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의병장 김영백(金永伯)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2 조회7,374회 댓글0건본문
▲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맥켄지가 양평군 지평 인근에서 촬영한 의병대 모습: 『The tragedy of Korea』(1908년에 뉴욕에서 발간 된 책) p207, 사진: 맥캔지(F. A. McKenzie) / 자료출처: 위키미디어
… 상제께서 영학을 불러들여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을 물리쳐 내려 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도다. 영학이 “무슨 척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되물은즉 “너는 열여덟 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회상을 촉구하시니 그는 옛일을 더듬었도다.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南原)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그에게 화로를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三월에 죽었나이다. 또 금년 봄에 장성(長城) 다동(多洞)에서 사는 외숙인 김 요선(金堯善)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여 의병대장 김 영백을 장성 백양사(長城白羊寺)로 찾아가서 그 비행을 꾸짖으니 그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그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나이다”고 영학이 이 두 가지 일을 아뢰었도다. (행록 4장 47절)
김영백(金永伯, 1880~1910)은 구한말 의병장이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영백(永伯)이고 후에 우(佑)라고도 불렀다. 아버지는 명기(命基)이고 어머니는 탐진 최씨(耽津崔氏)로 춘흠(春欽)의 딸이다.01 김영백은 전남 장성군(長城郡)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출생 이외에 성장 과정과 가족관계 등 기타의 인적 정보는 알 수 없다. 「영·호남 의병활동 관련 판결문」에 그의 직업은 농업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영백의 의병활동은 본인 역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자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일본 군경의 진압 관련 자료인 토벌지(討伐誌)와 판결문을 통해 그의 항전 모습을 그릴 수 있다.02
격동의 구한말과 의병
김영백이 살았던 19세기 말은 커다란 역사적 변동기였다. 조선에서는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한반도 침탈이 심화되면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전개되었다. 일본의 국권침탈에 항전한 의병(義兵)은 1895-1915년을 전후한 시기, 약 20년간 전국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03 이러한 양상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 공포,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등과 같은 일제의 침탈이 자행될수록 고조되었다. 특히 1907년 고종(高宗, 1852~1919)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은 항일무장투쟁의 단계로 격화되었다. 아울러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병행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하는 사람은 날로 증가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의병의 항일투쟁을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보았다.04 일본 군경 또한 의병과의 싸움을 “대전쟁”이라고 평할 정도였다.05 이렇듯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을 때 의병은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가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참상을 겪었다.
김영백이 살았던 19세기 말은 커다란 역사적 변동기였다. 조선에서는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한반도 침탈이 심화되면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전개되었다. 일본의 국권침탈에 항전한 의병(義兵)은 1895-1915년을 전후한 시기, 약 20년간 전국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03 이러한 양상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 공포,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등과 같은 일제의 침탈이 자행될수록 고조되었다. 특히 1907년 고종(高宗, 1852~1919)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은 항일무장투쟁의 단계로 격화되었다. 아울러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병행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하는 사람은 날로 증가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의병의 항일투쟁을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보았다.04 일본 군경 또한 의병과의 싸움을 “대전쟁”이라고 평할 정도였다.05 이렇듯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을 때 의병은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가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참상을 겪었다.
▲ 호남지역 의병장들: 일본군이 만든 『남한대토벌 기념사진첩』에서 발견된 당시 체포되었던 호남지역 의병장들의 모습
호남지역의 의병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이며 노사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기우만(奇宇萬, 1846~1916)에 의해 1896년 장성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의병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06 1906년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그의 영향을 받은 임병찬(林炳贊, 1851~1916)이 봉기한 태인(泰仁) 의거(義擧)는 호남지역의 유생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유생들의 의병봉기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07 1907년 최익현이 유배지인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에서 순국하고, 일본의 정치적 침략이 연이어 일어나자 기정진의 문인 기삼연(奇三衍, 1851~1908)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권(國權) 회복을 위해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양반), 전수용(全垂鏞, 1879~1910, 유생), 안규홍(安圭洪, 1879~1911, 평민·머슴), 김영백 등 다양한 신분계층이 전라도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반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08
이 시기는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이 그 어느 지역보다 두드러졌으며, 전국의병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즉 일본 군경과의 교전회수와 교전의병수(交戰義兵數)에 관한 구체적 수치는 1908년에는 각각 25%와 24.7%를, 1909년에는 각각 47.2%와 60%를 전라도에서 차지하였다.09 이처럼 호남지역에서 맹렬하게 일어났던 의병투쟁은 1907년을 전후로 내부의 변화된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의병모집은 향교와 서원에서 통문(通文)을 보내는 기존방식에서 벗어나 자발적 참여와 함께 의병지도부가 시장 등지에서 청장년을 직접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꿔었다. 둘째, 무기의 개조와 신무기 확보를 통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였다. 셋째, 지휘체계의 확립과 엄정한 군기(軍紀)를 확립하였다. 넷째, 전술은 대규모의 정면공격에서 소부대의 유격전술로 전환하였다. 다섯째, 의진(義陣) 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10
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0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국가기록원(www.archives.go.kr)], 일제(日帝)의 경무국이 편집한 「暴徒에 關한 編冊」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 한국독립운동사자료11-16 의병편] 참조.
03 홍영기,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학연구』 64 (2016), p.107.
04 「한국 안에 전쟁」, 《대한매일신보》, 1907. 9. 5.
0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15 의병편Ⅷ> 9월, 전라도> 대토벌에 관한 상황 보고
06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인문학연구』 98 (2016), pp.122-124.
07 홍순권, 「한말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과 정치·경제적 지향」, 『역사학연구』 64 (2016), pp.536-537.
08 김상기, 앞의 글, p.148.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p.50.
09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p.48.
10 홍영기, 앞의 글, pp.54-58.
11 김영백의 구체적 활동은 국가보훈처(www.mpva.go.kr)의 ‘독립유공자(공훈록)’를 바탕으로 기술한다.
12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보고」에 따르면 김영백은 흥덕, 고창에서 80명의 부하를 둔 수괴(首魁)로 기록되어 있다.[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통감부문서 9권> 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13 황현, 『매천야록』 상, 임혁택 외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p.490.
14 김상기,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p.42.
15 「흥덕군의 연혁과 의병활동」, 《고창신문》, 2009. 9. 22.
16 「호남의병」, 《대한매일신보》, 1909. 1. 10.
17 「독립유공 훈장 130개 주인 못 찾아」, 《전북도민일보》, 2017. 9. 16.
18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0), p.247.
19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권 의병편Ⅶ > 1909> 6월, 전라도> 폭도에 관한 건.
20 교반적 방법은 적이 한정된 지역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포위하여 전후좌우로 왕복해가며 수색하고 기병을 이용하여 적을 속이는 전술이다. [김상기,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p.45.]
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5권 의병편Ⅷ> 1909> 10월, 전라도> 폭도체포의 건.
김영백의 의병활동11
김영백은 1907년 10월 고향인 장성에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로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12 그는 의진(義陣)을 선봉·중군·후군장·좌우익장·군량관 등의 부서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전의 의병대가 기율(紀律)이 없거나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점이 종종 지적된 것에 비해 전통적인 군제(軍制)로 지휘체계를 갖춘 것이다.13 이러한 군제는 군기를 유지함으로써 의병활동의 영속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자금, 화약, 식량, 피복 등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민간에서 조달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마을마다 밀정을 파견하여 민간을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군수조달을 강도 행위로 규정하고 철저히 감시했다.14 김영백이 활동한 중심지역이 그의 고향 장성인 것도 이러한 군수를 조달하는 방법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7년 12월 5일에 고석진(高石鎭, 1856-1924) 부대와 연합하여 의병 120여 명을 이끌고 담양, 곡성, 여수로 남하 전진하면서 창의포고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2월 26일 정읍 입암산성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크게 무찔렀다.15 1908년 음력 3월 4일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공격하고 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법산(法山)에서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흥덕군 방장산(方丈山) 기슭의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으며, 10월에는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鰲縣)에서 헌병과 교전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12월 15일에는 광주의 대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6 1908년 고창 출신 강대영(姜大榮)이 의진에 합류하게 된다. 김영백은 그를 의병장으로 삼아 의병 130여 명과 총기 70여 정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강대영 부대는 이후 고창 반등산과 흥덕 수강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펼쳤다.17
1909년 1월 말경 장성군 북이면(北二面) 상곡리(上谷里), 2월 중순에는 장성군 북일면(北一面) 동산리(東山里),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에서 수비대기병과 교전하였다. 4월 11일에는 흥덕군 일동면(一東面) 구수교(九水橋), 4월 18일에는 장성군 북삼면(北三面),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一南面) 유점리(鍮店里), 5월 18일에는 흥덕군 서면(西面)에서 각각 일본 헌병과 전투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대열에서 이탈해 민폐를 끼친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의병운동의 대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전경』에 김영백은 소속부대의 의병이 장성에 사는 김요선을 약탈했다는 사실을 김요선의 조카인 김영학을 통해 알고, 사죄와 더불어 그 비행을 저지른 의병을 총살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김영백 부대는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개조와 신무기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6월 29일 김영백은 화승총을 개작하여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었다.18 이들은 주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했는데, 그 화기(火器)는 기관총을 비롯한 일본의 신무기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당시 의병들의 기본화기는 구식무기인 화승총이거나 중국제 무기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은 화승총과 화약, 탄환을 직접 제조하거나 개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백 부대 또한 전북 정읍의 내장사(內藏寺) 부근에서 무기를 제조하다 일본군에 발각되었다.19 아마도 화승총을 뇌관식 격발장치로 개선하여 무기성능이 크게 향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김영백 부대의 끈질긴 저항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일본은 호남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1909년 9월과 10월 2개월 동안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이라는 극악한 작전을 전개한다. 이른바 대규모의 일본군이 밀정과 변장대, 헌병보조원 등을 활용하여 마을 단위의 수색과 토벌을 반복적으로 행했던 ‘교반적 방법(攪拌的 方法)’이다.20 이에 10월 18일에 김영백의 부장 강태영(姜太榮)이 고부경찰서 변장대(變裝隊)에 체포되었다.21 10월 22일 김영백은 2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성군 북이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이미 전세(戰勢)가 기운 뒤였다. 결국, 김영백 의병장은 1909년 11월 8일에 의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909년 12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재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하는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김영백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 정치하는 것은 독립을 해치는 것”이라고 진술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백은 1907년 10월 고향인 장성에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로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12 그는 의진(義陣)을 선봉·중군·후군장·좌우익장·군량관 등의 부서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전의 의병대가 기율(紀律)이 없거나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점이 종종 지적된 것에 비해 전통적인 군제(軍制)로 지휘체계를 갖춘 것이다.13 이러한 군제는 군기를 유지함으로써 의병활동의 영속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자금, 화약, 식량, 피복 등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민간에서 조달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마을마다 밀정을 파견하여 민간을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군수조달을 강도 행위로 규정하고 철저히 감시했다.14 김영백이 활동한 중심지역이 그의 고향 장성인 것도 이러한 군수를 조달하는 방법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7년 12월 5일에 고석진(高石鎭, 1856-1924) 부대와 연합하여 의병 120여 명을 이끌고 담양, 곡성, 여수로 남하 전진하면서 창의포고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2월 26일 정읍 입암산성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크게 무찔렀다.15 1908년 음력 3월 4일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공격하고 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법산(法山)에서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흥덕군 방장산(方丈山) 기슭의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으며, 10월에는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鰲縣)에서 헌병과 교전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12월 15일에는 광주의 대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6 1908년 고창 출신 강대영(姜大榮)이 의진에 합류하게 된다. 김영백은 그를 의병장으로 삼아 의병 130여 명과 총기 70여 정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강대영 부대는 이후 고창 반등산과 흥덕 수강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펼쳤다.17
1909년 1월 말경 장성군 북이면(北二面) 상곡리(上谷里), 2월 중순에는 장성군 북일면(北一面) 동산리(東山里),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에서 수비대기병과 교전하였다. 4월 11일에는 흥덕군 일동면(一東面) 구수교(九水橋), 4월 18일에는 장성군 북삼면(北三面),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一南面) 유점리(鍮店里), 5월 18일에는 흥덕군 서면(西面)에서 각각 일본 헌병과 전투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대열에서 이탈해 민폐를 끼친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의병운동의 대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전경』에 김영백은 소속부대의 의병이 장성에 사는 김요선을 약탈했다는 사실을 김요선의 조카인 김영학을 통해 알고, 사죄와 더불어 그 비행을 저지른 의병을 총살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김영백 부대는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개조와 신무기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6월 29일 김영백은 화승총을 개작하여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었다.18 이들은 주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했는데, 그 화기(火器)는 기관총을 비롯한 일본의 신무기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당시 의병들의 기본화기는 구식무기인 화승총이거나 중국제 무기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은 화승총과 화약, 탄환을 직접 제조하거나 개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백 부대 또한 전북 정읍의 내장사(內藏寺) 부근에서 무기를 제조하다 일본군에 발각되었다.19 아마도 화승총을 뇌관식 격발장치로 개선하여 무기성능이 크게 향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김영백 부대의 끈질긴 저항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일본은 호남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1909년 9월과 10월 2개월 동안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이라는 극악한 작전을 전개한다. 이른바 대규모의 일본군이 밀정과 변장대, 헌병보조원 등을 활용하여 마을 단위의 수색과 토벌을 반복적으로 행했던 ‘교반적 방법(攪拌的 方法)’이다.20 이에 10월 18일에 김영백의 부장 강태영(姜太榮)이 고부경찰서 변장대(變裝隊)에 체포되었다.21 10월 22일 김영백은 2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성군 북이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이미 전세(戰勢)가 기운 뒤였다. 결국, 김영백 의병장은 1909년 11월 8일에 의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909년 12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재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하는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김영백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 정치하는 것은 독립을 해치는 것”이라고 진술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대한매일신보》
《고창신문》
《전북도민일보》
《고창신문》
《전북도민일보》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0.
황현, 임혁택 외 옮김, 『매천야록』 상,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황현, 임혁택 외 옮김, 『매천야록』 상,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김상기,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인문학연구』 98, 2016.
홍순권, 「한말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과 정치·경제적 지향」, 『역사학연구』 64, 2016.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홍영기,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학연구』 64, 2016.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인문학연구』 98, 2016.
홍순권, 「한말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과 정치·경제적 지향」, 『역사학연구』 64, 2016.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홍영기,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학연구』 64, 2016.
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0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국가기록원(www.archives.go.kr)], 일제(日帝)의 경무국이 편집한 「暴徒에 關한 編冊」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 한국독립운동사자료11-16 의병편] 참조.
03 홍영기,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학연구』 64 (2016), p.107.
04 「한국 안에 전쟁」, 《대한매일신보》, 1907. 9. 5.
0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15 의병편Ⅷ> 9월, 전라도> 대토벌에 관한 상황 보고
06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인문학연구』 98 (2016), pp.122-124.
07 홍순권, 「한말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과 정치·경제적 지향」, 『역사학연구』 64 (2016), pp.536-537.
08 김상기, 앞의 글, p.148.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p.50.
09 홍영기, 「정미의병기 호남지방의 의병활동」, 『지역문화연구』 6 (2007), p.48.
10 홍영기, 앞의 글, pp.54-58.
11 김영백의 구체적 활동은 국가보훈처(www.mpva.go.kr)의 ‘독립유공자(공훈록)’를 바탕으로 기술한다.
12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보고」에 따르면 김영백은 흥덕, 고창에서 80명의 부하를 둔 수괴(首魁)로 기록되어 있다.[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통감부문서 9권> 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13 황현, 『매천야록』 상, 임혁택 외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p.490.
14 김상기,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p.42.
15 「흥덕군의 연혁과 의병활동」, 《고창신문》, 2009. 9. 22.
16 「호남의병」, 《대한매일신보》, 1909. 1. 10.
17 「독립유공 훈장 130개 주인 못 찾아」, 《전북도민일보》, 2017. 9. 16.
18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0), p.247.
19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권 의병편Ⅶ > 1909> 6월, 전라도> 폭도에 관한 건.
20 교반적 방법은 적이 한정된 지역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포위하여 전후좌우로 왕복해가며 수색하고 기병을 이용하여 적을 속이는 전술이다. [김상기,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p.45.]
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5권 의병편Ⅷ> 1909> 10월, 전라도> 폭도체포의 건.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13 16:55:14 인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13 17:26:50 인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13 17:35:32 인물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