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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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06 조회6,842회 댓글0건본문
중국에서 최초의 문명 형성과 출현을 암시하는 이야기는 삼황(三皇)·오제(五帝)에서 시작된다. 그중에서 제곡(帝嚳)은 오제 가운데 세 번째 제왕이다. 오제의 전설은 여러 계통이 있어 오제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기술에 따라 대체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오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01 이들은 모두 상고(上古) 시대의 전설과 신화 속에서 중국 문명의 창시자로 나온다. 『전경』에 도주님께서는 「전교(傳敎)」를 통해 인류 역사의 시기마다 성인(聖人)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한 사실을 밝히셨는데, 제곡은 효(囂: 소호)·욱(頊: 전욱)·훈(勛: 요)·화(華: 순)·우(禹)와 함께 초통(初統)의 초회(初會)에 등장하는 인물이다.02 문명을 열었던 상고 시대의 역사에서 제곡과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신화·설화를 다룬 『산해경(山海經)』, 『수신기(搜神記)』, 『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서 그와 연관된 전설이 소략하게 전해온다.
생애와 업적
그의 성(姓)은 희(姬)이고 이름은 준(俊)이다. 제곡의 아버지는 교극(蟜極)이고 교극의 아버지가 현효(玄囂)이며 현효의 아버지가 바로 황제(黃帝)다. 그의 어머니는 거인의 발자국을 밟아 제곡을 낳았으며, 그는 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준(俊)”이라 말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덕행이 고상하고 재능이 있어 천하에 이름을 드높였다.03
제곡은 15세 때부터 당시 제왕인 전욱을 도와 공을 세우고 고신의 제후로 봉해져 호를 고신씨(高辛氏)라 불렀다. 그는 30세에 전욱의 뒤를 이어 제위에 등극해 도읍을 지금의 중국 하남성 상구시(河南省商丘市) 일대인 박(亳)으로 정했다.04 제곡이 도읍을 박으로 옮긴 이유는 황하(黃河)의 홍수를 피하여 백성들을 재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의 천도(遷都)로써 주변 씨족세력들의 위협에 대응하여 군대를 전장에 투입하기 편리해졌다. 그 후 제곡은 공공(共工)05씨의 세력을 소탕하고 황하 중상류부터 장강 중상류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외적인 견융족(犬戎族)06을 물리친 이후에는 내치에 집중하여 여러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다스리기 전 백성들의 생활방식은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단순한 것이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으나 농사와 관련된 절기(節氣)를 구분할 방법이 없어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제곡은 천문 현상을 관찰하여 만물의 변화 법칙에 따라 절기를 구분하였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이 절기에 따라 농경 생활을 적절하게 도모하도록 지도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또한 그는 매 절기의 일들을 꼼꼼히 계획하고 신에 대한 제사도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이 같은 행동은 모두 하늘의 뜻에 따르고자 한 것이다.
제곡은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각종 노래와 악기를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악사(樂師)인 함흑(咸黑)에게 구초(九招)·육렬(六列)·육영(六英) 등의 노래를 만들게 하고 유수(有垂)에게 비(鼙)·고(鼓)·종(鐘)·경(磬)·취(吹)·영(苓)·관(管)·훈(壎)·지(篪)·도(鞀)·추(椎)·종(鐘) 등의 악기를 제작하게 했다.07 이 곡조에 맞추어 연주하게 하니 새들이 날아와 춤을 추어 제곡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08
▲ 제곡릉
그는 땅에서 재물을 취하되 아껴 썼고 백성을 다독거리며 가르치되 이롭게 이끌었다. 널리 베풀되 자신의 이익은 꾀하지 않았으며 총명하여 먼 곳의 일을 알고 세세한 부분까지 살폈다. 하늘의 뜻에 따르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인의와 위엄을 아울러 쓰니 백성들이 믿고 따랐다.09
제곡은 105세까지 장수하여 70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10 그가 붕어하자 고신에서 장사지냈다고 한다. 현재의 제곡릉(帝嚳陵)은 그의 고향으로 알려진 중국 하남성 상구시에 위치해 있으며 하남(河南), 안휘(安徽), 강소(江蘇), 산동(山東)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의 참배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제곡의 후예
제곡은 이후 중국 고대 제왕의 시조(始祖)들을 등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곡의 부인은 네 명이며 이들의 후대가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어느 날 제곡은 점을 쳐서 그의 네 부인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흡족해했다.11
기(棄)는 제곡의 첫째 부인인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原)이 낳았다. 강원은 들에 놀러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맞추어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은 후 임신한다. 마침내 그녀는 달이 차자 이상한 살덩어리를 낳았으나 끔찍한 생각이 들어 그것을 골목길에 버렸더니 말과 소가 피해갔다. 다시 얼음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날개로 덮어 보살폈다. 강원이 신기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아이를 버렸다고 해서 이름을 ‘기(棄)’라 불렀다.12 그가 바로 후직(后稷)으로 주왕조(周王朝)의 시조가 되었다.
설(契)은 둘째 부인인 유융씨(有娀氏)의 딸 간적(简狄)이 낳은 아들이다. 어느 봄날에 간적이 두 여동생을 데리고 강에서 미역을 감는데 그들의 머리 위로 현조(玄鳥)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그녀는 알을 삼키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설이며 아주 총명하고 어질었다. 설은 장성해서 우(禹)가 치수사업을 할 때 공을 세운다. 순(舜)임금 때 그는 교육의 책임자인 사도(司徒)가 되었다가 훗날 상(商) 땅에 봉해져 상(商)나라의 시조가 되었다.13
요는 제곡의 셋째 부인인 진풍(陳豐)씨의 딸 경도(慶都)가 낳은 아들로 이름은 ‘방훈(放勛)’이다. 어느 날 경도는 황하 강변을 거닐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적홍색의 거대한 용이 흩날리는 바람을 마시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태어난 내력이 특이한 만큼 생김새도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눈썹은 거꾸로 쓴 팔자 모양이었고 색깔 또한 다채로와 ‘요미팔채(堯眉八彩)’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훗날 화하(華夏) 역사상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제요(帝堯)이다.14
지(摯)는 넷째 부인인 상의(常儀)가 낳은 아들이다. 비록 생모의 지위는 낮았으나 제곡의 아들 중 장자(長子)로서 제위를 이어받았다. 한때 지는 정사를 돌보지만 재능이 평범하여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나 동생 방훈(放勛)은 자신의 봉읍을 흥성하게 발전시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다. 백성들의 믿음을 잃은 지는 방훈에게 제위를 양보하게 되었다.15
제곡 관련 전설
전설에 따르면 제곡의 딸과 결혼한 ‘반호(槃瓠)’는 신화적 인물로 오색찬란한 털을 가진 신비스러운 개(犬)였다고 한다. 그가 중국 중원 지역을 둘러싼 이민족 중 남만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산해경(山海經)』과 『수신기(搜神記)』 등에 나타나 있다.
제곡의 제위 시절에 화하(華夏)족은 주위의 이민족들과 전쟁이 잦았다. 그중 서융(西戎)족은 중원지역을 자주 침입하였는데 제곡은 수차례 정벌에 나섰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는 고심 끝에 견융족의 수장인 오장군(吳將軍)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 황금과 많은 땅을 나누어 주고 그의 딸을 주겠다는 방(榜)을 붙인다.
그때 제곡에게는 오색찬란한 털을 가진 반호라는 개가 있었다. 그날 밤 반호는 견융족의 진영으로 달려가 오장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물어 죽이고 머리를 물고 돌아왔다. 신하들은 개에게 좋은 먹이를 주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하려 하였으나, 공주가 제곡에게 천하를 향하여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아뢰었다. 제곡은 고민 끝에 딸의 결혼을 허락했고, 반호는 제곡의 딸과 예식을 치른 후 그녀를 업고 초목이 무성하고 인적이 드문 남산 깊숙이 들어갔다. 제곡은 딸을 너무 그리워하여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 천지가 진동하여 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호와 제곡의 딸은 남산에서 생활하면서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두었다.
반호가 죽자 제곡의 딸은 중원으로 돌아와 힘들었던 생활상을 아버지 제곡에게 고하자 사람을 보내 딸의 후손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폐쇄적인 환경에서 생활하여 화하족(華夏族)과 생활습관이 너무나 달랐다. 그들은 험한 산길에는 익숙하였으나 평지를 걷는 것에는 힘들어하였다. 심지어 말도 전혀 달라 함께 살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제곡은 그들의 이런 습성을 측은히 여겨 중원 남부의 산지 일부를 하사하였다. 반호의 후손들이 번성해 인구가 점점 많아지자 그들을 ‘만이(蠻夷)’라 불렀다. 현재 중국 남방의 요족(瑤族)·사족(畲族) 등 소수민족들에게는 이러한 반호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곡의 신화는 역사적 실재성을 확실히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관련 기록에 드러나 있는 농경의 발전, 제위의 계승 방식 등은 대체로 문명의 과도기에 일어났을 것 같은 내용이다.16 이러한 점에서 제곡은 인류 문명의 여명기에 이상적인 정치를 베풀어 태평성세를 이룬 성왕(聖王)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전경』
『사기(史記)』
『산해경(山海經)』
『제왕세기(帝王世紀)』
사마천, 『완역 사기본기』, 「1권」, 김영수 옮김, 파주: (주)알마, 2013.
여불위, 『여씨춘추12기ㆍ上』, 정영호 해석, 서울: 자유문고, 2004.
이근명(李瑾明) 편역, 『中國歷史』, 「상권」, 서울: 도서출판 신서원, 2012.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1.동방에서의 창세』, 양산췬ㆍ정자룽, 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신성곤ㆍ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서해문집, 2004), p.23 참고.
02 교운 2장 26절, “傳囂頊嚳勛華禹, 初統初會世世聖.”
03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참고.
04 『제왕세기(帝王世紀)』, “帝嚳, 高辛氏, 帝王世紀曰, 帝嚳, 姬姓也. 其母不覺, 生而神異, 自言其名曰. 齒並 齒, 有聖德. 年十五而佐顓頊, 三十而登帝位. 都亳, 以木承水.”
05 전설 속 염제 신농씨의 후예로 비교적 큰 씨족 부락의 수장이다. 당시 황제의 자손 부락 간에 패권 쟁탈이 치열하여 전쟁이 빈번했다.
06 고대 중국 서쪽 지방인 협서(陝西)ㆍ산서(山西) 지역에 거주한 이민족이다.
07 중국 고대 악기들의 이름으로 비(鼙)는 군대에서 쓰던 작은 북, 고(鼓)는 전통적인 북, 도(鞀)는 두 귀가 달린 북, 경(磬)은 옥ㆍ돌ㆍ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타악기를 말한다. 취(吹)ㆍ영(苓)ㆍ관(管)ㆍ지(篪) 등은 고대의 관악기이다.
08 『여씨춘추(呂氏春秋)』, 「중하기(仲夏紀)ㆍ고악(古樂)」, “帝嚳命咸黑作為聲歌: 九招, 六列, 六英. 有倕作為鼙鼓鐘磬吹苓管壎箎鞀椎鍾. 帝嚳乃令人抃或鼓鼙, 擊鐘磬, 吹苓展管箎. 因令鳳鳥, 天翟舞之. 帝嚳大喜, 乃以康帝德.”
09 『완역 사기본기』, 「1권」, 김영수 옮김 (파주: 알마, 2013), pp.205-206 참고.
10 『제왕세기(帝王世紀)』, “帝嚳,高辛氏,… 在位七十年, 年一百五歲而崩.”
11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1.동방에서의 창세』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68 참고.
12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권4, “周後稷, 名棄, 其母有邰氏女, 曰姜原, 姜原爲帝嚳元妃, 姜原出野, 見巨人跡, 心忻然說, 欲踐之, 踐之而身動如孕者, 居期而生子, 以爲不祥, 棄之隘巷, 馬牛過者皆辟不踐;徙置之林中, 適會山林多人, 遷之;而棄渠中冰上, 飛鳥以其翼覆薦之, 姜原以爲神, 遂收養長之, 初欲棄之, 因名曰棄.”
13 앞의 책, 「은본기(殷本紀)」, 권3, “殷契, 母曰簡狄, 有娀氏之女, 爲帝嚳次妃, 三人行浴,見玄鳥墮其卵, 簡狄取呑之, 因孕生契. 契長而佐禹治水有功. 帝舜乃命契曰:「百姓不親. 五品不訓. 汝爲司徒而敬敷五敎. 五敎在寬.」封于商, 賜姓子氏. 契興於唐, 虞, 大禹之際, 功業著於百姓, 百姓以平.”
14 앞의 책, 「오제본기(五帝本紀)」, “帝嚳娶陳鋒氏女, 生放勛.”;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1.동방에서의 창세』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88 참고.
15 앞의 책, 「오제본기(五帝本紀)」, “娶娵訾氏女, 生摯. 帝嚳崩, 而摯代立. 帝摯立, 不善(崩), 而弟放勛立, 是為帝堯.”
16 『中國歷史』, 이근명 편역 (서울: 신서원출판사, 2002), p.53 참고.
<대순회보 1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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