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처서(處暑) 절후를 관장하는 후군집(侯君集)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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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12 조회6,286회 댓글0건본문
전쟁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후군집
후군집(侯君集, ?~643)은 빈주 삼수[州三水, 현재 섬서성(陝西省) 빈현(彬縣)]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이세민을 섬겨 그를 따라 원정과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후군집은 그 공으로 좌우후(左虞候),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연이어 임명되고, 전초현자(全椒縣子)에 봉해졌다.
626년[무덕(武德) 9] 6월 4일 이세민은 고조 이연의 다음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타도하였다. 후군집은 이 현무문 정변에서도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6월에 황태자가 된 이세민이 8월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양위(讓位)를 받아 황제에 오르니 그가 당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당태종은 즉위한 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하여 후군집을 좌위장군(左衛將軍)에 임명하고 노국공(潞國公)에 승진시켜 봉하니 식읍(食邑)이 1,000호(戶)였다.
630년[정관(貞觀) 4] 후군집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尙書)를 맡아 조정에 참여하였다.
당태종이 즉위하고 당의 내정은 급속히 안정되었다. 내정의 안정을 바탕으로 당나라는 외부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634년(정관 8)에 접어들자 토욕혼(吐谷渾)의 모용복윤(慕容伏允)이 변방을 노략질하자 당태종은 이들을 토벌하기로 하고 이미 노병(老病)을 이유로 은퇴한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불러 들였다. 12월 당태종은 이정을 토욕혼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휘하에 5총관을 통솔케 하였다. 당시 병부상서였던 후군집은 5총관의 하나인 적석도행군총관(積石道行軍總管)으로 토욕혼 원정에 참가하였다. 당의 원정군은 선주(州)에 집결하여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후군집은 신속한 진군을 주장했다.
“우리 군대가 이미 도착했는데 적군이 험난한 지역으로 도망가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입니다. 지금 정예부대로 그들이 예상치 못한 곳을 기습한다면 저들은 우리의 근심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아군의 이익이 클 것입니다. 만일 적군이 계곡 사이로 도망가 우리 군에 대항한다면 실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정이 후군집의 계책을 수용했다. 원정군 중에서 용감한 병사를 선발하여 이들의 장비를 가볍게 하고 토욕혼 군을 끝까지 추격했다. 당군은 토욕혼군을 고산[庫山, 장산(山) 청해 서녕시의 서남쪽]에까지 좇아가 크게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휴사성(休俟城)01까지 진군하였다. 토욕혼의 모용복윤은 대비천(大非川)02까지 후퇴하면서 전통적인 청야전술(淸野戰術)로 대응했다. 들판에 있는 모든 풀을 태움으로써 당군의 전마(戰馬)들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그 자신은 경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사막지대로 후퇴한 것이다.03
당군은 다시금 전략 수립을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장수들의 의견은 양론(兩論)으로 갈렸다. 그 하나는 토욕혼의 청야전술로 마초(馬草)가 부족하고 봄의 풀이 아직 돋아나지 않았으니 말들이 허약한 상태이고 이미 병사들이 지쳐 있어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후군집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승세(勝勢)를 타고 있을 때 공격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번의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후군집의 주장을 총사령관 이정이 받아들였고 당군은 마침내 토욕혼을 평정할 수 있었다.
637년(정관 11) 당태종이 21명의 제왕(諸王)들과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 후군집을 포함한 14명의 공신들에게 그 직위를 자손들에게까지 세습할 수 있도록 하는 세습자사(世襲刺史)의 조서를 내렸다. 이때 후군집에게는 진주자사(陳州刺史)의 벼슬이 내려졌다.
당태종의 이러한 조치는 뭇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4공신의 한 사람이었던 장손무기와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 등도 적극 반대했다. 세습자사의 명단에 오른 14명의 공신들은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 이정, 고사렴[高士廉, 경칩(驚蟄) 절후를 관장], 후군집, 이도종(李道宗), 이효공[李孝恭, 소한(小寒) 절후를 관장], 울지경덕[尉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 이세적[李世勣, 소설(小雪) 절후를 관장], 단지현[段志玄, 입하(立夏) 절후를 관장], 정지절[程知節, 추분(秋分) 절후를 관장], 유홍기[劉弘基, 소만(小滿) 절후를 관장], 장량[張亮, 입추(立秋) 절후를 관장]이다.
당태종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세습자사의 조칙(詔勅)은 철회되었지만 후군집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되었다.
후군집은 본래 군인 출신으로 용맹을 떨쳐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배움과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귀한 신분이 되자 스스로 책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후 후군집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일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등급을 매김에 있어 공정하게 처리하여 인망이 높았다.
638년(정관 12) 토번(吐蕃)04이 송주(松州, 사천성 송반현)를 침략하여 포위하였다. 당태종은 후군집을 당미도(當彌道)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이들을 격퇴할 것을 지시했다.
639년(정관 13) 당태종은 후군집을 교하도(交河道)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고창국(高昌國)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고창은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토로번시(吐魯番市) 남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당과 서역의 나라들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당시 국제 무역의 관행은 당에 조공을 취하는 형식이었다. 입공(入貢) 사신들의 행렬에 상인들이 동행하면서 상호간의 물품을 거래하면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당의 입장에서는 대국으로서 조공을 받기만 하고 사신단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당연히 당의 물품이 사신단의 선물로 제공되었다. 무역의 형식은 조공이었지만 중국과의 무역은 이해 당사국들의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이득을 가져왔다.
이런 과정에서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취하던 고창이 전년(前年)인 정관 12년부터 서역의 나라들이 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서역의 물품이 고창에서 정지되면 서역의 물품들을 필요로 하는 중국의 상인들이 고창으로 몰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고창의 이득은 더욱 증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고창이 취한 태도로 인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한 고창국은 지리상의 이점을 믿고 방심하고 있었다. 고창의 왕인 국문태(鞠文泰)는 당의 움직임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나라는 우리 땅으로부터 칠천 리나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풀도 나지 않는 사막으로 모래와 자갈이 이천 리나 펼쳐져 있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듯하고 여름바람은 불태우는 듯하다. 장사하는 이들도 100명이 출발하면 하나가 이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군(大軍)이 당도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당군이 우리 성 밑에 당도한다 해도 20일이면 그들의 식량이 다하여 후퇴할 것인데 그때 사로잡으면 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는데 고창국은 지리적 이점을 너무 과신하였다. 당나라 초기 군사적 전략은 상대방에게 대응의 시간을 허용치 않는 신속한 진군이었다. 후군집은 그러한 전략의 효용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장수였다. 당군이 신속하게 움직여 후군집의 원정군이 사막 입구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창왕 국문태는 너무나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국지성(麴智盛)이 이어 즉위했다.
후군집이 유곡(柳谷, 신강성 합밀시 동쪽)에 진영을 치고 있는데 정찰병을 풀어 고창의 사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고창왕 국문태의 장례식이 치루어 질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후군집에게 그 틈을 타 습격할 것을 청했다.
후군집은 반대했다.
“불가(不可)하다. 천자께서는 고창국이 교만하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하늘의 벌을 받들어 대신 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지금 저 사람들이 장례 중에 있는데 이들을 습격한다면 이는 죄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후군집이 이끄는 당군은 북을 치며 진군했다. 고창의 도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로 7,000명을 사로잡았다. 고창의 도성 아래에 도착한 후군집은 성을 에워싸고 사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고창은 거부했다. 고창은 이전 국왕인 국문태가 서돌궐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유사시에 대비했다. 당군의 내습에 서돌궐이 구원군을 보내 줄 것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당군의 기세에 놀란 서돌궐은 서쪽으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국지성은 더 이상의 항전의지를 잃고 후군집의 군문에 항복했다. 고창을 평정한 후군집은 비석을 새겨 공적을 기념해 놓고 고창왕 국지성과 여러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당태종이 고창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니 당의 영토는 크게 넓어졌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 당시 당의 영토는 동서로는 9,510리이고 남북으로는 19,118리였다.05
<대순회보>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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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금의 청해호(靑海湖) 서안(西岸) 포합하(布哈河) 하구(河口) 부근.
02 청해성(靑海省) 청해(靑海) 서쪽에 있는 하천.
03 당의 토욕혼 원정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하는 이정(李靖) 3」(『대순회보』 94호)를 참조.
04 지금의 티벳 지역에 있던 나라. 당나라 초기 서역(西域)을 제패하여 중국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나 당 이후 점점 쇠퇴하여 청(淸) 세종[世宗, 재위(在位; 1723~1735)] 이후 번속국(蕃屬國)이 됨.
05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21』 당(唐)시대Ⅱ, 도서출판 삼화, 2009,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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