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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신농씨(神農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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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19 조회7,3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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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씀하시기를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고 하셨도다.(예시 22절)

 

 

 

염제(炎帝) 신농씨는 태호 복희씨, 황제 헌원씨와 더불어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성군(聖君)인 삼황(三皇) 가운데 한 분이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신농씨는 수렵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온갖 풀을 맛보고 의약을 발명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신농의 공덕을 모른 채 “신농유업(神農遺業)”01이란 말만 전하고 있다고 하시며 해원시대를 맞아 모든 신명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고대의 신화 속 인물인 신농씨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남아 있진 않지만 전해오는 기록의 편린(片鱗)들을 통해 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염제 신농의 탄생과 가계

 

신농씨의 성(姓)은 강씨(姜氏)다. 좌구명(左仇明)02이 저술한 『국어(國語)』에 강씨의 시조신(始祖神)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경』에도 “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행록 1장 1절)라고 하였다. 이렇듯 상제님께서 인신(人身)으로 강세하신 강씨가(姜氏家)는 인류 최초의 성인 복희씨의 풍성(風姓) 다음으로 등장한 신농씨의 강성(姜姓)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03

 

『제왕세기(帝王世紀)』 04등에 의하면,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제후 유교씨(有嬌氏)의 딸이자 제후 소전씨(小典氏)의 비(妃)였다. 어느 날, 그녀는 화양(華陽)으로 나들이 갔다가 신비스럽게 생긴 용(龍)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그 후 임신을 하여 열 달이 지나자 사람 몸에 소 머리[人身牛首]의 형상을 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신농이었다. 『진주강씨대동보(晋州姜氏大同譜)』에 신농은 오천여 년 전인 기원전 3218년 4월 16일에 천수(天水: 현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날은 중국에서 ‘신농선제만세일(神農先帝萬歲日)’이라 하여 신농씨에게 제사지내는 날이기도 하다.05

 

신농은 강수(姜水: 섬서성 기산현) 부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성을 ‘강(姜)’이라 하였다. 그는 사신인수(蛇身人首: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의 여와(女媧)가 죽은 후 큰 덕을 쌓아 왕이 되었으며 화덕(火德)을 지녀 “염제(炎帝)”라 불렀다.06 『춘추좌씨전』에서는 그가 열산(烈山: 호북성 수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열산씨(烈山氏) 혹은 여산씨(厲山氏)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진(陳: 하남성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곡부[曲阜: 산동성의 현(縣)]로 옮겼다. 신농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해서 다투지 않았다. 위세는 강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형벌을 제정했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법은 번잡하지 않았다. 그 덕화(德化)가 신(神)과 같아서 신농이 다스리는 사방의 백성들 가운데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는 법이 너그럽고 형벌이 관대해서 감옥은 비고, 풍속이 한결같아 간사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07 이처럼 큰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20년 만에 붕어하여 장사(長沙: 호남성) 땅에 묻혔다.

 

신농의 가계(家係)에 관해서는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보충하여 쓴 「삼황본기(三皇本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신농씨는 분수씨(奔水氏)의 딸인 청발(聽詙)을 들여 비(妃)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제괴(帝魁)를 낳았다. 그 뒤를 이어 제승(帝承), 제명(帝明), 제직(帝直) 등이 차례로 자리를 이어받아, 강성(姜姓)의 천자가 무려 8대(代) 530년 동안 계속되다가 황제 헌원씨가 일어났다고 한다.08 이후 주(州)·보(甫)·감(甘)·허(許)·희(戲) 등이 강성의 후예로서 제후가 되고 사악(四嶽)09을 나누어 맡았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포후(甫侯)·신백(申伯)은 왕실의 지혜로운 재상이 되었고, 제(齊)·허(許)는 제후의 서열에 끼어 중국에서 패(覇)라 일컬어졌다. 이로 미루어 신농씨의 덕(德)이 광대하여 그 자손들이 장구하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10

 

 

 

농경문화의 시작

 

신농씨 이전의 사람들은 풀을 뜯어 먹고 물을 마셨으며, 나무 열매를 채취하고 조갯살이나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수인씨(燧人氏: 불을 일으킨 사람)가 부싯돌로 불을 발명하여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면서 인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복희씨는 그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어획·수렵의 방법과 들짐승을 길들여 기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또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는 농업의 발명에서 이뤄졌다. 복희씨의 뒤를 이어 신농씨가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염제 시대에는 인구가 늘어나서 수렵과 채취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 신농은 백성들에게 단단한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갈아 그것으로 땅을 파게 하고 나무를 잘라 구부려 만든 쟁기로 풀밭을 개간케 한 뒤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이로부터 수렵과 채취에 의존해 하루하루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경작을 통해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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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은 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 토지의 성질을 판별케 하고 그곳에 합당한 작물과 오곡을 심게 했다.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신농씨가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수많은 씨앗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그 씨앗들을 모아 땅에 심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먹는 오곡(五穀)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12 이때부터 봄이 되면 파종을 하고 가을이 되면 수확하여, 한 해의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섣달에는 하늘에 보은의 뜻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신농은 따비, 절구 등의 농기구를 제작하고 농사를 위한 달력을 만들었으며, 수리를 위해 우물을 파는 등 농업과 관련된 많은 일을 했다.

 

신농씨가 천하를 다스리던 시기에 남자들은 공동으로 경작하고 여자들은 길쌈을 하여 생활이 풍요로웠다. 그때는 사람들이 어질고 착해 형벌을 쓰지 않고 무장한 병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천하가 태평스러웠다.13 신농이 절기에 따라 땅의 이로움을 분간하고 농기구를 제작해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신농씨(神農氏)”라 부르며 농업의 시조(始祖)로 추앙하게 되었다. 오늘날 근대의 산업혁명 못지않게 원시사회에 큰 변혁을 초래한 이러한 변화를 현대인들은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 혁명”이라 부른다.

       

 

 

의약(醫藥)을 창시하다

 

염제 시대 백성들은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불결한 음식 섭취로 인해 질병에 시달리거나 독사·독충에게 물려 고통을 겪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던 시절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짧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신농은 백성들의 병을 직접 고쳐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어떤 식물이 인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 알아내기 위해 자편(赭鞭)이라는 붉은 채찍으로 각종 풀과 나무를 후려치며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이 자편을 사용하면 그 식물의 독성 유무와 맛은 물론 특성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각지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수없이 자편을 휘둘러 약초들의 특성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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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은 자신이 발견한 약초들이 환자들에게 실제로 효험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온갖 풀들을 직접 맛보고 그 풀의 특성을 파악하여 치료에 이용하였다. 하지만 약초인 줄 알고 먹었던 것이 독초인 경우도 있어 자주 중독되곤 했다.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편에 “신농은 일찍이 온갖 풀을 맛보고 물맛이 단가 쓴가를 알아보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 피할 수 있게 했는데 하루에 70번 중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약초를 사용해 그것을 해독하였다. 이러한 신농의 희생적인 노력은 마침내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온갖 약초를 맛보느라 하루에 수십 번씩 중독되었던 신농은 어느 날, 단장초(斷腸草)라는 독초를 잘못 먹고 ‘단장(斷腸)’이란 이름처럼 창자가 끊어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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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은 각종 약초를 조합해서 365종의 약을 발명하여 4백 가지 이상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발명한 약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본초(本草)』 또는 『신농본초(神農本草)』인데 현재 남아 있지는 않다. 이 책에는 약물의 명칭, 형태, 산지, 채취 시기, 약효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14 이처럼 신농이 각종 풀의 약성(藥性)을 밝혀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분류한 것이 동양 의약의 시초가 되었다. 의가(醫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초학(本草學)의 창시자가 바로 “신농씨”였던 것이다. 농업신이자 약의 신(神)으로도 알려진 신농씨의 인기는 광범위해서 중국의 한약방에는 신농씨의 초상이 많이 걸려 있다. 우리나라의 한약방에서도 “신농유업(神農遺業)”이란 글귀를 걸어놓고 약을 팔았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현재도 오사카의 한약방 거리에서 신농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15

 

 

차를 비롯한 새로운 문화의 창안

 

당(唐)의 육우(陸羽, 미상~804)가 저술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서(茶書)인 『다경(茶經)』에는 차의 연원(淵源)을 신농에게 두고 있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신화 중에도 차(茶)가 신농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에 따르면 생김새가 남달랐던 신농은 수정처럼 투명한 배를 가지고 있어서 오장육부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자신의 배를 이용해 약초를 찾고자 각종 풀을 맛보고 그것이 뱃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래서 어떤 식물이 이로우며, 어떤 식물이 독이 없고 안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농은 푸른 나무에 싹튼 연한 잎을 먹었는데 그것이 몸 안에서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뱃속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무엇을 찾아다니는 듯해 그 풀을 ‘사(査: 조사하다, cha)’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그 이름이 잘못 전해져 발음이 같은 ‘차(茶)’가 되었다. 이후 신농은 약초를 찾다가 중독되면 늘 그 찻잎으로 해독하곤 했다고 한다.16 송(宋)의 나필(羅泌)은 『노사(路史)』에서 염제가 매장된 구체적 지점에 대해 “붕어한 뒤 장사의 끝머리에 매장되었고, 능묘를 차릉이라 불렀다[崩葬長沙之尾, 是曰茶陵]”고 기록했다. 이처럼 그의 능묘를 “차릉(茶陵: 지금의 호남성 차릉현)”이라 일컬은 것도 그가 차(茶)를 처음으로 찾아내어 사용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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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신농씨가 복희씨가 창안한 팔괘(八卦)의 가르침을 중시해 팔팔(八八)의 본질을 탐구하여 64괘(卦)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하여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낙천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틈이 악기를 제작하여 연주하곤 했다. 그럼으로써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문화생활도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때 그가 제작한 악기는 오현금(五絃琴)이란 것이었는데 길이가 약 113cm였고 여기에 다섯 개의 줄을 달아 각각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라는 명칭을 붙였다. 신농씨가 제작한 이 오현금은 고대사회에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전을 가져와 이로부터 아름다운 곡들이 많이 만들어졌다.17 이밖에도 신농은 사람들에게 한낮을 기해 시장(市場)을 열어 물물교환하게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여유 있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여 저마다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어서 생활이 편리해졌다.

 

이와 같이 신농은 인류에게 농기구의 제작과 농경법을 가르쳐 굶주림을 면하게 했고, 약초를 구하여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의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차(茶)를 비롯해 음악과 점서(占筮), 교역법 등을 계발함으로써 인류의 삶과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중국 문화의 원천인 황제와 더불어 신농씨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많이 건설되었다. 섬서성 보계(寶鷄)와 호남성 염릉현(炎陵縣), 호북성 수주(隨州) 등에 있는 염제의 사당과 그와 관련된 명승고적에서 해마다 신농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18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경칩 후 해일(亥日)에 임금이 직접 선농제(先農祭)19를 지내며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였다. 농촌에서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될 무렵이면 그 마을의 상징이며 농신(農神)인 신농씨와 관계된 농기(農旗)에 대한 고사를 지냈다. 이때 그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사명(神農司命)’ 등의 글자를 넣어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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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제님께서는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예시 22절)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인류가 신농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지만 수천 년 전의 신화 속 인물인 신농씨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인류를 위해 베풀어준 은덕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그 업적을 충분히 기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농기나 매약(賣藥)에 “신농유업”이란 글귀를 써 붙임으로써 농업과 의약의 시조로 알려진 신농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 정말로 그가 인류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하루에 수십 차례 중독되면서 약초를 구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신농씨의 혜택을 입었던 모든 신명이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공사를 보셨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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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신농씨가 물려준 업(業). 그가 최초로 사람들에게 농사(農事)짓는 법과 약초로 질병을 치료하는 법을 가르쳤으므로 신농씨가 전한 농업과 의약(醫藥)이란 뜻이다.

02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산동(山東) 사람이다. 공자(孔子)와 같은 무렵 사람으로 본다. 공자가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칭송했다. 노나라에서 사관(史官)을 지냈으며 『좌씨전(左氏傳)』과 『국어(國語)』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서울: 이회문화사, 2010), p.1724]

03 무신년 四월 어느 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 하셨도다.(행록 4장 17절)

04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고대 중국의 신화와 전설적인 인물들의 계보를 저술한 책이다.

05 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진주 강씨 문중(門中)의 계보(系譜) 탐구」, 『대순회보』 73호 (2007), pp.10-12.; 신농 출생에 관해 다른 하나의 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와 곧바로 땅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신농은 태양신 염제의 아들이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빛과 열의 근원이라 믿었기 때문에 하늘의 신인 염제의 아들 신농을 더없이 숭상하였다.[장기근, 『삼황오제의 덕치』 (서울: 명문당, 2003), p.86.p.105]

06 염제라는 명칭은 농경이 처음 시작될 무렵에 화전(火田)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불의 신(神)을 농업 신과 동일시 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관직에 화(火) 자가 붙은 명칭을 사용하고 신농을 태양신과 남방의 불의 작용을 지배하는 신으로 여긴 것도 그 때문이다.[유교사전편찬위원회, 『유교대사전』 (서울: 박영사, 1990), p.832]

07 유안 안길환 옮김 『淮南子 上』, (서울: 명문당, 2001), pp.381-382.

08 『십팔사략』이나 『예기정의』 주석, 『노사후기(路史後紀)』 권3에서 인용한 『춘추명력서(春秋命曆序)』에서는 “염제는 여덟 세대에 걸쳐 5백 20년을 전했다.”고 했고, 『노사』 뒷부분에서는 “여덟 세대, 5백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서욱생(조우연 옮김),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下』(서울: 학고방, 2012), pp.212-213]

09 기원전 21세기경의 중국에서 사방(四方) 제후(諸侯)의 장관을 일컫던 말. 동서남북 4인이 있었으므로 사악(四嶽)이라 하였다.

10 사마천, 『사기 본기』(박일봉 옮김), (서울: 육문사, 2012), pp.19-20.

11 양산윈ㆍ정자룽(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중국을 말하다 1』,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p.38-39; 정재서, 『이야기 동양 신화』 (경기: 김영사, 2010), pp.125-127, pp.191-194; 『朝鮮王朝實錄』, 成宗 7年, 10月 21日.

12 진(晉)나라 때 출간된 『습유기(拾遺記)』에는 이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즉, 신비로운 붉은 새 한 마리가 9개의 이삭이 달린 곡식을 물고 와서 땅 위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염제가 그것을 주워 경작지에 심으니 크고 기다란 곡식이 자랐는데, 신기하게도 그 곡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은 물론이요,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이토세이지(박광순 옮김), 『신이(神異)의 나라 중국의 신화와 전설』, (서울: 넥서스, 2000), p.63]

13 유안(안길환 옮김), 『淮南子 中』, (서울: 명문당, 2001), p.124.

14 진(秦)나라 이전 고대 본초학의 성과를 총 정리한 중국 최고(最古)의 약물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도 신농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책도 현전하진 않지만, 양(梁)나라의 도홍경(關弘景, 456~536)에 의해 집대성되어 그 내용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15 마노 다카야(이만옥 옮김), 『도교의 신들』, (서울: 들녘, 2001), pp.258-260.

16 김선자, 『중국신화 이야기』

(서울: 아카넷, 2004), pp.216-217;

이광주, 『동과 서의 차 이야기』

(서울: 한길사, 2002), pp.29-30.

17 임종욱, 앞의 책, p.852; 양산윈ㆍ정자룽, 김봉술ㆍ남홍화 역 앞의 책, , p.39.

18 위안싱페이, 『중국문명대시야 1』, 장연ㆍ김호림 옮김, (경기: 김영사, 2007), pp.40-42.

19 전근대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농업 관련 제사들이 주목되었는데, 유교적 왕도정치를 강조했던 고려 시대 이후로는 대사(大祀)인 사직제(社稷祭)와 중사(中祀)인 선농제를 중심으로 그 의례를 시행함으로써 민생의 안정과 권농정책의 상징성을 추구하였다.[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봄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5), p.108]

 

 

<대순회보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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