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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진(軫) 별을 관장하는 유융(劉隆)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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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0 조회6,2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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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軫宿)

 

 

진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여덟 번째 마지막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일곱 번째 마지막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상징 동물은 지렁이[蚓]이다. 진수의 속성(屬性)은 수(水)이며, 주작의 꼬리에 해당한다. 고대(古代)에는 ‘천거(天車)’라고도 칭했으며, 진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진수인성군(南方軫水蚓星君)이라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유융

 

유융(劉隆, ?-57)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원백(元伯)으로 남양(南陽) 안중후(安衆侯)의 종실(宗室) 사람이다. 왕망(王莽, BCE 45-CE 23)02이 집권하고 있을 시기인 거섭(居攝) 연간에 유융의 아버지 유례(劉禮)가 안중후 유숭(劉崇)과 함께 병사(兵士)를 일으켜 왕망을 주살(誅殺)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숭의 거병(擧兵)은 거섭(居攝) 원년인 CE 6년의 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중후 유숭이 재상 장소(張昭)와 모의하여 말하였다

 

“안한공(安漢公) 왕망은 반드시 유씨(劉氏)를 위태롭게 할 것인데, 천하가 그를 비난하지만 감히 먼저 거사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곧 종실(宗室)의 수치이다. 내가 종족을 거느리고 먼저 나선다면 해내에서 반드시 화답할 것이다.”

 

장소 등을 따르는 사람 100여 명이 마침내 나아가서 완(宛, 하남성 南陽市)을 공격하였는데 들어갈 수 없어서 패하였다.03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유숭의 거병은 왕망에 대한 최초의 반란으로 주목할 사건이었다. 여기서 잠시 왕망에 의한 전한(前漢) 전복과정을 살펴보자. 왕망은 전한의 대표적인 외척가문 출신으로 11대 황제인 성제(成帝) 때에 대사마로 발탁되었다. 왕망은 12대 황제인 애제(哀帝)가 BCE 1년에 죽고 당시 9살이던 평제(平帝)를 옹립하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CE 1년 왕망의 지위는 이미 황제와 다름없었고 그의 딸은 평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왕망은 자신이 옹립한 평제를 평제 즉위 5년 뒤인 CE 6년에 독살하고, 그 자신은 가황제(假皇帝)가 되었다. 이후 왕망은 선제(宣帝)의 현손(玄孫)인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평제의 황후였던 그의 딸이 황태후가 되면서 그의 세력기반은 더욱 굳건해졌다. 왕망이 부명(符命)04으로 여론을 조작하여 CE 8년 신(新)을 건국하기까지 그의 전한 전복과 왕위 찬탈 계획은 치밀했다. 따라서 왕망에 대한 반란은 안중후 유숭의 모반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유융은 아직 일곱 살이 되기 전이어서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유융은 나이가 들어 장안(長安)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왕망의 반란 세력들과 남양 유씨들이 연합하여 옹립한 경시제(更始帝)05가 집권했는데 경시제는 유융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하였다. 이때 유융은 잠시 휴가를 얻게 되어 고향의 처자를 데려다 낙양에 살게 하였다.

 

이 당시 유수는 경시제의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해가고 있었다. 유융은 유수가 하내(河內, 하남성 武陟縣)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견(射犬, 하남시 沁陽縣)으로 달려가 그에게 투항했다. 유수는 유융을 기도위로 삼고 풍이(馮異)와 함께 경시제의 명령으로 낙양을 수비하던 주유(朱鮪)06, 이질(李軼, ?-25)07을 막게 하였다. 이 시기 경시제와 유수의 관계는 더 이상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유수는 하북 평정을 통해 독자 세력을 확보해가는 과정이었고, 경시제는 난국을 수습할 만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욱이 유수가 경시제의 소환에 불응하면서 이들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이때 유수와 경시제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질이 낙양에 남아 있던 유융의 처자를 처단한 것이다.

 

유융은 그 아버지 대에는 왕망에 반기를 들다가 그를 제외한 일족이 죽임을 당했고, 그 자신도 광무제를 따르다가 처자가 죽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그와 그의 집안은 나라를 위해 2대에 걸쳐 충성을 다한 가문인 것이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유융을 항부후(亢父侯)로 봉하고 28(건무 4)년 다시 주로(誅虜)장군에 임명하여 이헌(李憲)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유융이 이헌을 평정하자 광무제는 유융을 무당현(武當縣)으로 보내 둔전(屯田)케 하였다. 35(건무 11)년 광무제가 유융을 남군(南郡) 태수에 임명하니, 일 년여 후에 그는 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쳤다. 37(건무 13)년에는 광무제가 유융의 식읍(食邑)을 늘려주고 다시 경릉후(竟陵侯)로 봉했다. 그런데 그 해에 실시된 조사에서 간전(墾田)08이 대부분 실제대로 보고되지 않았으며 호구(戶口) 조사도 해마다 차이가 발생했다. 국가 운영의 근본이 되는 인구와 토지에 관한 조사가 부정확한 것은 그 자체로 중대 사안이었다.

 

39(건무 15)년 광무제는 주군(州郡)에 명령을 내려 간전과 호구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보고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보고를 맡은 자사(刺史), 태수(太守)들에게 간전과 호구 조사는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국가의 조사에서 누락된 토지와 인구는 주로 고위 관리나 이들과 연관이 있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에게 귀속된 토지와 인민은 국가의 재산이 아닌 자신들의 개인 재산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고위관료들이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호족(豪族)들은 보호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였으므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길을 막고 울부짖었다.

 

광무제의 명령으로 여러 군(郡)에 파견된 사신들이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 가운데 광무제의 눈길을 끄는 문건이 있었다. 그것은 진류(陳留) 땅의 관리가 쓴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영천(潁川), 홍농(弘農)은 조사해도 되지만 하남(河南), 남양(南陽)은 조사해서는 안 된다.”

 

광무제가 관리를 불러다 문건을 얻은 곳을 물으니 관리가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고 장수가(長壽街)에서 주었다고 대답했다. 황제에게 소환된 관리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당시 이 일에 연루된 인사들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광무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자신의 질문에도 황당한 발언으로 상황을 모면하려한 관리를 보고 분노했다. 마침 광무제를 이어 후한의 2대 황제가 되는 명제(明帝)가 동해공(東海公)으로 12살이었는데 장막 뒤에서 진언했다.

 

“관리는 군(郡)의 칙령을 받아서 간전(墾田)을 공평히 헤아리기만 할 뿐입니다.”

광무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하남, 남양은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동해공이 대답했다.

“하남은 황제의 성(城)으로 근신(近臣)들이 많고, 남양은 황제의 고향으로 근친(近親)들이 많아서 그들의 밭과 집이 법제(法制)를 넘어서도 법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광무제가 호분장(虎賁將)09을 시켜 그 관리를 힐문(詰問)하게 하니 동해공의 말과 같았다. 이에 광무제가 알자(謁者)10를 파견해서 실상을 조사하니 그간의 부패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40(건무 16)년 유융이 이 일에 연루되어 하옥(下獄) 당했는데 그 일당 10여 명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광무제는 유융이 공신이었던 것을 참작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것으로 사면(赦免)해 주었다.

 

41(건무 17)년 광무제는 서인(庶人)이었던 유융을 다시 부락향후(扶樂鄕侯)로 봉하고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복파(伏波)장군 마원(馬援)을 도와 교지(交阯), 만이(蠻夷), 징측(徵側)을 치게 하였다. 유융은 마원과 별도로 금계구(禁谿口)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인 징이(徵貳)를 생포하였으며 천 명의 적을 베고 2만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유융은 개선(凱旋)하여 다시 대국(大國)에 봉해지고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이 죽자 유융은 표기(驃騎)장군이 되어 대사마의 일을 보았다. 유융이 법제를 받들고 행실과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공무(公務)를 맡은 지 8년 후, 장군의 인수를 바치고 물러나니 광무제는 소[牛]와 상준주(上樽酒) 백 말을 하사하였다. 이후 유융은 열후(列侯)로서 봉조청(奉朝請)11 하였다. 54(건무 30)년 광무제는 유융을 신후(愼侯)로 봉했다. 유융은 57(中元 2)년에 생을 마감했는데, 시호(諡號)를 정후(靖侯)라 하였고 아들 유안(劉安)이 뒤를 이었다.

 

후한 건국에 공훈을 세운 28장의 초상이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모셔지게 된 것은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 때의 일이다. 60(영평 3)년 명제는 한나라를 중흥시킨 28장의 초상을 남궁 운대의 벽에 그려놓게 하였다. 등우[鄧禹, 각(角) 별을 관장]가 처음이고, 다음으로 마성[馬成, 항(亢) 별을 관장],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 왕양[王梁, 방(房) 별을 관장], 가복[賈復, 심(心) 별을 관장], 진준[陳俊, 미(尾) 별을 관장],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 구순[寇恂, 우(牛) 별을 관장], 부준[傅俊, 여(女) 별을 관장], 잠팽[岑彭, 허(虛) 별을 관장], 견담[堅鐔, 위(危) 별을 관장], 풍이[馮異, 실(室) 별을 관장], 왕패[王覇, 벽(壁) 별을 관장],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 임광[任光, 루(婁) 별을 관장], 좨준[祭遵, 위(胃) 별을 관장], 이충[李忠, 모(昴) 별을 관장], 경단[景丹, 필(畢) 별을 관장], 만수[萬脩, 자(觜) 별을 관장], 합연[蓋延, 삼(參) 별을 관장], 비융[邳肜, 정(井) 별을 관장], 요기[銚期, 귀(鬼) 별을 관장], 유식[劉植, 유(柳) 별을 관장], 경순[耿純, 성(星) 별을 관장], 장궁[臧宮, 장(張) 별을 관장],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이다. 이들 28장의 초상 이외에 왕상(王常), 이통(李通), 두융(竇隆), 탁무(卓茂)의 초상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흥 28장은 이전 시대에는 하늘의 28수(宿)에

응(應)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자세하지 않다.

(중략)

영평 연간에 현종께서 이전 시대의 공신들을 생각하고 감회에 젖었다.

이에 28장을 남궁 운대에 그리도록 하였는데 이들 이 외에

왕상, 이통, 두융, 탁무 모두 합하여 32인이다. 그 본래의 차례에 의거하여

편말에 부기하고 이로써 공신들의 순서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태부고밀후등우 중산태수전초후마성

대사마광평후오한 하남윤부성후왕양

좌장군교동후가복 낭야태수축아후진준

건위대장군호치후경감 표기대장군참거후두무

집금오옹노후구순 적노장군곤양후부준

정남대장군무양후잠팽 좌조합비후견담

정서대장군양하후풍이 상곡태수회릉후왕패

건위대장군격후주우 신도태수아릉후임광

정노대장군영양후좨준 예장태수중수후이충

표기대장군역양후경단 우장군괴리후만수

호아대장군안평후합연 태상영수후비융

위위안성후요기 효기장군창성후유식

동군태수동광후경순 횡야대장군산상후왕상

성문교위낭릉후장궁 대사공고시후이통

포로장군양허후마무 대사공안풍후두융

표기장군신후유융 태부선덕후탁무12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55.

02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3 사마광 지음·권중달 옮김, 『자치통감4』, 도서출판 삼화, 2009, 409쪽.

04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주는 표로 한나라 때는 누가 제왕이 된다고 하는 천명(天命)에 부응하는 징조로 여겨졌다.

0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그들에 의해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회양(淮陽, 현재 하남성 회양)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기에 왕광(王匡)과 더불어 녹림산(綠林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22년 군대를 나누어 남양을 공격하면서 신시병(新市兵)이라 칭했다. 경시제가 즉위하고 난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이질(李軼)과 함께 관동(關東)을 진압하고 낙양을 지키며, 당시 경시제와 다른 독자세력화의 길을 걷던 유수에 대항했다. 25년 유수에 항복하여 평적(平狄)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후에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寶貨·음식을 관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작위는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07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市) 사람. 후한의 건국 공신인 이통(李通)의 사촌동생. 신나라 말기에 유수, 이통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왕망의 장수 견부(甄阜), 양구사(梁丘賜)을 격파했다. 경시제(更始帝)가 집권한 이후에 경시제에게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을 죽이라고 촉구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후 경시제에 의해 무음왕(舞陰王)에 봉해졌다.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한 이후 경시제 정권이 붕괴하자 다시 유수에게 항복하고자 했으나 주유(朱鮪)에게 피살되었다.

08 전지(田地)를 개간함 또는 개간한 전지.

09 호분(虎賁)은 날래다는 뜻으로 천자(天子)를 호위하는 군사 또는 용사를 이르는 말이다.

10 사방에 사신(使臣) 가는 벼슬.

11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

12 中興二十八將 前世以爲上應二十八宿 未之詳也.

(中略)

永平中, 顯宗追感前世功臣, 乃圖畫二十八將於南宮雲臺, 其外又有王常, 李通, 竇融, 卓茂,

合三十二人. 故依 其本第係之篇末, 以志功臣之次云爾.

太傅高密侯鄧禹 中山太守全椒侯馬成

大司馬廣平侯吳漢 河南尹阜成侯王梁

左將軍膠東侯賈復 琅邪太守祝阿侯陳俊

建威大將軍好畤侯耿弇 驃騎大將軍參蘧侯杜茂

執金吾雍奴侯寇恂 積弩將軍昆陽侯傅俊

征南大將軍舞陽侯岑彭 左曹合肥侯堅鐔

征西大將軍陽夏侯馮異 上谷太守淮陵侯王覇

建威大將軍鬲侯朱祐 信都太守阿陵侯任光

征虜大將軍潁陽侯祭遵 豫章太守中水侯李忠

驃騎大將軍櫟陽侯景丹 右將軍槐里侯萬脩

虎牙大將軍安平侯蓋延 太常靈壽侯邳肜

衛尉安成侯銚期 驍騎將軍昌成侯劉植

東郡太守東光侯耿純 橫野大將軍山桑侯王常

城門校尉郎陵侯臧宮 大司空固始侯李通

捕虜將軍楊虛侯馬武 大司空安豊侯竇融

驃騎將軍愼侯劉隆 太傅宣德侯卓茂

 

(『後漢書』 卷二十二, 「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第十二)

 

 

<대순회보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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