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천하(天下)를 평정한 당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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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7,137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 (중략) … 종도들에게 이십사절을 읽히고 또 말씀하시니라.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이십사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예시 66절)
당(唐) 이전에 수(隋, 581∼618)나라는 4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오던 중국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통일왕조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 재위604∼618) 때에 이르면 만리장성을 재축조하고 동도(東都: 낙양)와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는 한편, 수도 장안(長安)에서 강도(江都: 양주)에 이르는 주변에 40여 개의 이궁(離宮: 임금이 나들이 할 때 머물던 별궁)까지 지었다. 이처럼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들어가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고,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중국대륙은 반세기를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태원(太原) 유수(留守: 총군사령관)로 있던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둘째 아들인 이세민(李世民, 598~649)의 주장에 따라 거병(擧兵)하여 당나라 300년의 천하를 열었다. 그 대업(大業)을 이루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太宗) 이세민이었다.
그의 집안은 서위(西魏)에서 북주(北周), 북주에서 다시 수(隋)로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시종일관 통치 그룹을 형성해 온 군벌 귀족이었고 수나라 황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그의 아버지 이연에게 수 문제(文帝)는 이모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당 태종은 아버지와 어머니 두씨(竇氏)사이에서 사남(四男)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용 두 마리가 문 밖에서 놀다가 3일 만에 사라졌고, 태종이 네 살이던 해에 관상을 잘 본다는 사람이 찾아와 “나이 이십이 되면 반드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濟世安民]”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세민(世民)’이라 지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이세민은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집안의 후예답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등 무예를 익히고 병서를 탐독하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이연이 부임하는 임지인 농주ㆍ기주ㆍ형양 등지에 살면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다. 이때의 생생한 경험들은 훗날 그가 명군(明君)이 되는 데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16세 되던 해에는 군문(軍門)에 들어갔고, 18세에는 수 양제를 구원하기 위한 근왕군에 참가했다가 뛰어난 계책을 제시하며 전략가로서 그의 천부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616년에 이연은 양제의 신임을 얻어 군사적 요충지인 태원유수로 부임한다. 그의 주된 임무는 돌궐의 침입을 막고 그 일대에서 준동하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지배계층의 이반(離叛)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직시한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에게 빠른 시일 내에 거병(擧兵)할 것을 촉구하자, 마침내 그해 5월 이연 부자(父子)는 “천하를 안정시키겠노라!”는 기치를 내걸고 태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태원에서 이연 부자가 거병하자 수의 가혹한 정치에 시달리던 백성들과 지사(志士)들이 이에 동참하였고, 그들이 관중(關中)01에 나아갔을 때는 투항하는 군ㆍ현들도 많았다. 이세민의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를 비롯해 두여회(杜如晦)와 함께 당(唐) 대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방현령(房玄齡)이 이세민의 군문을 찾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당시 이세민은 약관의 20세 청년에 불과했지만 형제들과 아버지 이연을 도와 수군(隋軍)의 저항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민심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탁월한 계책을 써서 군의 전략수립에 기여했는데, 이로 인해 이연은 천혜의 요충지인 관중과 더불어 수도 장안(長安)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수 양제는 전란을 외면한 채 강도(江都)로 피난을 가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친위대 장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수나라는 불과 38년 만에 무너지는 단명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 양제의 피살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이연은 공제(恭帝)를 옹립했다가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무덕 원년(618년)에 제위에 올라 당(唐) 왕조를 창업(創業)하니 그가 바로 고조(高祖)이다. 당 고조 이연은 새로이 율령을 제정케 하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중요 인사(人事)를 단행한 후, 곧바로 맏이인 건성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이원길을 제왕(齊王)에 봉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웅들과 쟁패를 벌이는 통일전쟁에 돌입한다. 이때 이세민은 관중과 태원을 위협하는 세력인 설인고와 유무주 두 강적을 무찌르고 당의 근거지를 안정시켰다. 무덕 3년(620년)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동도(東都)를 장악한 왕세충을 공격했다가 고전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그는 수하들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고 탁월한 계책을 써서 대륙의 동쪽을 진동하던 왕세충, 두건덕 두 일파를 일거에 격파시켰다. 이러한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아 고조로부터 ‘천책상장(天策上將: 하늘이 내린 장수)’이란 전무후무한 벼슬을 하사받는다. 그 후에도 이세민은 유흑달의 반란에 고전하던 당 조정의 요청에 따라 출정하여 이를 진압함으로써, 당 왕조가 7년 만에 전국통일이란 과업을 달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무문(玄武門)의 변과 정관지치(貞觀之治)
이연 부자에 대항하던 세력들이 모두 평정되면서 당나라는 이제 수성(守成)의 시기로 접어든다. 창업과정에서 동지였던 이들이 수성의 시기에 접어들면 권력을 둘러싼 혈투를 벌이는 모습은 어느 왕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당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태자 이건성과 둘째 이세민 간에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벌어진다. 태자 이건성은 아버지와 함께 장안을 지키면서 군사일과 국무를 처리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이세민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세민은 남북 각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당의 통일전쟁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만큼 그의 군사 및 정치 수행능력에 대한 명성과 인망은 매우 높았다. 그래서 그의 휘하에는 뛰어난 문신과 무장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진왕부의 군사들 또한 강군이었다.
그 세력에 위협을 느낀 건성은 동생 원길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는 한편, 이세민의 장수들을 지방으로 파견하고 수뇌들을 격리시켜 그를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 간의 대립은 한층 격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차에 태자와 원길은 변방을 침입한 돌궐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하는 송별연에서 이세민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세민 측이 매수한 관원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이세민은 태자와 원길을 현무문으로 유인해 휘하의 장졸들과 함께 그들을 제거하니 이른바 “현무문의 변”이라 불리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초래되고 만 것이다.
현무문의 변란이 끝난 지 사흘 후 고조는 이 일을 수습하고자 이세민을 태자로 책봉하고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그에게 맡겼다. 이세민은 곧 중앙정부조직을 개편하여 방현령을 중서령(中書令)에, 고사렴(高士廉)을 시중(侍中)에, 장손무기와 두여회를 이부상서(吏部尙書)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각각 임명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인 무덕 9년(626년) 8월에 이세민은 고조로부터 양위를 받아 29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곧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02인 것이다. 황제가 된 이세민은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정하고 정관 23년(649년)에 사망하기까지 24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게 된다. 그가 재위하는 기간 동안 국가는 부강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편안해져서 태평성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 기간을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부르고 있다.
태종이 등극할 당시만 해도 당나라는 정치적 안정은 회복되었으나 국가경제는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백성은 쇠잔하여 인구가 겨우 8백만에 불과해, 수 대의 10분의 2도 되지 못하였고 재해까지 빈발하여 민중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따라서 당 태종에게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경제를 부흥시켜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수 왕조의 멸망을 거울삼아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최대한 절제하고 백성들의 병역과 부역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집권 초기 대외 전쟁을 삼가하고 궁전 수축 및 토목공사를 최대한 억제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또한 태종은 수 양제가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충신들을 멀리하여 국난을 초래한 점에 착안하여, 아랫사람들에게 힘써 간언(諫言)을 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였다. 이에 힘입어 정관 연간은 간쟁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났고 신료들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올바른 정치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당 태종이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제왕의 본보기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사후 오긍(吳兢)이란 사람은 태종과 그의 신하들이 정치에 관해 문답한 내용을 항목별로 분류해 『정관정요(貞觀政要)』란 책을 지었는데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왕학의 교과서로 불리며 애독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중 당 태종에게 간언을 가장 잘했던 대표적인 신하가 바로 위징(魏徵)이다.03 그는 본래 이세민의 정적이었던 태자 건성의 신하였으나 태종에 의해 간의대부(諫議大夫)04로 발탁된 후 측근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도리에 대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 당 태종은 그의 의견을 잘 받아들여 많은 잘못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그의 책략을 써서 나라와 백성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했기에 정관 17년(643년) 위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태종은 그를 위해 직접 비문을 지었고, 자신의 잘못을 비추어주는 소중한 거울 하나를 잃었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당 태종이 정관 연간의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뛰어난 인품과 재능 덕이기도 하지만, 창업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수성의 과정에서도 부단히 인재를 발굴하여 그들을 믿고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특히 창업과정에서 위징처럼 태종을 목숨 바쳐 보좌한 공신(功臣)들에 대해 그는, “그 옛날 같은 배를 타고 함께 창업한 좌명공신(佐命功臣)05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고 한 약속대로 그들의 지위와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그리고 정관 17년에는 24명의 공신 얼굴을 능연각(凌煙閣)에 그려 이들의 공업을 영원히 기리게 했는데, 이 시기 최상의 영화를 누렸던 분들이 바로 24절후 신명이었다.
대제국의 건설과 고구려 친정(親征)의 실패
태종은 제위에 오름과 동시에 빠르게 경제를 회복시키고 전력의 증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정관 3년에 이르면 경제가 몰라보게 회복되고 전력도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에 힘입어 태종은 이정(李靖)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의 정예군을 투입해 후방의 강적인 돌궐을 완전히 평정시킨다. 이후에도 태종은 토욕혼을 비롯하여 사방의 이민족들을 제압하고 여러 부족의 추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 하늘에서 내려온 황제)’이란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정관 14년에 당은 ‘동의 바다와 서쪽 끝 언기(焉耆), 남의 임읍(林邑: 월남)과 북의 대막(大漠: 고비사막)’을 경계로 동서 9천 5백 리, 남북 1만 1천 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대제국건설에 자신감을 얻은 태종은 동북방의 강자였던 고구려 태자의 입조(入朝)를 요청하는 한편, 직방낭중(職方郎中: 지도를 관리하는 직책)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의 허실과 지리를 정탐하게 한다. 그 후 대당(對唐) 강경책을 주장하던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신라의 원조요청이 계속되자, 이를 구실로 당 태종은 정관 18년(644년)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천부적 전략가였던 그가 휘하의 명장(名將)들과 함께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당의 30만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개전(開戰) 초기 고구려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하던 당군(唐軍)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참담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친정의 실패 후 태종은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라고 하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정관 19년(645년)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당 태종은 만리장성의 끝자락인 임유관에 이르러서야 태자를 만나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이듬해 3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심신(心身)이 극도로 쇠약해져 한동안 국정을 태자에게 위임하게 된다. 그리고 3년 뒤인 정관 23년(649년), 한 시대를 풍미한 일세의 영웅이며 제왕의 모범이었던 당 태종은 원정 때 얻은 등창ㆍ풍질 등의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그는 태자에게 “요동(고구려) 공격을 그만 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장손 황후가 묻힌 소릉(昭陵)06에 안장되었다.
<대순회보> 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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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주위를 둘러싼 험한 자연 형세와 기름진 평야를 갖고 있어 예부터 ‘하늘의 곳간’이라 불렸던 곳으로, 그 중심에는 천수 백여 년간 주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가 번갈아 도읍했던 장안(長安: 서안)이 있다.(황충호, 『제왕 중의 제왕, 당태종 이세민』, 아이필드, 2008, pp.95~96)
02 ‘태종’이란 묘호(廟號)는 사후에 붙여진 명칭인데 통상적으로 제2대 황제나 왕에게 붙여지는 것이다.
03 위징(魏徵)은 밤이면 옥경에 올라가 상제를 섬기고 낮이면 당 태종(唐太宗)을 섬겼다 하거니와 나는 사람의 마음을 뺐다 넣었다 하리라.(교법 3장 33절)
04 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간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05 하늘의 명령을 돕는 공신이란 뜻으로, 전(轉)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고 임금이 될 사람을 보좌한 공신을 뜻함.
06 소릉은 장안 부근 예천현 서북쪽에 있는 구종산에 조성되었다. 당 대에 산을 능(陵)으로 한 것은 소릉이 시초이며 당조(唐朝)의 산릉은 모두 18개가 있었다. 소릉에는 장손 황후를 비롯하여 후비들과 황족들, 그리고 공신들의 묘가 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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