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허미수(許眉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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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5 조회5,884회 댓글0건본문
허목(許穆)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선조 28년 12월 11일 인시에 서울 청선방에서 아버지 현감 교(喬)와 임제(林悌)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년) 정언웅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 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衛)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30세에 광주(廣州) 쇠내에 은거하며 자봉산(姿峰山)에 들어가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 배운 전서(篆書)를 이 시절에 서체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효종이 승하하자 예론으로 우암 등과 대결하였다. 인조(仁祖)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조에게 독살되고, 둘째 아들인 효종(孝宗)이 왕통을 계승했다. 그 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씨가 효종을 위하여 몇 년 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기해예송(己亥禮頌 1669)이라고 한다. 기해복제(己亥服制)에 문제가 된 것은 효종이 가통(家統)으로 보면 차자(次子)가 되고 왕통(王統)으로 보면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복 입는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1년 복을 주장했고 윤휴와 허목은 3년 복을 주장하여 예송이 제기되었다. 논재에서 패하여 삼척부사로 쫓겨났다. 이때 저 유명한 속칭 퇴조비(退潮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동해의 조수간만이 약간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심하여 삼척읍내까지 올라왔으며, 여름철 홍수가 나면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미수가 글을 짓고 비를 세워 조수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한편 그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氣)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미수는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서 서인이던 우암 송시열의 예론(禮論)에 관련된 논쟁이 유명하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직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한 미강(米糠)서원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전경」에는 허미수와 관련된 다음의 구절이 있다.『상제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 왔도다.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 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 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상제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 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를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 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 가니라.』 (제생 9절)
허미수와 송우암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우암이 미수에게 문약(問藥)한 일이 있었다. 아들을 시켜 미수를 찾아가서 자기 병세를 상세하게 고하고 약방문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우암도 약방문을 못 내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미수 외에는 자기 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미수가 우암에 대한 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비상 세푼을 정화수에 탕하여 춘부장께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우암의 아들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비상 세 푼이라니 먹고 죽으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아버지가 걱정되어 『더 좋은 약은 없을까요?』하니 그제서야 미수가 필묵을 꺼내더니 초제(草劑)로 약방문을 적어서 아무 말 없이 건네주었다. 아들은 인사를 올리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우암께 그 글을 올렸다. 우암이 죽 훑어보고 하는 말이『선생님께서 아무 말 없으시더냐?』하셨다.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자세히 고했다. 그러자 우암이『그러면 그렇지. 역시 미수다워』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약장에서 비상 세 푼을 내어 미수 어른께서 시키는 대로 다려 오라고 했다. 우암이 비상 세 푼의 약방문을 자기도 마음속에 내어놓고 혹시나 하여 미수선생님께 보냈던 것이라 한다. 이 얘기는 비록 정치상의 의견대립은 있을 수 있어도 인명에 관한 의술에는 의견을 달리할 수 없었던 것과 인간적으로 물약 할 만큼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한다.
우암이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금부도사가 사약을 올리자 하는 말이 『이 약은 내가 먹어서는 죽지 않아』하였다. 관원은 죽지 아니하면 자신이 난감한 일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우암이 『자네야 무슨 죄가 있나. 나의 항문(肛門)을 막아라』하였다. 솜으로 항문을 꼭꼭 막자 약사발을 마시고 누워서 고생 고생하다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제께서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부르라고 했던 것은 우암의 막힌 항문을 뚫어 주는 공사를 보기 위함이다 그 후 아이의 항문으로부터 시춧물이 쏟아져 제생되었다.
그리고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할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 미수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 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 이천 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하시고 『네가 김 광찬, 신 원일과 함께 일방 촌씩 오려서 시(侍)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사백 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 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삼칠편을 염송하라』명 하시니라. 『형렬은 명을 좇았으되 신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이니 상제께서는 「정읍 이 도삼을 불러서 행하라」분부 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 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 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 한 마리를 사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공사 2장 13절)
허미수가 중수한 강선루는 성천읍 비류강 기슭에 있던 동명관(東明館)에 부속된 고려시대의 누각이다. 정자형(丁字形)평면을 이룬 31칸의 대규모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사방에 개방된 누각이며 기둥머리에는 일출목(一出目) 삼익공(三翼工)을 쌓고 지붕은 팔각 지붕으로 하고 지붕마루에 양성을 하였다. 삽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그리고 우물마루(짧은 널은 세로로 놓고 긴 널을 가로로 놓아 정(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 놓는데 귀틀 두 개 사이의 구역인 고물은 일만 이천 개라 한다. 그 고물 하나 하나에는 녹줄이 붙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마루를 깔면서 온갖 정성을 깃들였으니 복록은 성경신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대순회보》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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