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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민영환(閔泳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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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5 조회6,2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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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불법조약의 파기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비분하여 자결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 민영환. 목숨을 끊어 일제에 항거한 그는 조선 말기의 호조판서 겸호(謙鎬)의 아들로서 1861년(철종 12년)서울에서 태어났다.

  1877년(고종 14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 검열, 설서(設書), 수찬(修撰), 검상(檢詳),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으로 폭발한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 전환국총판(典圜局總瓣),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 내무협판, 개성유수, 해방총관(海防總管), 친군연해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 한성우윤(漢城右尹), 기지국총판을 역임하였다.1887년에는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호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 형조판서, 한성부윤을 거쳐 1894년 독판내무부사.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에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우위를 위하여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침공하고자 했으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이를 좌절 시켜 조선에서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1895년 일제가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종종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에 5월 26일에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이 있게 되자, 때마침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와중에 있던 조선정부는 축하사절을 파견키로 결정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1896년 4월 1일 윤치호(尹致昊), 김득련(金得鍊), 김도일(金道一)등을 대동하고 참석하게 된다.

   서울을 떠난 민영환 일행은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 편으로 중국 상해로 가서 영국 상선 퀸 빅토리아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 기항했다. 고베(神戶),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기차로 뉴욕으로 직행한다. 여기서 대서양을 횡단, 영국 리버풀항에 정박하여 기차로 런던을 거쳐 5월 17일 네덜란드의 폴나싱항에 상륙하여 기차로 갈아탔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지나 폴란드의 베르샤바를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이곳 공사관 옥상에 태극기를 달았다. 

  5월 22일 크렘린 궁에 도착하여 니콜리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와 예물단지를 올렸다. 5월 26일 크렘린 궁의 러시아식 예배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데, 모자를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어 식장 밖 발코니에서 구경하였다. 6월 6일 황제를 만난 후 축사를 외고 국서(國書)를 바치니 황제는 『사절을 보내주어 교의(交誼)가 더욱 두터워졌으니 영원히 동호(同好) 할 뜻을 대군주 폐하께 아뢰십시오.』라고 말했다. 

  6월 8일 지금의 레닌그라드에 70일간 머물면서 러시아의 각종 근대적인 시설과 제도를 상세히 살펴본 후 8월 19일 귀국 길에 오른 일행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러시아 군함 편으로 12월 21일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서울 떠난 지 약 7개월 만이요, 그간 여행한 노정은 6만 8천 3백 65리에 이른다. 민영환은 우리나라가 유럽방면에 파견한 최초의 사절일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쌓은 것이다. 다음해 1월에는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두 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으로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를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에는 마침 발족한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였다. 러일전쟁 후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여 친일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상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협박과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이 때 세 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 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서울에 있는 외국 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으며, 또 다른 한 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이중 동포에게 남기는 유서를 번역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진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로 분발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 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형제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이 유서는 명함에 연필로 쓴 것이었다. 유서를 마치고 단도로 목을 난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민영환의 자결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인사들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도주님의 조부께서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 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다.

  상제께서는 민영환을 위한 만장을 지으셔서 그의 충절을 위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상제께서 김자현에게 이르사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주시고 민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 그에게 주고 「쓸데 있으리니 외우라」고 하셨도다. 「대인보국정지신(大人報國正知身) 마세진천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 유한경심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그리고 일도분재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주셨도다.』 (예시 37절) 만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대인의 나라를 위함은 마땅히 앎을 실천하는데 있어 어지러운 세상을 갈고 씻어 운기를 새롭게 하였도다. 한에 사무치도록 깊이 경계 시켜 성스러운 뜻 다하고 한칼로 몸을 갈라 만방에 알렸도다.』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대순회보》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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