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수 신명장(張) 별을 관장하는 장궁(臧宮)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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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2 조회6,263회 댓글0건본문
장수(張宿)
장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여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다섯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5개로 상징 동물은 사슴[鹿, 梅花鹿]이다. 장수의 속성(屬性)은 달[月]이다. 장수의 5개 별은 주작의 모이주머니로 인식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작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형상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장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장월록성군(南方張月鹿星君)이라 하는데 얼굴 생김새가 노루와 닮았고 머리에 노루와 같이 뿔이 있으며 붉은색 갑옷을 입고 있으며 강편(鋼鞭, 쇠몽둥이)이 무기라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장궁
장궁(臧宮, ?-58)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군옹(君翁)으로 영천군(潁川郡) 겹현(郟縣, 현재 하남성) 사람이다. 장궁은 젊어서 현의 정장(亭長), 유요(游徼)가 되었는데 정장과 유요는 도둑을 잡아들이는 말단 관리였다. 구체적으로 10리(里)를 1정(亭)이라 했는데 그 정을 다스리는 관리를 정장이라 했으며, 유요는 모든 향(鄕)에 설치한 것으로 도둑의 체포와 순찰을 담당한 관리였다.
장궁의 생애는 전한(前漢)-신(新,8~23)-후한(後漢)으로 왕조가 연이어 교체되는 혼란기에 걸쳐있다. 전한을 타도하고 신을 건국한 왕망 정권이 급속하게 와해되면서 중국 전역이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광무제 유수의 후한 건국 이후에야 수습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왕망에 대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 될 때에 장궁 또한 친구들을 이끌고 하강병(下江兵)에 가담하여 교위(校尉)가 되었다. 하강병 역시 당시에 일어났던 많은 반란의 무리 가운데 하나인 녹림군(綠林軍)의 일파02이다. 하강병이 남양 유씨들과 연합하면서 장궁은 유수와 함께 출전하게 되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그의 용기를 칭찬했다. 유수는 장궁이 말이 적으면서도 부지런한 것을 보고 그를 매우 친밀히 대했다. 유수가 경시제의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할 때에 장궁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는데,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적들의 진영을 흩트려 물리쳤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즉위 이후 장궁을 시중(侍中)에 임명하고,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장궁을 성안후(成安侯)에 봉했다. 이듬해 장궁은 돌격(突擊)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정로(征虜)장군 좨준(祭遵)과 함께 열양(涅陽), 려(酈)에서 경시제가 임명한 좌방(左防), 위안(韋顔)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29(건무 5)년에 장궁은 군대를 이끌고 강하(江夏)를 순시하고 대향(代鄕), 종무(鐘武), 죽리(竹里)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광무제는 태중대부(太中大夫) 장명(張明)에게 명하여 장궁을 보위(輔威)장군에 임명토록 하였다. 31(건무 7)년 장궁은 다시 기사후(期思侯)에 봉해졌으며, 양군(梁郡)과 제음(濟陰)을 쳐서 모두 평정시켰다.
35(건무 11)년에 장궁은 군대를 이끌고 중로(中盧)에 이르러 낙월(駱越)에다 주둔시켰다. 이때에 공손술(公孫述, ?-36)03이 전융(田戎), 임만(任滿)을 거느리고 정남(征南)대장군 잠팽(岑彭)과 형문(荊門)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잠팽이 불리했다. 잠팽이 불리하자 월인(越人)들이 촉(蜀)의 공손술을 따르려고 했다. 장궁 또한 거느리고 있는 병력이 적어서 힘으로는 월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때마침 장궁군의 진영으로 속현(屬縣)에서 수레 수백 승(乘)을 보내왔다.
장궁은 이를 이용하기로 하고 야음(夜陰)을 틈타 톱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자르게 하고 수레들을 성 주변을 계속해서 돌게 하여 수레 구르는 소리가 새벽까지 울리게 했다. 월인의 척후병들은 성문의 턱을 자를 정도로 많은 수레가 왔는데 그 소리가 새벽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한나라의 대병(大兵)이 온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했다. 이에 그 우두머리가 장궁의 진영에 소[牛]와 술을 바쳐 장궁군을 위무했다. 장궁은 소를 잡고 술을 내어 휘하 장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격려하였다. 낙월 지역은 이 일로 인해 안정을 찾게 되었는데 장궁의 기지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장궁과 잠팽이 형문에서 공손술군을 격파하고 별도로 수작산(垂鵲山)을 거쳐 도로를 통해 자귀(秭歸)로 나와 강주(江州)에 이르렀다. 잠팽이 파군(巴郡)을 함락시키고 장궁으로 하여금 항복한 병사 5만을 거느리고 부수(涪水)로부터 평곡(平曲)으로 가게 했다.
공손술의 장수 연잠(延岑, ?-36)04은 침수(沈水)에 주둔하면서 병력을 크게 늘렸다. 이때 장궁군은 병사의 숫자는 많고 식량이 부족했다. 게다가 보급이 부족하여 항복한 병사들이 모두 도망가려고 하였다. 장궁군에 보급이 부족했던 것은 주변의 군읍(郡邑)이 관망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루의 수비를 강화하면서 공손술과 한나라의 싸움을 관망하고 있을 뿐 일방적으로 어느 편에 서려하지 않았다. 장궁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으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한나라 군대가 떠나면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공손술의 세력권에 편입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장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광무제가 장궁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잠팽에게로 가라고 하면서 말 700필을 보내주었다. 임기응변에 능했던 장궁은 이때를 기회로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주로 새벽과 밤에 진군했다. 이후에 깃발을 무성하게 세우고 북을 울리면 산을 오르게 하는 한편 우측으로는 보병(步兵)을, 좌측으로는 기병(騎兵)을 배치하고 장궁 자신은 배를 타고 인솔했는데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연잠은 한나라 군대의 진군이 이렇게 빠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연잠이 산에 올라서 한나라의 군세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장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란에 빠진 연잠군을 추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연잠군 가운데 목이 베이고 익사한 자가 만여 명에 달해 강물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연잠이 공손술의 본거지인 성도(成都)로 달아나자 그의 병사들이 모두 투항했다. 장궁은 연잠군의 전마(戰馬)와 보물을 모두 포획했다. 광무제가 새서(璽書)를 내려 장궁의 노고를 치하하고 관리와 병사들에게 붉은 비단 6천 필(匹)을 하사했다. 장궁이 승세를 타고 공손술군을 추격하니 투항한 자가 10여 만에 달했다.
장궁의 군대가 평양향(平陽鄕)에 이르자 공손술의 장수 왕원(王元)이 군대를 이끌고 와 투항했다. 장궁군은 진격을 거듭하여 면죽(緜竹), 부성(涪城)을 차례로 격파하고 공손술의 동생 공손회(公孫恢)를 처단했다. 계속해서 다시 번현(繁縣), 비현(郫縣)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까지 공손술군으로부터 대장군의 부절(符節) 5개, 인수(印綬) 1,800개를 빼앗았다. 이때 대사마 오한(吳漢) 또한 승승장구로 진격하여 성도로 가고 있었다. 장궁은 대성(大城)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진군했는데 병마와 정기(旌旗)가 매우 많았다. 장궁은 병거(兵車)를 타고 소락곽문(小雒郭門)으로 들어가서 성도성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공손술군이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는 해도 성도는 그들의 본거지였다. 그들의 성 앞으로 군대를 이끌고 지난다는 것은 장궁군의 힘을 과시하는 무력시위였다. 장궁이 오한의 병영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즐거운 회합을 가졌다. 오한이 장궁을 만나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장군이 적의 성 아래를 지나면서 맹렬한 기세로 신과 같은 위엄을 떨치었으나 궁지에 몰린 도적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병영으로 귀환할 때는 다른 길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오한의 말은 당연한 지적이었지만 장궁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장궁으로선 공손술군을 향해서 재차 무력시위를 한 것이었는데, 공손술군은 감히 도발하지 못했다. 병영으로 돌아온 장궁은 함문(咸門)05을 공격하여 오한과 더불어 드디어 공손술을 멸했다.
광무제는 촉 지방이 평정된 공을 높이 사서 장궁을 광한(廣漢) 태수에 임명했다. 37(건무 13)년에 광무제는 장궁의 식읍을 늘여 다시 찬후(酇侯)에 봉했다. 39(건무 15)년 장궁이 광무제의 부름에 응해 경사로 돌아와 열후(列侯)로 봉조청(奉朝請)06 했는데, 다시 낭릉후(郞陵侯)에 봉해졌다. 42(건무 18)년에 장궁은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43(건무 19)년 무당인 유사(維汜)의 제자 단신(單臣)과 부진(傅鎭)이 요언(妖言)을 지어 무리를 형성하고 원무성(原武城)에 들어가 관리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칭하기를 장군이라고 했다. 이에 광무제는 장궁으로 하여금 북군(北軍)과 여양영(黎陽營)의 병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서 포위하게 했다. 도적들은 비축된 양식이 많아서 수차에 걸쳐 공격했음에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았고 도리어 병사들만 죽고 다쳤다. 광무제가 공경(公卿)과 여러 후왕(侯王)들을 불러 좋은 계책을 물었는데 한결같이 현상금을 후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때 광무제 다음으로 후한의 2대 황제가 된 명제(明帝)는 동해왕(東海王)이었는데 독대(獨對)하여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요무(妖巫)와 서로 대치하고 있지만 저들의 기세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저들 가운데 후회하면서 도망치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포위망이 너무 견고해 도망을 못가고 있을 뿐입니다. 의당 포위망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그들이 도망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도망간다면 정장(亭長) 한 명만으로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광무제가 동해왕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궁에게 포위망을 조금 풀도록 칙서를 내렸다. 예상대로 적의 무리가 흩어져 달아나고 단신과 부진을 참수할 수 있었다. 장궁이 돌아오자 광무제는 그를 성문교위(城門校尉)로 옮기고 다시 좌중랑장(左中郎將)으로 옮겼다. 그 후 장궁은 무계적(武谿賊)을 공격하였는데 강릉(江陵)에 이르러 이들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장궁은 근면하고 신의가 두터운데다 성품이 소탈하여 늘 임용되었다. 후에 흉노(匈奴)가 기근과 전염병으로 시달리다 내부 분쟁이 일어났다. 광무제가 장궁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을가를 묻자 장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컨대 5천 기(騎)만 주신다면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늘 싸움에서 이기는 병가(兵家)라도 적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짐이 더 생각해 보리다.”
51(건무 27)년에 장궁이 양허후(楊虛侯) 마무(馬武)와 함께 광무제에게 서찰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흉노는 이(利)를 탐함에 도무지 예절이나 신의가 없어 자신들이 궁(窮)하면 머리를 숙이고 스스로 좀 편안해지면 침노해 들어오니 변방에 해독(害毒)을 입음이 자못 크고, 중국(中國) 또한 그 소요로 우려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현재 흉노는 사람과 가축이 병나거나 죽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피해로 그들의 땅이 적지(赤地)가 되었습니다. 저들의 지친 힘으로는 우리의 한 군(郡)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만리 밖에 나가 죽음으로 명을 받드는 일이 이제 폐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복(福)은 거듭하여 오지 않으며 때는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문덕(文德)만 고집하시고 무사(武事)는 등한시하려 하십니까? 장수들로 하여금 변방에 가게 하여 현상금을 후히 하는 한편 고구려(高句麗), 오환(烏桓), 선비(鮮卑)에 알려 흉노의 왼쪽을 치게 하시고 하서(河西)의 사군(四郡)07과 천수(天水), 농서(隴西), 강호(羌胡)에서 징발하여 흉노의 왼쪽을 공격하게 하시옵소서. 이와 같다면 몇 년 안에 북쪽 오랑캐는 멸하고 말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어지시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시고 또 모신(謀臣)들이 의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만세(萬世) 동안 돌에 새길 공(功)을 폐하의 대에 세우지 못하게 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장궁은 흉노의 힘이 약해진 지금이 흉노 정벌의 기회이니 이때를 놓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황석공기(黃石公記)』08에 이르길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제압할 수 있고, 약한 것은 굳센 것을 이길 수 있다[유능제강 약능제강(柔能制剛 弱能制彊)]고 했소, 부드러운 것이란 덕이며 굳센 것이란 적(賊)을 의미하는 것이고, 약한 것이란 인(仁)의 도움을 얘기하는 것이며 굳센 것은 원망의 귀착지를 뜻하는 것이오.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임금은 즐거운 것으로 백성을 즐겁게 해주고 덕이 없는 임금은 즐거운 것으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한다고 했소, 백성을 즐겁게 해주면 그 즐거움 오래될 것이지만 군주가 자기 자신을 즐기는 경우라면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이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한다면 수고롭기만 할 뿐 득이 없을 것이며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한다면 편안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오. 편안한 정치엔 충신이 많고, 힘든 정치엔 어지러운 사람이 많은 법이오. 그래서 이르기를 땅을 넓히기로 힘쓰는 자는 피폐하게 될 것이라 했고 덕을 넓히기에 힘쓰는 자는 강성하게 될 것이라 했소. 자기들 가질 것만 가지는 자는 편안하지만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자는 잔멸(殘滅)될 것이오. 잔멸된 정치는 비록 이루어진다 하여도 반드시 패하게 될 것이오. 지금 나라에는 선정(善政)이 없고 재변(災變)이 끊이질 않아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람마다 제 몸 온전히 하기도 어렵거늘 다시금 어찌 원정을 도모한단 말이오?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계손(季孫)의 근심이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그의 담장 안에 있을까 두렵다[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09 하셨소. 북적(北狄)은 오히려 강성하니 둔전(屯田)을 하면서 경비할 것이며, 전하는 이야기는 늘 대부분 사실을 갖추지 못하였소. 진실로 천하의 반을 들어서라도 큰 도적을 멸망시킬 수만 있다면 어찌 지극히 원하지 않겠소? 진실로 그때가 아니니 백성들을 쉬게 하는 것만 못하오.”
광무제의 조서 이후에 제장들은 군대에 관한 일을 다시는 거론하지 않았다. 장궁은 58[영평(永平) 1]년에 생을 마감했는데 시호(諡號)를 민후(愍侯)라 했으며, 아들 장신(臧信)이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51.
02 왕망의 실정으로 녹림산에 굶주린 백성들이 모여들면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망이 파견한 정부군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스스로를 녹림군이라 칭한 것이다. 그런데 22년 녹림군에 대규모 역질이 발생하고 죽는 자들이 많아지자 녹림군은 해산하고 이들 중 왕상(王常)과 성단(成丹)이 이끄는 부대가 서쪽으로 가서 호북성 강릉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을 하강병이라 했다.
03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제(更始帝)가 선 이후 경시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장군(輔漢將軍)이라 칭하고 촉군태수(蜀郡太守)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니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
04 남양(南陽, 현재 하남성 남양) 사람.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주변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진풍(秦豊)과 연합하였다가 진풍이 패하자 공손술(公孫述)에 투항하여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다. 36(建武 12)년, 오한(吳漢)이 촉(蜀)을 평정할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연패하였다. 공손술이 죽자 항복했고 처형되었다.
05 성도성의 북쪽에 면한 동두문(東頭門).
06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
07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금성(金城)의 사군(四郡)
08 전한(前漢)의 건국 공신인 장량(張良)이 하비(下邳, 江蘇省 睢寧縣)에 도망가 살 때 만난 신비의 노인으로부터 받은 책이다. 『사기(史記)』를 보면 이때 장량이 받은 책을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고 했는데 『후한서』의 주석(註釋)에는 단지 장량이 하비 이교(圯橋, 흙다리)에서 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노인을 일러 황석공(黃石公)이라 한 것은 그가 장량에게 책을 주면서 한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이 스승이 될 수 있으며, 10년 후에는 그 뜻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13년 뒤에 너는 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山東省 東阿縣 동북)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이니라.”
09 공자가 말한 계손은 당시 노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던 최고 실력자 가문인 계씨의 수장 계환자(季桓子)를 의미한다. 그가 노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인 전유를 정벌하려고 할 때 공자가 그 부당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로 계씨의 가신이었던 염유(冉有)는 “전유의 성곽이 견고하고 그 땅이 계씨의 땅과 가까워서 반드시 후세 자손들의 근심이 될 것”이라고 하며 정벌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공자는 전유의 말에 대해 “나는 계손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않고 그의 담장 안에 있을까 두렵다”고 한 것이다. 이후에 과연 공자의 예측대로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난을 일으켜 계환자를 감옥에 가두게 된다. 항상 한나라에 큰 근심을 안겨주던 흉노가 내부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때에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자는 제장들의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광무제는 당시 정세에서 흉노 정벌보다는 내치(內治)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강조한 것이다. 그는 공자의 말을 빌어 더 이상 백성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정벌은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논어(論語)』 16, 「계씨(季氏)」참조).
<대순회보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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