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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광서제(光緖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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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6,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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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제(光緖帝)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 (중략) …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공사 3장 22절)

 

  광서제(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는 청조의 11대 황제로서 이름은 대첨(戴)이고 묘호는 덕종(德宗)이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9대 황제인 함풍제의 황후인 서태후(西太后:1835~1908)가 조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소년시절에는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태후는 쇠퇴해가는 청제국의 체제를 근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젊은 황제의 노력을 저지했다. 광서제는 황제의 아들이나 동생이 아닌 사람 중에서 최초로 황제가 된 인물이다. 사촌형[동치제(同治帝)]의 죽음으로 겨우 4살에 황제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광서제 나이 16세가 되어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움켜쥐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광서제는 17세가 되었다. 황실의 법률에서는 수렴청정을 받는 황제가 정식 황후를 맞이하면 친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황제는 16세쯤에 황후를 정하고 그 이듬해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광서제가 17세임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황후 책봉을 계속 미뤄왔는데 이제 더 이상 지연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국의 훌륭한 가문의 만주 여성들에게 황후 간택령을 내리게 된다. 다음 해 황후 간택에서도 동치제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서태후가 추천한 계상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게 되었다.  

  19세 때 광서제의 대혼의 의식이 거행되고 황제 친정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서태후는 북경 서쪽 교외에 있는 이화원(和園)에 은거했으나 첩자들을 궁정 안에 심어놓고, 황제의 동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살피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1894년에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였고, 이에 대패한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대만 할양, 배상금 2억 냥 지불, 최혜국대우 등이 약정되어 있는 시모노세키조약(1895)을 체결하게 된다. 청일전쟁 후 청나라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자신들보다 후진국이라고 여겼던 일본에게 참패함으로써 그 위상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는 변법유신파(變法維新派)라고 불리는 새로운 그룹의 형성을 재촉했으며, 이들 애국지사들은 청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의 추방이라고 여기고 광서제와 협력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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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제가 구금되었던 곳[영대(瀛臺) 전경] 

 

  이 변법유신파의 중심적 지도자는 강유위(康有爲)로 1888년 그는 북경에서 순천향시(順天鄕試)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백성’으로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변법유신을 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도록 말하였다. 광서제는 강유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하는 한편 명정국시(明定國是)의 조령을 발표하고 변법을 시행했다. 팔고문(八股文) 철폐와 국립대학(경사대학당) 설립, 지방 서원을 학당으로 개편, 농업과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노광총국(路鑛總局)·상무국(商務局)의 설립 등이 주된 내용이었으며,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담사동(譚嗣同)을 비롯한 젊은 개혁가들을 받아들였다.  

  변법자강운동01으로 고무된 광서제는 서태후 및 몇몇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신변법을 추진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것으로 황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고자 하였다. 1898년 광서제는 27세가 되자 마침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100일 유신(維新)’으로도 알려져 있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실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하고 광범위한 개혁의 칙령들을 반포했다.  

  그리고 광서제는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진짜 황제로써 군림할 수 있었다. 개혁이 실행되는 동안 광서제는 처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북경성을 시찰하여 고아와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국민의 생활에 관련된 일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열정적으로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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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제가 구금되었던 곳[옥란당(玉瀾堂) 내부] 

 

  자금성 안에서 광서제와 유신파가 새로운 청나라를 만드는 일을 고심하고 있을 때, 이화원 안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봉건 보수 세력은 반격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변법 유신파의 담사동은 이러한 보수파의 음모를 감지하고 군사를 총지휘하는 원세개(袁世凱)에게 서태후가 있는 이화원을 포위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원세개는 이들을 배신하고 서태후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태후는 광서제를 중남해(中南海)에 구금시키고 유신인사들을 체포, 살해하도록 명령하였다. 가까스로 일본으로 망명한 강유위와 양계초(梁啓超)를 제외한 담사동 등 6명은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이리하여 무술변법운동은 103일 만에 끝나게 된다. 한편, 서태후는 광서제를 겨울에는 영대(瀛臺)에,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란당(玉瀾堂)에 구금시켰고 다시 수렴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서양열강의 눈치를 보느라 광서제를 폐위하지 못했다.  

  1900년 일어난 의화단(義和團)02운동으로 8개국 연합군과의 무모한 전쟁이 시작되고, 서태후는 광서제 등을 이끌고 서안으로 피신하였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의 비참한 패배로 서양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국은 서양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1908년 11월 14일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38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청나라 황제들의 순서와 재위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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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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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변법자강운동의 주된 내용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제도를 개선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02 19세기 말 청나라 말기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청나라의 전복’과 ‘외세의 배격’을 목표로 무장 봉기를 일으킨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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