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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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2 조회6,816회 댓글0건본문
중국에서 최초의 문명 형성과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삼황(三皇)오제(五帝)이다. 이 전설적 제왕의 이야기는 고대 국가형성과 출현의 과정을 상징하는 신화로 전해진다. 하지만 신화의 자료가 일정하지 않아 전승의 형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 중 오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전해지나 대체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도주님께서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癸亥, 1923)년에 밝히신 「전교(傳敎)」를 통해 전욱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교」에는 인류 역사의 각 시기마다 성인(聖人)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전욱은 황제(黃帝)효(囂: 소호)곡(嚳: 제곡)훈(勛: 요)화(華: 순)우(禹)와 함께 초통(初統) 초회(初會)의 성인으로 등장하고 있다.01 상고 시대의 역사에서 전욱의 존재 여부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인 『사기』를 비롯하여 『제왕세기』, 『산해경』 등에서 전욱과 관련된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며,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건황(乾荒)이다.02 창의는 재덕이 평범하여 제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겨져 약수(若水)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촉산(蜀山)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전욱을 낳았다.03 전욱은 유년시절부터 소호(少昊)의 보호를 받고 성장하였다. 중국의 고대 설화에 “동해의 바깥에 큰 골짜기[大壑]가 있으니 소호의 나라이다. 소호가 전욱을 이곳에서 키웠다”04라고 전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전욱이 어릴 때 소호씨에 의해 양육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열 살에 이미 소호를 보좌했는데,05 이후 소호로부터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재덕을 인정받아 고양(高陽)지역에 제후로 봉해졌다. 이로부터 전욱을 ‘고양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주님께서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癸亥, 1923)년에 밝히신 「전교(傳敎)」를 통해 전욱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교」에는 인류 역사의 각 시기마다 성인(聖人)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전욱은 황제(黃帝)효(囂: 소호)곡(嚳: 제곡)훈(勛: 요)화(華: 순)우(禹)와 함께 초통(初統) 초회(初會)의 성인으로 등장하고 있다.01 상고 시대의 역사에서 전욱의 존재 여부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인 『사기』를 비롯하여 『제왕세기』, 『산해경』 등에서 전욱과 관련된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며,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건황(乾荒)이다.02 창의는 재덕이 평범하여 제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겨져 약수(若水)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촉산(蜀山)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전욱을 낳았다.03 전욱은 유년시절부터 소호(少昊)의 보호를 받고 성장하였다. 중국의 고대 설화에 “동해의 바깥에 큰 골짜기[大壑]가 있으니 소호의 나라이다. 소호가 전욱을 이곳에서 키웠다”04라고 전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전욱이 어릴 때 소호씨에 의해 양육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열 살에 이미 소호를 보좌했는데,05 이후 소호로부터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재덕을 인정받아 고양(高陽)지역에 제후로 봉해졌다. 이로부터 전욱을 ‘고양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욱은 장성하여 중원으로 들어가 황제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통치가 공고해지자 주변 부락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 중 비교적 큰 씨족 부락의 수장인 공공(共工)은 전욱의 통치에 불복하고 군사를 조직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성은 강(姜)씨로 염제(炎帝)의 후예이며 축융(祝融)의 아들로 용맹한 인물이었다. 이에 전욱은 제후들을 소집하여 전력을 다해 싸워 공공의 반란을 진압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온다. 당시 공공은 패색이 짙어지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받아 부러뜨렸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요동쳐 서북쪽이 높아지고 동남쪽이 꺼져 들어가면서 해와 달과 별들이 서북쪽으로 몰려가고 강물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를 이루게 되었다고 전한다.06
그 후 전욱이 제위(帝位)에 올라 가장 먼저 착수했던 일은 바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 버린 것[絶地天通]’이었다. 『국어(國語)』에 “소호씨의 세력이 쇠하여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혀 인간과 신이 뒤섞여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마다 각기 신에게 제사 지내고 집마다 무당을 두어 진실함이 없어지고 제사가 속되게 되었다”07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욱은 다시는 백성들이 신들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신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08 그는 중(重)을 남정(南正)에 임명하여 천문과 신(神)에 대한 제사를 관장토록 하고 여(黎)는 화정(火正)에 임명하여 지리(地理)에 관한 일과 민정(民政)을 돌보게 했다. 이후 하늘에 대한 제사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관리가 생겨 제사를 성대하고 신성하게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마음대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고대 사회에서 귀천의 차이가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09
그 후 전욱이 제위(帝位)에 올라 가장 먼저 착수했던 일은 바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 버린 것[絶地天通]’이었다. 『국어(國語)』에 “소호씨의 세력이 쇠하여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혀 인간과 신이 뒤섞여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마다 각기 신에게 제사 지내고 집마다 무당을 두어 진실함이 없어지고 제사가 속되게 되었다”07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욱은 다시는 백성들이 신들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신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08 그는 중(重)을 남정(南正)에 임명하여 천문과 신(神)에 대한 제사를 관장토록 하고 여(黎)는 화정(火正)에 임명하여 지리(地理)에 관한 일과 민정(民政)을 돌보게 했다. 이후 하늘에 대한 제사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관리가 생겨 제사를 성대하고 신성하게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마음대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고대 사회에서 귀천의 차이가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09
이때 중과 여는 신에 대한 제사를 주기적으로 지내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 간격을 측정해야 했으므로 해와 달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측기록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점차 해와 달의 주기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지식이 형성되었다. 『상서(商書)』 「요전(堯典)」에 “주기[朞]는 3백 6순 6일이다(朞三百有六旬有六日)”라고 하여 1년을 366일로 계산했는데 이는 중과 여 및 그 후대 사람들이 장기간에 걸쳐 축적한 경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과거 유목민이나 농경민은 직접적인 생산 경험을 통해 자연계의 단순한 법칙을 터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와 달의 운행, 세시(歲時) 계산법 등은 오랜 기간의 관측과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산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는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 생산 활동에 전념해야 했으므로 별도로 시간을 들여 정밀한 관측 작업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한 일은 전문 종사자를 필요로 했는데 중과 여로 인해 역법(曆法)의 혜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로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또한 『회남자』에는 “전욱의 법도에 의하면 여자가 길에서 남자를 피하지 않으면 네거리에서 푸닥거리를 하여 부정을 없앤다”10라는 구절이 있다. 전욱의 제위 시기에는 모계 중심의 사회가 점차 부계 중심의 사회로 바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르러 종교적 정치세력에 의해 남존여비의 관념과 법도가 제정되면서 부계제도가 확고히 자리매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1 한편, 전욱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소호가 금슬(琴瑟)을 만들어 그에게 연주와 노래를 가르쳤다. 『여씨춘추』에는 전욱이 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비룡으로 하여금 팔풍지음(八風之音)을 만들게 하여 ‘승운(承雲)’이라 칭하며 하늘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12
또한 『회남자』에는 “전욱의 법도에 의하면 여자가 길에서 남자를 피하지 않으면 네거리에서 푸닥거리를 하여 부정을 없앤다”10라는 구절이 있다. 전욱의 제위 시기에는 모계 중심의 사회가 점차 부계 중심의 사회로 바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르러 종교적 정치세력에 의해 남존여비의 관념과 법도가 제정되면서 부계제도가 확고히 자리매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1 한편, 전욱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소호가 금슬(琴瑟)을 만들어 그에게 연주와 노래를 가르쳤다. 『여씨춘추』에는 전욱이 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비룡으로 하여금 팔풍지음(八風之音)을 만들게 하여 ‘승운(承雲)’이라 칭하며 하늘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12
전욱 시대에 처음으로 행정구역을 나누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13 당시 황제는 화북 평원의 대부분을 통일하였지만 치우(蚩尤) 부족과 오랜 세월 동안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훗날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자 전욱이 행정구역 설치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형주(荊州)양주(揚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 등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누었다. 그의 통치구역은 북쪽으로는 유릉(幽陵)14, 남쪽으로는 교지(交阯)15, 서쪽으로는 유사(流沙)16, 동쪽으로는 반목(蟠木)17까지 이르렀다. 진(晉)나라의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저술한 『제왕세기』에 따르면 전욱은 98세에 붕어하였고 78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18
동진(東晋) 시대에 편찬된 설화집인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전욱에게 다양한 개성을 지닌 자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아들 노동(老童)은 아버지를 닮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괴팍하고 독한 성품을 이어받은 아들도 있었으니 인간에게 학질을 옮기는 학귀(瘧鬼), 도깨비인 망량(魍魎), 어린아이에게 경기를 일으키는 소아귀(小兒鬼),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몸을 한 흉악한 괴물인 도올(檮杌) 등이 그들이다. 또한 궁선(窮蟬)이라는 아들은 부뚜막신이 되어 한 집안의 숭배를 받으며 살았다. 부뚜막신은 조왕신(竈王神)이라고도 하며 아궁이 불을 비롯한 부엌 일을 맡은 신이다. 전욱의 후손 중에는 장수(長壽)로 유명한 팽조(彭祖)가 있다. 전욱의 현손(玄孫)이었던 그는 약 800년을 살았는데 그래도 죽을 때 건강관리를 잘못해서 단명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많은 자손을 둔 전욱은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와 더불어 황제의 후손 가운데 가장 큰 계열을 이루며 오늘날 중국의 인문시조(人文始祖)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그는 침착하고 지략에 뛰어났으며 사리에 통달했다. 적합한 토지를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다.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천지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라고 평가했다. 비록 전욱은 선사(先史) 시대의 인물로 고고학적 근거가 거의 없어 그 실제성 여부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동아시아 문명의 태동기에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전설의 제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01 교운 2장 26절 참고.
02 『제왕세기』, “顓頊, 黃帝之孫, 昌意之子, 姬姓也.”; 『죽서기년(竹書紀年)』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七十七年, 昌意降居若水, 產帝乾荒.”
03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其二曰昌意, 降居若水. 昌意娶蜀山氏女, 曰昌仆, 生高陽.”
04 『산해경』 「대황동경(大荒東經)」, “東海之外大壑, 少昊之國. 少昊孺帝顓頊於此.”
05 『제왕세기』, “帝顓頊高陽氏. 帝王世紀曰, 顓頊, … 生十年而佐少昊.”
06 『회남자』 「천문훈(天文訓)」, “昔者共工與顓頊爭為帝, 怒而觸不周之山. 天柱折, 地維絕. 天傾西北, 故日月星辰移焉, 地不滿東南, 故水潦塵埃歸焉.”
07 『국어』 「초어(楚語) 하(下)」, “及少昊之衰也, 九黎亂德. 民神雜糅, 不可方物. 夫人作享, 家為巫史, 無有要質. 民匱于祀, 而不知其福.”
08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 (경기: 김영사, 2010), p.138 참고.
09 양산췬 정자룽, 『중국을 말한다. 1. 동방에서의 창세』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67 참고.
10 『회남자』 「제속훈(齊俗訓)」, “帝顓頊之法, 婦人不辟男子于路者, 拂之于四達之衢.”
11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조우연 역 (서울: 학고방, 2012), pp.222-223 참고.
12 『여씨춘추』 「고악(古樂)」, “帝顓頊生自若水, 實處空桑, 乃登為帝. 惟天之合, 正風乃行, 其音若熙熙淒淒鏘鏘. 帝顓頊好其音, 乃令飛龍作效八風之音, 命之曰承雲, 以祭上帝.”
13 『문헌통고(文献通考)』 「권삼백십오(卷三百十五)ㆍ여지고일(輿地考一)」, “顓帝之所建, 帝嚳受之, 創制九州, 統領萬國雍ㆍ荊ㆍ豫ㆍ梁ㆍ冀ㆍ青ㆍ徐ㆍ兗ㆍ揚.”
14 ‘유주(幽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河北)성 북부와 요녕(遼寧)성 남부 일대이다.
15 베트남 호치민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광동(廣東)성, 광서(廣西)성 일대이다.
16 내몽고 서북 일대의 대사막 지역(고비 사막)과 감숙(甘肅)성 일대이다.
17 『해외경(海外經)』의 동해에 떠 있는 도새산(度塞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8 『제왕세기』, “帝顓頊高陽氏. 帝王世紀曰, 在位七十八年. 年九十八歲.”
동진(東晋) 시대에 편찬된 설화집인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전욱에게 다양한 개성을 지닌 자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아들 노동(老童)은 아버지를 닮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괴팍하고 독한 성품을 이어받은 아들도 있었으니 인간에게 학질을 옮기는 학귀(瘧鬼), 도깨비인 망량(魍魎), 어린아이에게 경기를 일으키는 소아귀(小兒鬼),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몸을 한 흉악한 괴물인 도올(檮杌) 등이 그들이다. 또한 궁선(窮蟬)이라는 아들은 부뚜막신이 되어 한 집안의 숭배를 받으며 살았다. 부뚜막신은 조왕신(竈王神)이라고도 하며 아궁이 불을 비롯한 부엌 일을 맡은 신이다. 전욱의 후손 중에는 장수(長壽)로 유명한 팽조(彭祖)가 있다. 전욱의 현손(玄孫)이었던 그는 약 800년을 살았는데 그래도 죽을 때 건강관리를 잘못해서 단명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많은 자손을 둔 전욱은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와 더불어 황제의 후손 가운데 가장 큰 계열을 이루며 오늘날 중국의 인문시조(人文始祖)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그는 침착하고 지략에 뛰어났으며 사리에 통달했다. 적합한 토지를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다.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천지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라고 평가했다. 비록 전욱은 선사(先史) 시대의 인물로 고고학적 근거가 거의 없어 그 실제성 여부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동아시아 문명의 태동기에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전설의 제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전경』
『국어(國語)』
『문헌통고(文献通考)』
『사기(史記)』
『산해경(山海經)』
『여씨춘추(吕氏春秋)』
『제왕세기(帝王世紀)』
『죽서기년(竹書紀年)』
『회남자(淮南子)』
사마천, 『완역 사기본기』, 「1권」, 김영수 옮김, 파주: (주)알마, 2013.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서울: 학고방, 2012.
여불위, 『여씨춘추12기 上』, 정영호 해석, 서울: 자유문고, 2004.
이근명(李瑾明) 편역, 『中國歷史』, 「상권」, 서울: 도서출판 신서원, 2012.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 경기: 김영사, 2010.
양산췬ㆍ정자룽, 『중국을 말한다 01 동방에서의 창세』, 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국어(國語)』
『문헌통고(文献通考)』
『사기(史記)』
『산해경(山海經)』
『여씨춘추(吕氏春秋)』
『제왕세기(帝王世紀)』
『죽서기년(竹書紀年)』
『회남자(淮南子)』
사마천, 『완역 사기본기』, 「1권」, 김영수 옮김, 파주: (주)알마, 2013.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서울: 학고방,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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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 경기: 김영사, 2010.
양산췬ㆍ정자룽, 『중국을 말한다 01 동방에서의 창세』, 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교운 2장 26절 참고.
02 『제왕세기』, “顓頊, 黃帝之孫, 昌意之子, 姬姓也.”; 『죽서기년(竹書紀年)』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七十七年, 昌意降居若水, 產帝乾荒.”
03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其二曰昌意, 降居若水. 昌意娶蜀山氏女, 曰昌仆, 生高陽.”
04 『산해경』 「대황동경(大荒東經)」, “東海之外大壑, 少昊之國. 少昊孺帝顓頊於此.”
05 『제왕세기』, “帝顓頊高陽氏. 帝王世紀曰, 顓頊, … 生十年而佐少昊.”
06 『회남자』 「천문훈(天文訓)」, “昔者共工與顓頊爭為帝, 怒而觸不周之山. 天柱折, 地維絕. 天傾西北, 故日月星辰移焉, 地不滿東南, 故水潦塵埃歸焉.”
07 『국어』 「초어(楚語) 하(下)」, “及少昊之衰也, 九黎亂德. 民神雜糅, 不可方物. 夫人作享, 家為巫史, 無有要質. 民匱于祀, 而不知其福.”
08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 (경기: 김영사, 2010), p.138 참고.
09 양산췬 정자룽, 『중국을 말한다. 1. 동방에서의 창세』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67 참고.
10 『회남자』 「제속훈(齊俗訓)」, “帝顓頊之法, 婦人不辟男子于路者, 拂之于四達之衢.”
11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조우연 역 (서울: 학고방, 2012), pp.222-223 참고.
12 『여씨춘추』 「고악(古樂)」, “帝顓頊生自若水, 實處空桑, 乃登為帝. 惟天之合, 正風乃行, 其音若熙熙淒淒鏘鏘. 帝顓頊好其音, 乃令飛龍作效八風之音, 命之曰承雲, 以祭上帝.”
13 『문헌통고(文献通考)』 「권삼백십오(卷三百十五)ㆍ여지고일(輿地考一)」, “顓帝之所建, 帝嚳受之, 創制九州, 統領萬國雍ㆍ荊ㆍ豫ㆍ梁ㆍ冀ㆍ青ㆍ徐ㆍ兗ㆍ揚.”
14 ‘유주(幽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河北)성 북부와 요녕(遼寧)성 남부 일대이다.
15 베트남 호치민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광동(廣東)성, 광서(廣西)성 일대이다.
16 내몽고 서북 일대의 대사막 지역(고비 사막)과 감숙(甘肅)성 일대이다.
17 『해외경(海外經)』의 동해에 떠 있는 도새산(度塞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8 『제왕세기』, “帝顓頊高陽氏. 帝王世紀曰, 在位七十八年. 年九十八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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