있을 때는 서로 공경한다. …(중략) 예의(禮義)가 확립되면 귀천의 등급이 존재하고 악문(樂文)이 같을 때는 상하가 화목하게 된다.”라고 하였듯이, 예악(禮樂)의 본질을 바로 잡아 등급의 차별과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화합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는 현실사회에서는 불가능했기에 『논어』 「팔일」편에서 공자는 “사람이 인(仁)하지 않으면 예의가 바른들 무엇하며, 악(樂)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듯이, 인(仁)05을 바탕으로 하여 예악의 본질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은 그 역할을 하였으나, 격변하는 사회조류에 현실의 정치는 공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51세에 공자는 노 정공(定公)의 요청에 실질적인 정치 참여의 기회가 주어져 노나라 중도(中都: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재상이 된지 1년 만에 주대의 사회처럼 안정이 되어 갔다. 그러자 공자의 위상이 더 확고해 지면서 사공(司空)으로 승진하여 건설공사를 관리하게 되었고, 또 얼마 있다가 사법을 관장하는 사구(司寇)로 승진하게 되었다. 공자는 직책이 사구였음에도 도덕에 어긋나는 사람과 일이 있으면 사회에 질책을 받게 함으로써 법치(法治)보다는 인치(人治)를 더 중시하는 정치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공자 나이 52세 때, 노 소공과 제 경공이 협곡(夾谷: 지금의 산동성 래무 동쪽)에서 회담을 하게 되었는데, 공자는 예(禮)로써 그들의 음모를 꺾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하여 자신의 위상을 더 높였다. 이후 공자의 명성은 더 높아지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제나라는 공자를 없애기 위해 음모를 꾸며 노 정공과 계환자를 화해시키고 사신을 시켜 가무(歌舞)들과 화려한 마차를 보냈다. 노 정공과 계환자는 여기에 정신이 팔려 정사(政事)도 돌보지 않았고, 공자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주지 않자 공자는 사임을 했다. 이때 나이 55세,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펴기 위해 제자들과 14년간 철환천하(轍環天下)06하였다.
이미 공자의 명성은 높았기에 공자는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난세(亂世)에 사람들은 공자의 사상에 찬동은 하면서도 공자의 이상을 위해 나서는 임금은 없었다. 한편 공자의 일행은 가는 도중에 위나라 광(匡)지역에서 며칠간 잡혀 위협을 받았다. 이때 공자는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 문왕이 돌아가신 뒤, 주대의 문화 전통이 모두 우리들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느냐? 하늘의 뜻이 이런 문화 전통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면, 저들이 함부로 우리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다.”07라고 하여 제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공자의 일행은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갈 때도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퇴(桓)가 이끌던 무리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진나라에서 초나라로 갈 때도 오나라와 초나라의 병사들에게 잡혀 고생과 굶주림으로 힘든 여정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공자는 태연하게 평소와 똑같이 강학을 하였고, 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68세에 공자는 방랑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현실에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고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위나라를 떠나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노나라 집정자인 계강자(季康子)는 공자를 환대하였고, ‘국노(國老)’로 대우해주었다. 애공(哀公)과 계강자는 공자에게 국정의 자문도 하였으나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 곁을 떠나 계강자 측에 섰던 염구와 몇 몇 제자들도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신봉하지 않았다. 수십여 년간 힘겹게 지내온 공자에게 현실사회와 제자들과의 단절은 고독감을 갖게 하였다. 또 공자의 부인이 죽은 이후, 아들 리(鯉)의 죽음과 연이은 제자들의 죽음은 공자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문화 교육사업에 쏟아 부었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는 약 3천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한편 많은 제자들은 노나라는 물론 여러 나라에서 큰 활약을 하여 공자의 명성을 더 높였다. 그리고 공자는 수십여 년간의 교육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육경(六經)’을 정리하고 편찬하였다.
71세 때, 공자는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麒麟)08이 잡혔다는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春秋』에 그해 첫 번째 사건으로 “서쪽에 기린을 사냥하다(西狩獲麟).”라고 기록하고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는 죽기 얼마 전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중략)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라고 하여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이상과 조상을 잊지 않으며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죽은 뒤 그의 명성과 지위는 서서히 높아져 그를 위대한 성인(聖人)이라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교육방법09은 현대 교육학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고, ‘육경(六經)’의 정리와 편찬은 고대 중국문화를 보전하고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순회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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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글은 천웨이핑 저, 신창호 옮김, 『공자평전』, 미다북스, 2002. 채인후 저, 천병돈 옮김, 『공자의 철학』, 예문서원, 2000. 『사기』 「공자세가」. 『논어』. 『춘추좌전』. 『예기』 등을 참고하여 서술한 것이다.
02 유가의 9경·12경·13경에 속하는 고대의 예법에 관한 3권의 책 가운데 하나. 예부터 주공(周公:BC 12세기)의 저술로 간주되어왔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 책이 BC 300년경에 무명의 이상주의자가 휘찬(彙撰)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례」는 천관(天官)에서 통치 일반을, 지관(地官)에서 교육을, 춘관(春官)에서 사회적·종교적 제도를, 하관(夏官)에서 군사를, 추관(秋官)에서 법무를, 동관(冬官)에서 인구·영토·농업을 다루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03 「周禮」에 의하면 천하의 토지는 주나라 천자의 것이었고, 삼군의 편성은 군신등급의 명분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04 중국 주대(周代)에 행해지던 교육과목.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6종류의 기술이다. 예는 예용(禮容: 예절의 바른 태도),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御)는 말타기, 서는 서예, 수는 수학(數學)이다. 육예는 육경(六經)을 가리키기도 한다.
05 『논어』 「안연」 1장, 「옹야」 28장 “자기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 무릇 인이란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세워주고, 내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는 것이다.”
06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공자가 교화를 위하여 중국 천하를 돌아다닌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전경』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道傳於夜天開於子 轍環天下虛靈”(공사 3장 39절).
07 『논어』 「자한」 5장.
08 중국 신화에 나오는 외뿔 짐승. 이 짐승의 출현은 매우 드물며 흔히 현인이나 뛰어난 성군(聖君)이 곧 태어나거나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09 토론식 진행 방법을 통해 흥미를 유발시켜 개인의 소질에 맞추어 가르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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