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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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3 조회5,750회 댓글0건본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송시열은 천지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를 세움으로 부터 시작 되었느니라.』
<교무부>
송시열(1607년~1689년)은 17세기 조선조 주자학의 대가로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조의 정사(正史)「조선왕조 실록」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3000여회) 하기도 하는 우암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미수(眉搜) 허목(許穆)등과 같이 산림(山林)으로서 진출한 인물이다.
송시열의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 11월 12일 옥천(沃川)의 구룡촌(九龍村)에서 수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관하여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 마을 앞 적등강(赤登江)이 까닭 없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더니 우암이 출생하자 다시 전과 같이 강물이 흘렀으며, 모친은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고 우암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또한 경헌공은 공자가 제자(弟子)를 거느리고 집에 온 꿈을 꾸었다 하여 그의 소자(小字)를 성뢰(聖雷)라 하였다. 우암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친은 그가 태어날 때에 좋은 징조가 있었고 재기(才氣)가 또한 특이하였기 때문에 항상 원대한 포부를 가지도록 가르쳤다. 또한 주자학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우암은 성현(聖賢)의 학문을 평생의 과업으로 할 것을 결심하였다. 우암이 22세 되던 해(1628년)에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연산(蓮山)에 은거하던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1년 후 사계가 죽자 사계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으로부터 계속 정주학(程朱學)을 배웠다.
우암은 인조11년(1633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 하여 그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떠나 먼 곳에 있을 수 없다하여 곧 돌아왔다.이후 인조 13년에 후일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師傅: 임금의 아들을 교육하던 시강원의 정일품 벼슬)가 되어 대군과의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던 중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우암은 어가(御駕)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청국과 화의(和議)가 이루어지는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볼모로 가게 되자 우암은 통곡을 하며 성을 나와 속리산으로 들어가 노모를 모시며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관직을 수 차례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효종은 이전에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설욕하여 민족의 자주를 꾀하고 새로운 조정을 이끌어 나갈 인물을 찾게 되었다. 그런 대상을 효종은 산림에서 공부하며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존중하는 유림과 호란에 순절한 집안의 자제 중에서 물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사계의 아들이자 유림의 종사(宗師)이며 호란(胡亂)에 순절한 가문의 자손이기도 한 김집을 등용하였고 이에 김집은 그의 문하에서 우암과 동춘(송준길) 그리고 초려 이성태(李性泰)를 추천하였다. 특히 우암에 대해 효종은 「구시사부 염염지회 우절우중(舊時師傅念念之懷尤切于中: 옛적 사부라서 생각마다 마음에 간절하다)」「고지뢰학문지력 조유지식 막비석일 순절지공(孤之賴學門之力 租有知識 莫非昔日 淳切之功: 내가 학문에 힘을 얻어서 거칠게라도 지식이 있는 것은 옛날에 간절하게 가르쳐주신 공로다)」라는 유지를 내리고 우암에게 여러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출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암은 효종의 유지를 여러 번 사양하다가 끝내 입궐하여 북벌하고자 하는 효종의 심중을 알고 안으로는 예와 풍속 그리고 세제(稅制)를 정비하며, 밖으로는 10만 양병을 제안하는 등 군덕(君德)향상과 기강을 확립하여 국력을 기르는 일을 효종과 함께 도모하였다. 그러나 효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자 우암은 항상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으며, 평소 간직했던 의리를 말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귀향할 결심을 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과 숙종대에도 우암에게 많은 관직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서인과 남인으로 대립되었던 조정은 학설상의 대립, 그 중에서도 국가 전례(國家典禮)에 관한 이론 대결이 날카로웠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인(南人)계인 미수 허목은 동춘, 우암과 예론(禮論)에 대한 이 논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유명한「기해예송(己亥禮訟)」이 그것이다. 효종의 초상에 대한 모후(母后)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이 논란을 일으키게 되어 , 서인(西人)계 학자들이 기년설(朞年設: 만 1년)을 주장하며 그대로 실시 했음에 대해 군주의 대통(大統)을 강조하는 남인들은 삼년설(三年設: 만 2년)을 내세워 반론을 펴면서 서인들을 「오례난통(誤禮亂統)」, 즉 국가전례를 그르쳐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어지럽혀 놓았다고 공격하였다. 이 반론은 미수(허목)를 위주로 하여 윤휴, 윤선도 등이 주동한 것이었다. 이로 인한 양파의 당쟁은 상호 여러 차례 정치적 보복을 가져왔으며 미수가 멀리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된 것이 첫 보복을 받은 것이지만 현종을 거쳐 숙종에 이르는 동안 한때 서인이 실각 당하고 남인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서인인 우암에 대한 형벌문제가 제기되어 남인은 다시 사형을 주장하는 청남(淸南)과 온건하게 처사 하고자 하는 탁남(濁南)으로 양분되었는데, 미수는 우암에 대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남(淸南)에 속하여 우암과는 상극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미수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년에 남인 일파가 서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실각한 사건)으로 삭탈관직을 당한 후 1년여 후에 사망하게 된다. 미수의 죽음이 이후의 우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우암이 유배당하고 사약을 받고 죽게 된 연유에는 미수의 반목질시 했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뒤에서 거론할 것임)
『전경』제생 9절에 의하면 김사성의 아들 성옥이 죽었을 때 상제께서는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搜)를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시는데, 이것은 이러한 「미수와 우암간의 상극적인 기운을 상생의 기운으로 돌리시고, 이러한 상생 기운으로서 병자를 치유코자 하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서인과 남인간의 알력으로 우암은 거제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는데,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1689년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상소의 글 가운데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부분이 있어 삭탈관직 당한 후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이어 신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들의 주장에 의해 정읍에서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다.
우암은 사사하라는 명을 받고 이르기를 「내 목숨은 장차 끊어질 것이다. 지금 한 가닥 숨이 아직 남아 있어 명을 받을 만한데 약은 왜 이리 더디 오는가」라고 하였다. 사약이 도착하자 우암은 「상의를 가져 다 몸 위에 덮으라」하고는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숙여 전지(傳旨)를 경청하였다. 마침내 사약을 받자 약을 들고는 베개에 누워 운명하니 이날이 숙종 15년(1689) 6월 8일 계유일이었다. 그런데 전날 밤에는 백기(白氣)가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이날 밤에는 규성(奎星)이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집 위에 뻗쳤다고 한다. 그 후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숙종 20년(1694년)에 그는 신원(伸寃)되게 된다. 『전경』에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행록 1장 36절)라고 하는 김형렬 종도의 말의 사실성은 우암과 관련한 수 많은 일화는 물론이고 그가 보여 주었던 군신, 사제, 사우, 부자, 형제간에 있어서의 강방정대(剛方正大)한 품성과 웅대 광활한 도량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우암은 임진란 때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기도 하였다. 인조때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네 자를 받아 이를 석벽에 새기고 그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우암이 죽을 때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유언하여 권상하가 유림들을 동원해서 지은 것이다.
「만동묘」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 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황극신이 이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공사 3장 22절)라고 말씀하시어 황극신 공사를 보셨으며, 우암이 세운 「만동묘」는 공사에 있어 중요한 일면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말에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였듯이 자연의 기(氣)가 어지럽혀지면 또한 반드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나게 된다. 공자와 주자가 당시 시조(時潮)의 와류에서 의리를 밝혔듯이 당시 청의 침략을 받은 조선을 우암이 춘추대의로써 이적과 금수의 손아래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니 이 또한 다스림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상극기운의 혼돈에 쌓인 오늘날 상생의 도를 세우는 일은 300여년전 우암 송시열의 위와 같은 행적과 일면으로 통하는 느낌을 갖게한다.
《대순회보》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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