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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황제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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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24 조회7,6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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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개창자 황제(黃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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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黃帝)는 대순진리회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는 『전경』에 언급된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먼저 도주님께서는 전교(傳敎)에서 계해년(1923)을 기점으로 새로운 원년(元年)이 시작됨을 선포하시면서 황제를 인류 역사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하셨다. “4617년 전 정사년에 황제 헌원이 입극하여 이 원을 시작하였다. … 온갖 법식과 일들이 모두 이로부터 시작하였고 모든 법과 책이 전부 이것이 근원이 되었다. 천문·지리·인사는 모두 황제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고 『사기』의 기록도 황제로부터 시작한다.”01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그를 창업군주이자 명장으로 인정하셨다.02 또한 치우가 난을 일으키고 황제가 난을 다스린 자라고 언급하셨다.03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황제는 인류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황제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이룩한 업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황제는 중원 각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중국사에서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와 더불어 화하족(華夏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는 오방위의 신(神) 가운데서 중앙을 다스리는 상제(上帝)로도 불린다.04 황제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견해는 신화적 인물이 역사화되었다는 설이 있고 역사적 인물이 신격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그는 역사성과 신화성이 서로 혼재된 인물인데, 이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과도 그 성격이 비슷하다.

 

고대 인물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은나라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됨에 따라 은대까지는 그 실재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은대 이전의 역사성을 담보하기엔 일부 문헌 자료 이외에는 근거자료가 빈약하므로 현재로서는 일정 부분 신화성의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래서 황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섞여서 존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는 중국 역사에서 주류적 권위를 갖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05를 필두로 하는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 위주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체로 전국시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06을 기점으로 『회남자(淮南子)』07 등에서 보이는 인간의 상상력이 좀 더 짙게 베인 신화적 인물 위주의 관점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주님께서 전교에서 밝히셨듯이 황제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로 보고 있다.

 

황제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왕세기(帝王世紀))』, 『산해경(山海經)』 등에서 나타난다. 황제는 본래 신화나 전설적 인물이었으나 사마천의 『사기』에서 중국 최초의 제왕(帝王)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적 인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후 중국 황하 지역을 점령하여 한족(漢族)의 화하(華夏)문화를 세운 중국의 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황제를 『사기』 「오제본기」를 위주로 한 문헌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겠다.

 

 

 

출생과 시대적 배경

 

중국인의 시조라 추앙받는 황제는 소전(少典)08의 자손으로,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09이라 한다. 그의 어머니는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휘도는 것을 보고 잉태하여 황제를 나았다.10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웠으며,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어서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려서는 영리하고 민첩했으며 자라서는 인정이 두텁고 사리에 밝았다. 이런 그가 성인이 되어서는 지덕(智德)을 갖춘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황제의 시절에는 염제 신농11씨의 세력이 쇠잔하였다. 주변의 여러 제후가 서로 침략하여 정벌하고 백성들을 포악하게 살해했으나 신농씨가 이들을 정벌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마침내 방패와 창을 쓰는 법을 익혀 군대를 훈련하고 정비해서 조공을 바치지 않던 제후들을 정벌하자 그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고 모셨다.

 

 

 

중원 장악을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

 

황제가 중원을 장악하기 전에 염제가 제후들을 침입하여 능욕하려고 했으나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황제는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했으며 계절과 기후를 파악하여 오곡(五穀)12을 심고 만백성을 어루만지며 사방의 제후들을 안정시켰다. 곰·큰곰·비(貔)·휴(貅)13·추(貙)14·호랑이를 훈련해서15 염제와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웠는데,16 힘겨운 전투를 세 번이나 치르고 난 뒤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마침내 황제는 중원의 주인으로 등극하여 천하를 맡았던 염제를 대신하여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염제의 부족장 중에 치우(蚩尤)17라는 맹주가 있었다. 그는 구리와 쇠 같은 무기를 쓰고 짙은 안개를 일으키는 술법을 가지고 있어서 전쟁에 능했다. 황제가 중원을 장악한 후에도 치우는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소집하여 치우와 탁록(涿鹿)18의 들판에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어서 제각기 몸에 얼룩무늬 호랑이 가죽을 걸치고 머리에는 뿔이 돋은 구리투구를 썼으며 손에는 구리칼을 들고서 맹위를 떨쳤다. 치우가 안개를 지어 황제군이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게 교란하여 여덟 차례나 그들을 패퇴시켰다. 이후 치우는 전군을 몰아 황제를 맹추격하였으나 돌연 사방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리며 황제가 매복시킨 맹수 부대가 나타나서 일순간에 치우의 군사를 에워쌌다. 불의의 습격에 당황한 치우군은 혼비백산하여 서로 짓밟으며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홀연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소나기구름이 가득해지니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소나기마저 억수같이 쏟아졌다. 놀란 황제의 군사는 얼굴도 들 수 없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황제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리 개발해 두었던 지남거(指南車)19를 꺼내서 정확한 방향을 찾아내어 추격을 이어갔다. 얼마 후 바람이 멈추고 비도 그치자 황제의 군사는 치우를 겹겹이 둘러쌌다. 치우의 모든 형제와 군사도 전사했고 홀로 남은 치우는 황제군의 선봉장이었던 응룡(應龍)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전쟁은 규모도 크고 기세가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산해경(山海經)』에는 황제와 치우의 탁록 전투를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불꽃 튀는 전쟁 이야기로 묘사하고 있다.

 

 

계곤산이 있어서 이곳에 공공의 누대가 있고 활 쏘는 사람은 감히 북쪽을 향하지 못한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있어 황제의 발이라 불리었다.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응룡으로 하여금 기주의 들판에서 그를 공격하게 했다. 응룡이 물을 모아 두고,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거침없는 폭풍우로 쏟아지게 했다. 그러자 황제가 천녀인 발을 내려 보내니 비가 그쳤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20

 

 

이처럼 황제는 치우를 물리치고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중원을 온전히 차지하게 된다. 『전경』을 보면 상제님께서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난하였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교법 3장 30절)라고 언급하신 구절은 역사적으로 치열했던 이 전투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중화 문명의 개창자로서 중국의 시조

 

황제가 치우를 물리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모셔서 천자로 추대하여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천자에 오를 때 오색구름이 뜨는 길조(吉兆)가 있었기 때문에 벼슬 이름에도 구름 운(雲) 자를 쓰게 되었다. 이후 황제는 천하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가서 그를 정벌하고 평정되면 떠났다. 또한 산을 개간하여 길을 내느라 일찍이 편안히 지낸 날이 없었다.

 

황제가 사방을 개척하며 다스렸던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근접한 환산(丸山)에서 태산(泰山)까지 미쳤다. 서쪽으로는 공동(空桐)에서 계두산(雞頭山)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에서 웅산(熊山)과 상산(湘山)에 도달했다. 북쪽에서는 훈육(葷粥)21을 쫓아내고 부산(釜山)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아 믿음의 증표로 주었던 부절(符節)을 맞추어 본 후 뜻을 같이할 신하로 여기고 탁록산 아래의 넓은 평원에 도읍을 정했다. 당시 황제는 이리저리 옮겨 다녀서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머무는 곳을 군영으로 삼아 호위하였다. 제후들을 감독하는 좌우 대감(大監)을 두었고 각 지역의 나라들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모든 나라가 화평해져서 하늘의 귀신과 땅의 산천에 제사 지내는 봉선(封禪)22도 이와 함께 많아졌다.

 

황제는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내어23 임금의 지위를 상징하는 솥인 보정(寶鼎)을 주조했고 점칠 때 쓰는 나뭇가지인 신책(神策)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그리고 풍후(風后)·역목(力牧)·상선(常先)·대홍(大鴻)을 대신으로 등용해서 백성을 다스렸다. 그는 천지의 법에 순응하여 음양의 변화를 예측하고 죽었을 때와 살았을 때에 행하는 예의를 정했다. 백성들에게 국가 존망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때에 맞게 온갖 곡식과 초목의 씨를 뿌리게 하였다. 그의 후덕한 교화는 새와 짐승과 곤충에게까지 미쳐 이들을 길들였다. 또한, 배와 수레를 만들어 사람들이 잘 다니지 못했던 강과 진흙길을 다닐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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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인가 황제가 꿈에 황하의 큰 물고기가 그림을 등에 지고 나타난 것을 보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의 형상을 찾아냈고 10간(干) 12지(支)의 천문에 관한 책을 지었다. 신하 중 대요(大撓)는 두건이라는 별을 보고 갑자(甲子)를 만들었고, 용성은 역서(曆書)를, 예수는 산수(算數)를 생각해 내었다. 게다가 영륜(伶倫)은 12율(律)의 대나무 피리를 만들어 봉황의 소리를 흉내냈다. 이 피리는 수컷 봉황의 여섯 가지 소리와 암컷 봉황의 여섯 가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또한 열두 개의 종(鐘)을 만들어 각기 다섯 화음을 내도록 하였다. 황제는 사계절을 따라 봄에 씨 뿌려서 가을에 열매를 걷는 방법과 초목을 기르는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또한 왕비 누조(嫘祖)를 통해 누에치기와 풀솜 뜨는 일, 집을 짓고 일용도구를 제작하는 법도 가르쳤다. 기백(岐伯)이라는 명의와 더불어 의술을 연구하여 질병을 피하는 방법을 찾기도 하였다.

 

어느 날 황제는 낮에 잠들어 화서라는 이상향에서 즐겁게 노니는 꿈을 꾸었다. 이에 크게 깨달은 황제는 모든 백성이 꿈속의 세상처럼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일월성신의 역법뿐 아니라 물의 흐름, 흙과 돌, 금과 옥 등의 문물을 두루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항상 백성을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듣고 관찰하였으며, 물불과 수풀의 생산물을 절약하여 쓰도록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토덕(土德)의 상서로움이 있었으므로 황제(黃帝)라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황제는 중국 문명을 개창(開創)한 중국인의 시조로 추앙받아 역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는데, 도주님께서도 전교를 통해 황제가 문명의 시조임을 밝히셨다.24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가 124년 동안 제위(帝位)에 있다가 죽어 교산(橋山)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재되어 있다. 황제에게는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그 성씨(姓氏)를 얻은 자는 열네 사람이었다.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면서 서릉(西陵)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이 사람이 누조였다. 누조는 양잠을 최초로 보급하였다고 전해지며 황제의 정실 부인이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들의 후손도 모두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중 맏아들은 현효(玄囂) 즉 청양(靑陽)이며 강수(江水)의 제후로 봉해졌다. 둘째 아들은 창의(昌意)이며 약수(若水)의 제후로 봉해졌다. 창의(昌意)는 촉산씨(蜀山氏)의 딸 창복(昌僕)을 아내로 맞이하여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고양은 성덕(聖德)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세상을 뜨니 현재의 협서성(陝西省)에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황릉현(黃陵縣)의 교산(橋山)에 장사 지냈다. 황제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인 고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전욱 임금(顓頊帝)이다. 중국인들은 염제와 황제를 중화 민족의 조상으로 믿으며 스스로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자부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최근 이 점을 내세워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보면 황제는 신화적 존재로 알려진 내용들이 역사적 인물에 투영되어 나타난 면들이 있다. 황제 후대에 그가 하나 된 중국의 시조로서 추앙되자 동시대의 모든 문명의 발전사를 황제의 공로로 집중시켜 놓았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천하만국이란 말처럼 중국 전역에 걸쳐 수많은 부족이 다투던 시절에 하나의 통일 부족국가나 성씨는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라는 신화적 인물이 사마천의 『사기』 이후 역사적 실존 인물화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성립될 만하다.

 

그렇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사마천은 각고의 노력과 실증적 사관으로 중국 역사를 고대(古代)부터 제시하고자 했고 사실적 묘사에 엄중한 잣대를 댔기 때문에 『사기』의 상당 부분은 신뢰할 만하다. 또한 다른 적지 않은 문헌들이 황제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시대의 발명 및 문명의 발전을 보장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황제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인류 문명 개창의 중심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지 속에서 도주님께서는 인류 문명의 시조로서 황제의 위상에 대해 언급하시며 새로운 원년이 시작됨을 선포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황제가 인류 문명의 기원을 이루어 선천 세상을 열어나갔다면 이제 대순진리회 도인들은 상제님의 해원상생의 대도로써 후천의 지상천국을 열어나가야 하겠다.

 

 

 

【참고문헌】

『典經』

『사기(史記) 』

『산해경(山海經)』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왕세기(帝王世紀)』

『회남자(淮南子)』

民衆書林編輯局, 『漢韓大字典』, 서울: 民衆書林, 2000.

대순종교문화연구소, 「황제 헌원씨(皇帝 軒轅氏)」, 《대순회보》 53호.

최의중, 「만화: 치우와 황제」, 《대순회보》 155호.

최의중, 「만화: 삼황오제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대순회보》 165호.

김선자,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서울: 책세상, 2007.

백양, 『맨얼굴의 중국사』 1, 김영수 옮김, 서울: 창해, 2005.

樊樹志, 『100가지 주제로 본 중국의 역사』, 김지환ㆍ이병인ㆍ이영옥ㆍ이호현 옮김,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8.

사마천, 『사기본기(史記本紀)』,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7.

사마천, 『사기본기』, 박일봉 역저, 서울: 육문사, 2012.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조우연 엮음, 서울: 學古房, 2012.

신성곤ㆍ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서해문집, 2004.

위안커, 『중국신화사』 上, 김선자ㆍ이유진ㆍ홍윤희 역,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0.

저우스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중국사』, 김영수 옮김, 파주: 돌베개, 2006.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파주: 김영사, 2010.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十八史略)』, 소준섭 엮음, 서울: 미래사, 2004.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 편집부 편역, 서울: 자유문고, 1992.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01 동방에서의 창세』, 양산췬ㆍ정자룽, 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 軒轅立極肇斯元. 按, 黃帝距今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上元甲前計算),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總此源. 按, 天文地理人事, 皆黃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亦自黃帝始也….”(교운 2장 26절); 해석은 교무부, 「전교 統會의 연대와 그 관련 역사」, 《상생의 길》 3호를 참고함.

02 공사 1장 34절 참조.

03 교법 3장 30절 참조.

04 황제(黃帝)는 오행(五行)중에서 토(土)에 해당하며 흙을 뜻하는 누런색[黃]이며, 보좌하는 땅의 신은 후토(后土)이다. 얼굴이 사방(四方)의 네 개여서 모든 방위를 살필 수 있었다. 사마천, 『사기본기(史記本紀)』,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7), p.32 참조.

05 중국 역사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세계 최초의 통사이다.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이 상고시대의 오제(五帝)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태초 년간(기원전 104~101년)에 이르기까지 약 2,600년간의 역사를 중국 최초의 기전체로 서술하여 총 130권으로 기록했다.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보려는, 전(前) 한대(漢代)에 지배적인 대일통(大一統) 사관에 입각해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로서의 타고난 재능과 엄정한 시각으로 역사 속에 명멸했던 제왕과 제후, 그와 관련된 일반 영웅적 인물들을 인간적 감성과 중국 전역의 현장조사를 통한 객관적 실제성을 겸비한 중국 역사서의 최대 걸작이라 평가된다.

06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집(神話集)이자 지리서(地理書)이다. 대체로 작자는 하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라는 설과 기원전 3~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이라는 설, 무당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설도 있다. 중국과 변방 지역의 기이한 사물, 인간, 신들에 대한 기록과 그들에 대한 그림이 함께 실려 있어 고대 중국의 신화의 세계와 자연관을 이해하는데 중요시된다.

07 중국 전한의 회남왕이 지은 책으로 노장도가(老壯道家) 사상을 핵심으로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ㆍ유가(儒家)ㆍ법가(法家) 등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08 고대 중국 유웅씨(有熊氏) 부락의 부족장.

09 황제가 헌원이란 언덕에 살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불리었다.

10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十八史略)』: “黃帝軒轅氏 公孫性 母見大電繞北斗樞星 感而生帝.”

11 중국 고대에 신화적 인물이 역사로 자리 잡았다고 파악된다. 신화적으로는 불의 신으로 남방 지역을 다스렸으며 그를 보좌하는 신 역시 불을 다스리는 축융(祝融)이다.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졌으며 태어날 때 아홉 군데의 샘물이 솟구쳤다고 한다. 중국에서 고대 전설상의 제왕으로도 기억되어 농사와 의약의 신(神)으로 모셔진다.

12 기장ㆍ피ㆍ통ㆍ보리ㆍ쌀의 다섯 가지 곡식을 말한다.

13 표범의 일종으로 수컷을 ‘비’ 암컷은 ‘휴’라고 부른다.

14 개만한 크기로 호랑이와 유사한 맹수로 이리라고도 불린다.

15 곰ㆍ큰곰ㆍ비(貔)ㆍ휴(貅)ㆍ추(貙)ㆍ호랑이는 전쟁에 동원된 조련된 맹수들로 보기도 하고 이들 이름을 사용한 용맹한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16 염제 후손들의 부족 세력들과 싸운 것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17 치우천황(蚩尤天皇)으로도 알려져 있고 중국 역사상 전쟁의 신으로 모셔지며 그 외모는 전쟁 신답게 머리는 구리로 되어 있고 이마는 쇠로 이루어져 있고 뿔이 달려 있었다 한다. 염제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각종 무기를 잘 만들었고 용맹이 뛰어났다고 칭송받는다.

18 중국 하북성(河北省) 장가구(張家口)에 있는 현(縣).

19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는 신선(神仙)의 목상(木像)이 달린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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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위 인용문은 위안커, 『중국신화사』 上, 김선자ㆍ이유진ㆍ홍윤희 역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0, pp.122~123)의 번역을 인용함.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有係昆之山者, 有共工之臺, 射者不敢北鄕. 有人衣靑衣, 名曰黃帝女魃.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21 북방에 거주하던 부족을 가리키며 훈육(薰鬻)으로도 불린다. 하(夏)나라 때는 훈육(薰育), 주(周)나라 때는 험윤

(獫狁), 진한(秦漢) 때는 흉노(匈奴)라고 불리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마천 지음, 『사기본기(史記本紀)』,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7), p.34 참조.

22 중국의 봉건적 제왕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일을 천지에 알리기 위해 산동성의 태산(泰山)에서 행하던 국가적 제사의식이다. 봉(封)과 선(禪)은 각각 다른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고 생각된다. 산 정상에서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봉(封)이라 하고, 산록에서 땅에 드리는 제사를 선(禪)이라고 하였는데, 두 의식을 하나로 합쳐서 봉선의 제전이 성립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사전연구사, 『종교학대사전』, 1998 참조.

23 하늘에서 얻었다는 설도 있음.

24 교운 2장 26절.

 

<대순회보 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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