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순(舜)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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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4 조회7,709회 댓글0건본문
순임금은 전욱(顓頊)01의 6대손으로 성이 ‘우(虞)’ 또는 ‘유우(有虞)’씨다. 그래서 흔히 ‘우순(虞舜)’이라 부르며, 이름은 ‘중화(重華)’다.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어[중동(重瞳)] 중화라 했다고 한다. 그는 기주(冀州)02 사람으로 부친은 고수(瞽叟)다. 고수는 맹인이었다(고수는 맹인이 아니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란 의미에서 고수라 불렸다는 속설도 있다). 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다. 고수는 무도했고 어머니는 험담을 잘했으며 상은 교만했다. 가족이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순은 항상 공손하게 자신의 도리를 잃지 않고 효도를 다하였다.
순은 나이 스물에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고, 서른에 사악(四岳)03의 추천을 받아 요(堯)임금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된다. 요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홉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받들게 했다. 순은 가정생활이 근엄하였으므로 두 딸은 고귀한 신분임에도 순의 가족에게 오만하게 대하지 않고 부녀자의 도리를 다했다. 아홉 아들 역시 더욱 성실해졌다.
그가 역산(歷山)04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곳 주민은 모두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고, 뇌택(雷澤)05에서 물고기를 잡자 순의 덕에 감화되어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 잡히는 장소를 양보하게 되었다. 또 하빈(河濱)06에서 그릇을 구웠는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그릇은 하나도 조악한 것이 없게 되었다. 순이 사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1년이 지나자 촌락이 이루어졌고, 2년이 지나자 읍이 되었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에 요는 순에게 옷과 거문고를 하사하였고, 창고를 지어주며 소와 양을 상으로 주었다.
한편, 고수는 여전히 순을 죽이려고 했다. 하루는 순에게 창고에 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고 아래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워버렸다. 순은 양손에 삿갓을 들고 이것을 이용하여 뛰어내려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에 또 고수는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이 우물을 파들어 가자 고수는 상과 함께 흙을 퍼부어 우물을 메워버렸다. 하지만, 순은 몰래 옆으로 구멍을 파놓아 이것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도 순은 더욱 정중하게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을 사랑해주었다.
순은 이처럼 신중하고 어질며 지혜로웠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진실하여 숨은 덕이 조정에까지 들리니, 이에 제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삼가 오전(五典)07을 아름답게 하라 하니 오전이 잘 지켜졌고, 백규(百揆)08의 직책을 맡기니 그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사문(四門)에서 제후들을 영접하게 하니 사문에 화기가 넘쳐흘렀고, 대록(大麓: 큰 산의 기슭)에 들여놓았으나 매서운 바람과 뇌성을 동반한 폭우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
이에 요는 순이 천하를 물려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임금이 말했다. “그대 순에게 이르노라! 일을 묻고 말하는 것을 살펴 그대의 언행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아온 지 3년이 되었노라. 이제 그대가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 순은 겸양하여 이를 사양하고 제위를 잇지 않았다. 요는 이제는 늙어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여겨 순에게 천하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사방을 다니며 시찰하였다.
순이 천하의 일을 맡아 행할 때 법을 정해 일정한 형벌을 내리고, 잔혹한 오형(五刑)09을 유배형으로 대신하여 형벌을 너그럽게 했다. 채찍으로써 관(官)에서 내리는 형벌을 삼고, 종아리 치는 것을 교화의 형벌로 삼았으며, 벌금으로 몸에 가하는 체형(體刑)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과실과 재난 때문에 지은 죄는 용서했으나, 지은 죄를 끝까지 뉘우치지 않을 때는 사형에 처했다. 형벌은 오직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담당 관리들에게 삼가고 또 삼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공[共工: 백공(百工)을 관장하던 인물]을 유주(幽州)10로 유배 보내고, 환도(驩兜: 요임금의 신하)를 숭산(崇山)11에 유배 보냈다. 삼묘(三苗)12를 삼위산(三危山)13 쪽으로 축출하고, 곤(鯤)을 우산(羽山)14에서 참하였다(곤은 우임금의 아버지로 치수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죽였다). 이처럼 네 죄인을 단죄하자 천하 사람이 모두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순이 등용되어서 일한 지 20년이 되자 요는 그에게 섭정하도록 하였다. 순이 섭정한 지 8년 만에 요임금이 붕어하였다.(순의 나이 58세) 요의 삼년상을 마치자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양보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순에게 귀의하였다.(61세에 천자의 제위에 오름) 순은 22명의 대신(大臣)에게 각자 직분을 맡겨 3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공적을 살폈고, 세 번 살핀 결과에 따라 강등시키거나 승진시키니 백관(百官)들의 공적이 하나같이 올라갔다.
대신 중에 특히, 고요(臯陶)는 대리(大理)15가 되어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자 백성이 각기 심복하고 실정(實情)을 사실대로 토로하게 되었다. 백이(伯夷)가 예(禮)를 주관하자 위아래가 모두 겸양해졌고, 수(垂)가 공사(工師)16가 되니 모든 공인(工人)들이 직분에 충실하여 좋은 물건을 만들어 냈다. 익(益)이 산림과 천택(川澤)을 관리하자 산과 연못·하천이 개발되었고, 기(棄)가 농사를 관장하자 여러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났다. 설(契)이 사도(司徒)17를 주관하니 백성이 서로 화목하였고, 용(龍)이 빈객(賓客) 접대를 주관하니 멀리서도 사람들이 이르렀다. 12주(州)의 장관들이 힘써 일하니 나라 안의 백성이 도망하거나 명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우(禹)의 공이 가장 컸으니, 전국의 아홉 개 산을 개간했고,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했으며, 아홉 개의 강 물길을 통하게 했고, 구주(九州)18를 확정했다. 각 지방은 그 직분에 따라 조공을 보내왔는데, 모두 그 지역의 실정에 맞게 하였다. 영토는 사방 5,000리로 황복(荒服)19까지 이르렀다. 융(戎), 저(氐), 강(羌) 등 동서남북의 여러 부족을 회유하여 사해(四海) 안이 모두 순의 공적을 숭앙하게 되었다. 이에 우는 구초(九招)20라는 음악을 짓고 진기한 물건을 헌상하니 봉황이 날아와서 맴돌았다. 천하에 덕을 밝힌다는 것은 모두 순임금의 시대로부터 비롯하였다.
순이 제위에 올라 수레에 천자의 깃발을 꽂고 부친인 고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 모습이 매우 공손하여 자식의 도리 그대로였다. 동생 상을 제후에 봉하였다. 순은 아들 상균(商均)이 또한 불초하다 하여 미리 하늘에 우를 천거하고 17년이 지나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21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요임금을 이어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이었다. 그를 강남(江南)의 구의산(九疑山)22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이 영릉(零陵)이다. 삼 년 상을 마치자 우 또한 순의 아들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그렇지만 제후들이 모두 우에게로 돌아왔다. 그런 연후에 우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요의 아들 단주와 순의 아들 상균은 모두 봉토를 얻어서 그것으로 선조에게 제사를 받들었다. 그들은 천자의 아들로서 신분에 맞는 복식을 갖추어 입었고, 예악도 신분에 맞게 행하였다. 그리고 빈객(賓客)으로 천자를 만났으며, 천자도 그들을 신하로서 대하지 않았으니, 우임금이 감히 권력을 독점하여 전횡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상서(尙書)』의 「우서(虞書)」23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두루 다녔다. 요와 순임금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지역에서는 그곳의 장로(長老)들이 요순의 덕을 칭송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풍교(風敎: 풍속이 교화된 모습)가 남다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서』에는 결손된 부분이 많은데, 그 산실된 부분들이 왕왕 다른 저작에서 발견되고, 『춘추(春秋)』와 『국어(國語)』를 보면 「오제덕(五帝德)」과 「제계성(帝繫姓)」24을 잘 천명해 놓은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여러 책에 기록된 내용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사마천은 이러한 여러 사료를 수집하여 검토하고 비교적 정확하고 합리적인 사실들을 추려서 요순에 대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다.”25
구체적인 역사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하(夏)나라의 시작을 근래의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207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나라 왕조의 시작이 우임금이므로 순임금은 기원전 2070년~2200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신석기시대로 칠무늬토기가 사용되었으며 씨족마을연맹에 의한 공동체가 유지되던 원시 국가 형태의 시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이때 단군(檀君)이 고조선을 개국한 지 100여 년이 되는 무렵이었다.
순임금의 두 부인에 대해 『상서』와 『사기』는 대략 그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위(魏)나라의 장화(張華, 232-300)가 지었다는 『박물지(博物志)』에는 “동정호(洞庭湖) 안에 있는 산에 요임금의 두 딸이자 순임금의 두 왕비인 아황과 여영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상부인(湘夫人)이라고 한다. 순임금이 죽자 두 왕비가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 대나무에 온통 얼룩무늬 반점이 생겼다.”2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슬픈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라 반점이 있는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斑竹)’27 또는 ‘상비죽(湘妃竹)’이라고 부른다.
▲ ① 상비묘(湘妃墓) ② 소상반죽(瀟湘斑竹) ③ 2비도(二妃圖) 이미지출처: 중국
지금까지 살펴본 순임금은 요임금과 더불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태평시대를 열었다는 요순시대는 치자(治者)의 능력에서 개인적인 능력보다도 도덕적인 덕목을 중시했다. 또한, 후대에 가장 이상적인 왕위계승의 형태로 추앙되는 선양(禪讓)의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28 『전경』에서도 “류 찬명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상제로부터 요·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도다.”(교운 1장 4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요순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세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전설상의 인물로 그 기록에 대한 진실을 담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문헌 기록과 상제님의 말씀에 근거해 보면 도덕정치를 실현하여 이상적 통치를 구가했던 성군(聖君)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인간사의 아이러니(모순)한 단면을 보여준다. 상제님께서는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이 단주라고 하시며 단주의 해원(解冤)을 통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를 푸는 해원공사를 행하셨다.29 이 사실로 보면 요와 순 두 임금은 단주가 원을 품게 된 직·간접적 요인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태평성세를 이룬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의 씨앗이 된 역사적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은 인간사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다. 우리는 여기에서 타율에 의해 인간의 마음을 억지로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요임금이 태평성세를 이룬 성군이지만, 아들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순임금이 아무리 훌륭한 덕을 갖추어 처세를 올바르게 했다고 하지만, 결국 단주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원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참고문헌
『전경(典經)』
『상서(尙書)』
『사기(史記)』
『박물지(博物志)』
강길중 외, 『중국역사의 이해』, 경남: 경상대학교 출판부, 2009.
사마천, 『사기(史記)1-본기(本紀)』, 정범진 외 역, 서울: 까치, 2001.
『신역 서경(新譯 書經)』, 이기석ㆍ백연욱 역, 서울: 홍신문화사, 1997.
백도백과(百度百科), http://www.baidu.com
01 중국 전설에 나오는 오제(五帝)의 하나.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손자로 고양(高陽)에서 나라를 일으켰다.
02 옛날 구주(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산서성, 하남성 북부, 하북성 대부분과 요녕성 서부에 해당한다.[사마천, 『사기(史記) 1-본기(本紀)』, 정범진 외 역(서울: 까치, 2001). p.19]
03 제후들을 나누어 관장하는 수령들.
04 뇌수산(雷首山)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동남쪽에 있다. 이밖에 산동성, 하남성, 하북성, 절강성, 안휘성, 호남성에도 역산이 있는데, 이 산들에서도 순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위의 책, 같은 곳)
05 뇌수(雷水)라고도 불린다.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 남쪽에 있다.(위의 책, 같은 곳)
06 황하의 물가. 일설에서는 산서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한다.(위의 책, 같은 곳)
07 유학에서 말하는 오륜(五倫)을 가리킨다.
08 모든 벼슬아치를 관장하는 자리.
09 살갗에 먹물을 넣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베는 비형(剕刑), 불알을 까는 궁형(宮刑), 죽이는 대벽(大辟) 등의 다섯 가지 형벌을 말한다.
10 지금의 하북성 동북쪽 일대.[『신역 서경(新譯 書經)』, 이기석ㆍ백연욱 역, (서울: 홍신문화사, 1997) p.37]
11 높은 산이란 뜻. 일설에는 지금의 호남성 대용현(大庸縣) 서남쪽에 있는 산이라 한다.(위의 책, 같은 곳)
12 묘족(苗族)을 가리킨다. 이 묘족은 한족(漢族)의 형성기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족과 가장 접촉이 빨랐고 빈번했던 부족이었다. 일설에는 여기의 삼묘는 그들을 통치한 제후를 가리킨다고 한다.(위의 책, 같은 곳)
13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燉煌縣) 남쪽에 있다고 한다.(위의 책, 같은 곳)
14 강소성 동해현(東海縣)과 산동성 염술현(鹽沭縣) 경계에 위치한 해발 269.5m의 산이다.[백도백과(百度百科), http://www.baidu.com]
15 형벌을 주관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
16 공인(工人)들을 관리하는 우두머리.
17 백성을 교화하는 일을 맡은 관리.
18 즉 전국(全國). 기주(冀州), 예주(豫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연주(兗州), 양주(梁州), 옹주(雍州)의 아홉 고을.(사마천, 『사기(史記) 1-본기(本紀)????, p.25)
19 영토를 구획하여 부르던 오복(五服)의 하나이다. 도성(都城)구역인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사방 500리를 전복(甸服), 그 바깥 500리를 후복(侯服), 또 그 바깥 500리를 수복(綏服), 또 그 바깥 500리를 요복(要服), 또 그 바깥 500리를 황복(荒服)이라고 한다.
20 순임금의 덕을 칭송하여 지은 음악으로 전체가 아홉 곡으로 끝나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21 지금의 호남성 남부, 광서성 동북부와 광동성 서북쪽 일대.(위의 책, p.25)
22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다.(위의 책, p.25)
23 「우서(虞書)」는 요순의 치적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우는 유우(有虞)씨라는 순의 씨족 이름에서 유래했다. 내용은 요순의 치적을 위주로 하여 그 당시 큰 공을 세웠던 신하들의 말이나 업적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요전(堯典)ㆍ순전(舜典)ㆍ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기록들은 춘추시대 사가들의 추기(추기: 본문에 추가하여 적어 넣음)라고 한다. 대우모는 보다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 한다.[『신역 서경(新譯 書經)』, p.16]
24 「오제덕」과 「제계성」은 『대대례기(大戴禮記)』의 편명(篇名)으로 오제(五帝)에 대한 사적(事迹)이 기록되어 있다.
25 『사기』, 권1: 余嘗西至空桐, 北過涿鹿, 東漸於海, 南浮江淮矣, 至長老皆各往往稱黃帝ㆍ堯ㆍ舜之處, 風敎固殊焉, 總之不離古文者近是. 予觀春秋·國語, 其發明五帝德·帝繫姓章矣, 顧弟弗深考, 其所表見皆不虛. 書缺有閒矣, 其軼乃時時見於他說. 非好學深思, 心知其意, 固難爲淺見寡聞道也. 余幷論次, 擇其言尤雅者, 故著爲本紀書首.
26 『박물지』, 권8: 洞庭之山, 堯之二女, 舜之二妃居之, 曰湘夫人. 舜崩, 二妃啼, 以涕揮竹, 竹盡斑.
27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에 합류해서 들어가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아울러 ‘소상’이라 부른다. 이 소상지역에서 나는 반죽이라는 뜻이다.
28 강길중 외, 『중국역사의 이해』, (경남: 경상대학교 출판부, 2009), p.10.
29 공사 3장 4절 참고.
<대순회보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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