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수 신명익(翼) 별을 관장하는 마무(馬武)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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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09 조회5,909회 댓글0건본문
익수(翼宿)
익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일곱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여섯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22개인데 별자리의 구성이 날아오르는 주작의 날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별자리의 이름을 ‘익(翼)’이라고 하며, 상징 동물은 뱀[蛇]이다.
익수의 속성(屬性)은 화(火)이며 익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익화사성군(南方翼火蛇星君)이라 하는데 그의 용모는 괴이(怪異)하고 화염(火焰) 문양이 장식된 검은색 도포를 입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마무
마무(馬武, ?-61)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자장(子張)으로 남양군(南陽郡) 호양현(湖陽縣, 현재 河南省 唐河 西南) 사람이다. 마무는 젊은 시절에 원수(怨讐)를 피해 강하(江夏)에서 살았다.
마무의 생애는 전한(前漢)-신(新,8~23)-후한(後漢)으로 왕조가 연이어 교체되는 혼란기에 걸쳐있다. 전한을 타도하고 신을 건국한 왕망(王莽, BCE 45-CE 23)02 정권이 급속하게 와해되면서 중국 전역이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왕망 집권 말에 경릉(竟陵), 서양(西陽)의 삼로(三老)03가 군(郡)의 경계에서 병사를 일으키니 마무도 이에 가담했다. 후에 마무는 녹림군(綠林軍)04으로 들어가 마침내 유수의 군대와 연합하였다. 경시제가 집권하고 마무를 시랑(侍郞)으로 삼았는데, 마무는 유수와 함께 곤양대전(昆陽大戰)을 통해 왕망이 파견한 왕심(王尋)의 대군을 격파했다. 이후에 경시제는 마무를 진위(振威)장군에 임명하여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 ?-25)05과 함께 왕랑(王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수가 한단(邯鄲)을 수복하고 사궁과 마무를 청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사궁을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랑을 정벌한 이후 이미 자신만의 독자세력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유수에게 경시제와의 대립은 불가피했고 그 측근인 사궁은 제거대상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유수는 마무와 함께 총대(叢臺)06에 올라서 조용히 마무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양(漁陽), 상곡(上谷)의 돌격기병을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싶은데 장군의 생각은 어떠한가?”
마무가 대답했다.
“저는 미련하고 겁이 많으며 계략이 부족합니다.”
유수가 말했다.
“그대는 오랫동안 장군으로 있으면서 병사(兵事)에 익숙하니 어찌 나의 연사(掾史)07들과 똑같겠소?”
유수가 마무에게 ‘어양, 상곡의 돌격 기병을 맡기고 싶다’고 한 것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당시 어양, 상곡 군단의 핵심인 돌격 기병은 그 향배에 따라 천하의 대세가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군단이었다. 유수의 하북 평정에 큰 걸림돌이었던 왕랑도 ‘어양, 상곡의 병력을 징발하겠다고 공언’했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돌격 기병은 적의 진영을 돌파하는 임무를 가진 군대로 일반적인 기병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처럼 중요한 군대의 지휘권을 맡기겠다고 한 것은 유수가 얼마나 마무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마무는 유수의 말을 듣고 그에게 귀의(歸依) 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는데, 유수는 인재를 알아보고 제대로 평가함으로써 그들에게서 충성을 이끌어 내었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유수가 앞서 제거하고자 한 사궁이 오한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마무는 사견(射犬)으로 달려가 유수에게 스스로 투항했다. 유수는 마무를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유수가 잔치를 베풀어 여러 장수들을 위로할 때마다 마무가 일어나 술을 따르니 유수는 매우 즐거워하였다.
유수가 우래(尤來), 오번(五幡)을 공격하다가 신수(愼水)에서 패하였는데 마무가 홀로 후진에 남아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니 적들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유수군이 진군하여 안차(安次), 소광양(小廣陽)에 이르렀는데, 마무는 항상 군의 선봉대가 되어 적들을 격파하고 평곡(平谷), 준미(浚靡, 하북성 遵化縣의 서북)까지 끝까지 추격한 후 돌아왔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유수는 제위에 오르라는 제장(諸將)들의 요청을 세 번의 사양 끝에 수락했다. 이때 마무는 제장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위에 오를 것을 주장했는데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천하에 주인이 없습니다. 성인(聖人)이 쇠잔한 세상에 나셔서, 비록 공자가 재상(宰相)이 되고 손자(孫子)가 장수가 된다고 해도 오직 효능이 없고 무익(無益)할까 두렵습니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후회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대왕(大王, 유수)께서 비록 겸양하셔서 물러나시려 하지만 종묘와 사직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마땅히 계(薊, 북경시 大興縣)에서 돌아오셨으니 존위(尊位, 황제)에 오르시어 정벌을 의논하십시오. 지금 누구를 도적이라 하면 달려가서 그를 칠 것입니까?”
광무제가 즉위한 후, 마무를 시중(侍中), 기도위(騎都尉)로 삼고 산도후(山都侯)로 봉하였다. 28(건무 4)년 광무제는 마무로 하여금 호아(虎牙)장군 합연(蓋延)과 함께 유영(劉永, ?-27)08을 토벌토록 했는데, 마무는 별도로 제음(濟陰)을 공격하여 성무(成武), 초구(楚丘)를 함락시키고 포로(捕虜)장군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방맹(龐萌,?-30)09이 모반하여 도성(桃城, 산동성 濟寧縣 북쪽)을 공략하니 마무가 먼저 싸워 깨뜨렸는데 때마침 광무제의 군대가 도착하여 방맹이 마침내 패주하였다.
30(건무 6)년 여름, 마무는 광무제의 명령으로 건위(建威)대장군 경감(耿弇)과 함께 서쪽으로 외효(隗囂, ?-33)10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군세가 불리하여 병사를 이끌고 농(隴)으로 후퇴하였다. 외효가 급히 추격하자 마무가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뒤로 돌아가 막으면서 몸소 갑옷을 입고 창을 지고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이니 외효의 군대가 마침내 패퇴하여 한나라의 원정군은 장안(長安)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37(건무 13)년 광무제는 마무의 식읍을 늘려주고 유후(鄃侯)로 봉하였다. 마무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하곡양(下曲陽)에 주둔하면서 흉노(匈奴)에 대비하였다. 이때 마무는 군리(軍吏)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소환되어 처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무는 지름길로 낙양(洛陽)으로 나아가서 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쳤다. 마무는 식읍(食邑) 오백 호(戶)를 삭감 당하고 양허후(楊虛侯)로 봉해진 후 조정에 남아 봉조청(奉朝請)했다.11
광무제가 여러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서로 이야기 하면서 물었다.
“경(卿)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작위와 녹봉이 어디에까지 이르게 되었을지 말해보라”
고밀후(高密侯) 등우(鄧禹)가 먼저 대답하였다.
“신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였으니 군(郡)의 문학박사(文學博士)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광무제가 말했다.
“무슨 말을 그리 겸손히 하오. 경은 등씨의 자손으로 지행(志行)을 갈고 닦았으니 어찌 공조(功曹)12가 될 수 없겠는가?”
나머지 신하들도 각기 차례로 대답하였는데 마무의 차례가 되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무용(武勇)으로써 도위(都尉)가 되어 도적들을 인솔할 수 있습니다.”
광무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도적들의 수령이 될 게 아니라 정장(亭長)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오.”
마무는 그 위인이 술을 좋아하고 활달해서 어디서라도 거리끼지 않고 말했다. 그는 어전(御前)에서도 취하면 같은 반열(班列)에 있는 신하의 체면을 깎고 그 장단점을 들추어내면서도 조금도 기피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광무제는 그를 방임해 두고 즐거운 오락으로 삼았다. 광무제는 비록 공신들을 제어하긴 하였으나 그들에게 범법행위가 있어도 용서해 주고 소소한 잘못은 덮어 주었다.
광무제는 먼 지방에서 진귀한 재화나 음식을 바쳐 오면 반드시 두루 열후(列侯)들에게 먼저 하사하였으므로 선물(膳物)을 관장하는 태관(太官)13은 텅 비어 있었다. 광무제는 공신들에게 공이 있으면 매번 식읍(食邑)과 상록(賞祿)을 늘려 주었지만 관직에 임용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광무제의 공신들은 복록을 보전하면서도 주살(誅殺) 당하거나 쫓겨나는 자가 없었다.
49(건무 25)년 중랑장 마무는 병사를 거느리고 무릉(武陵), 만이(蠻夷)를 공격하였는데 돌아와서 인수를 바쳤다.
광무제가 죽고 2대 명제(明帝, 27-75)가 즉위한 58(영평 원년)년 서강(西羌)이 농우(隴右)에 침입하였다. 명제는 마무를 포로장군에 임명하고, 중랑장 왕풍(王豊)의 보좌로서 감군사자(監軍使者) 두고(竇固), 우보도위(右輔都尉) 진흔(陳訢)과 함께 오환(烏桓), 여양영(黎陽營)의 군대, 삼보(三輔)에서 모집한 병사, 양주(涼州) 여러 군(郡)의 강호(羌胡) 병사 및 죄수들을 거느리고 합계 4만 병사로 서강을 공격하게 하였다. 마무는 서강과 금성군(金城郡) 호미현(浩亹縣)에서 싸워서 6백 명을 베었다. 또 낙도곡(洛都谷) 전투에서도 다시 천 명을 처단하여 서강을 패퇴시켰다. 서강이 병사를 이끌고 변방으로 후퇴했는데 마무가 다시 추격하여 동한(東邯), 서한(西邯)에서 대파하고 4,600명을 참수하고 1,600명을 생포하니 그 나머지 무리들은 한나라에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마무는 군대를 정돈하고 장안으로 돌아오자 명제는 그에게 식읍 700호를 늘여주니 그의 식읍은 1,800호가 되었다. 마무는 61(永平 4)년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아들 마단(馬檀)이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53.
02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3 한(漢)나라 때에 한 고을의 교화(敎化)를 맡아보던 쉰 살 이상의 노인.
04 녹림산에 모여든 굶주린 백성들이 세력이 커지면서 왕망이 파견한 군대와 대적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서 스스로를 녹림군이라 칭했다.
05 자(字)는 자장(子張)으로 남양(南陽)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유현에 투항하여 그가 경시제가 되자,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다. 유수가 하북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마무(馬武)와 함께 왕랑을 공격했고 일찍이 같이 우래(尤來)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래 경시제의 사람이어서 유수와는 갈등 관계였다. 유수는 그를 제거하고자 했고 오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무령총대(武靈叢臺). 하북성(河北省) 한단(邯鄲)에 있는 대(臺)로 전국(戰國) 시대 조(趙)나라 무령왕이 군사연습을 관람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07 연리(掾吏), 하급관리.
08 22년 경시제(更始帝)에 귀순하여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경시제의 정치가 혼란하자 동헌(董憲), 장보(張步)와 연합하여 성을 공략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여 천자를 자칭했다. 26(건무 2)년 광무제가 합연(蓋延)을 파견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다음해인 27(건무 3)년 부장 경오(慶吾)에게 피살되었다.
09 산양(山陽, 현재 산동성 金鄕 西北) 사람. 처음에는 하강병(下江兵)과 함께 거사하여 유현(劉玄)이 경시제가 되자 기주목(冀州牧)에 임명되었다.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과 함께 왕랑(王郎)을 격파하였다가 사궁이 패망하자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평적(平狄)장군에 봉해져서 합연(蓋延)과 함께 동헌(董憲)을 공격했다. 29(건무5)년 반란을 일으켜 동헌, 유우(劉紆), 교강(佼彊) 등과 합세하니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섰다. 다음해인 30년 오한에 의해 토벌되고 참수되었다.
10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30(건무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32(건무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11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
12 군(郡)의 인사, 행정담당관으로 군리(郡吏)의 임면(任免) 및 상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리.
13 진(秦)나라에서 설치된 것으로 한나라에도 계승되었다. 궁중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제사나 연회 때의 요리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대순회보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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