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박영효(朴泳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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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6 조회5,662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최익현과 박영효(朴泳孝)의 원을 풀어 주신다고 하시면서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일월 최 익현 천포 천포 천천포 만포 만포 만만포 창생 박영효(千歲千歲千千歲 萬歲萬歲萬萬歲 日月崔益鉉 千胞千胞千千胞 萬胞萬胞萬萬胞 蒼生朴泳孝”라 쓰고 불사르셨도다. (공사 2장 22절)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자(字)는 자순(子純), 호(號)는 현현거사(玄玄居士)ㆍ춘고(春皐)이다.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진사(進士)출신인 박원양(朴元陽)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활달한 편이었다. 그의 집안은 출생 당시 짚신을 팔고 다닐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러나 1872년 11세에 일족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01의 추천으로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철종의 부마가 되었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지만 그는 조선의 부마로서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진다. 거처는 한성으로 이주하여 진골(현 서울 운니동)에서 살게 되었다.
박영효는 1875년부터 형 영교(泳敎)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때 역관 오경석, 의관 유대치, 승려 이동인 등의 중인 출신의 초기 개화 사상가들과도 교유하며 지냈다.
이때의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의 발전 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에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는 정치세력인 개화파가 결집되었다. 1882년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일부가 임오군란02의 진압을 위하여 청군을 대동하고 입국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김홍집(金弘集)ㆍ어윤중(魚允中)ㆍ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족 정권과의 타협 아래 청과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하면서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박영효(朴泳孝)ㆍ김옥균(金玉均)이 중심인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뿐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결국 민씨 일족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박영효는 왜 일본을 선택한 것일까? 당시 일본의 메이지유신(1853∼1877) 때는 일본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변모한 일대 혁명기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ㆍ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1854년 미ㆍ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ㆍ러시아ㆍ네덜란드ㆍ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무역을 시작하였다. 주요 교역 상대는 영국으로 거래 총액의 80%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박영효는 일본의 서구화에 주목한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과 함께 일본은 물론 영국과의 관계도 넓혀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적 입지가 제한되고 국내의 반대 여론, 그리고 영국 등 서구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개화파와 일본, 영국간의 인적 교류를 형성하는 데에만 그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 문화의 교류 경유지로써 일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13일 일본에 사죄하기 위한 수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그에게는 수신사로 가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고, 일본으로부터 신문물과 신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관을 교섭하고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 교육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메이지유신의 성과로 일본이 서구화된 것을 보고 국내에서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1883년 1월에 귀국하여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없는 동안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83년 4월엔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발간사업, 치도사업(治道事業) 등의 개혁에도 민씨 척족의 시기와 의심을 사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민씨 일족 정권과 청군을 타도하여 완전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본을 이용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이 내세운 개혁안은 문벌타파, 인민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의 개정, 청에 조공하는 허례행사 폐지,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 등 14개조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배신과 민중의 지지 결여, 민씨 일족 정권이 끌어들인 청군 때문에 3일만에 실패하게 되었다. 비록 정변은 실패했지만 갑신정변이 추구했던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던 시도는 향후 국권을 회복하고 민주국가를 형성하는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정부의 태도가 냉담해져 1885년 동지들과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한다. 그는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부터 박영효의 개화사상은 후쿠자와의 탈아론(脫亞論)03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망명생활을 하며 더욱 개혁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1888년 2월 24일 고종에게 개혁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은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교육개혁안,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6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박영효는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그해 8월 23일에 귀국하게 된다. 제1차 갑오개혁은 1894년 7월에 김홍집의 주도로 정치 ·군사에 관한 사무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김홍집은 의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왕실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등 새로운 관리 임용법을 마련하였다.
박영효는 1895년 삼국간섭(러ㆍ불ㆍ독)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고 군국기무처도 해체시킨다. 결국 박영효는 1894년 12월에 ‘홍범14조’를 발표하고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 제도의 도입, 지방 제도의 개편, 교육 개혁, 새로운 경찰ㆍ군사제도의 확립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박영효는 왕후 시해 혐의를 받아 7월에 다시 2차 망명을 했다.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회의에서 박영효를 다시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으나 반대파가 ‘박영효 대통령설’04을 유포시켜 그의 정계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마저 해산시켰다. 이때 고종은 망명자의 죄는 영원히 사면치 않겠다는 조칙까지 발표하였다.
한편 박영효는 1900년부터 군용자금을 모집하며 혁명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교육 개혁을 중요시 여겼다. 교육기관인 조일신숙(朝日新塾, 1901∼1902)을 설립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젊은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 국내외의 재정문제 등 국민들의 협조가 미미하여 그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일본의 세력이 커진 상황에서 이토오 통감이 1906년 10월 11일에 고종을 알현하여 박영효의 소환을 주청하였다. 고종은 박영효의 귀국을 처음에는 환영했으나 후의 정세변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박영효의 귀국을 막는다. 그러나 박영효는 1907년 6월 8일에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고, 6월 13일에 고종의 특사조칙을 받게 된다.
박영효는 7월에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는 헤이그 특사 사건 후에 벌어진 이토오 통감과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고종 양위(讓位)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는 억울하게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함께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을 받게 된다. 결국 제주도에 1년 동안 유배를 간 사이 1910년 한일합병을 맞게 된다.
일본은 ‘무단통치’라는 강압적 식민지배 정책을 전개하는 동시에, 식민지 사회의 ‘안정화’를 위해 식민지조선 사회의 모범이 될 최상위 계층 조선인들이 필요했다. 특히 개화파의 영수(領袖)이자 조선의 부마였던 박영효는 그들에겐 중요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이었던 박영효는 사재를 털어 자신의 예전 집을 개조하여 자혜병원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자선사업을 하였다. 1918년 조선은행 이사로 역임되었으며,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ㆍ동광회(同光會)ㆍ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ㆍ민우회(民友會) 등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고,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 참고문헌
ㆍ유병용, 『박영효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4.
ㆍ이이화, 『바람 앞에 절명시를 쓰노라』, 김영사, 2008.
ㆍ수요역사연구회,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두리미디어, 2005.
ㆍ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돌베개, 2005.
ㆍ신동준, 『개화파 열전』, 푸른역사, 2009.
<대순회보> 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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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1861년 조선정부에서 중국에 파견한 위문사절단(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에 대한 위문)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서양열강의 침략상을 목격한 뒤 큰 충격을 받고 신서들을 읽으며 스스로 개화사상을 섭렵했다. 박영효의 개화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02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03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내용에는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웃의 두 나라(조선과 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04 박영효가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서 고종을 퇴위시키려고 한다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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