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진시황(秦始皇)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3 조회6,005회 댓글0건본문
진시황(秦始皇)
「서복」을 동방에 보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던 진시황(秦始皇)
아방궁(阿房宮) 건설에 70여만의 인력동원 무리한 토목공사로 멸망자초 … 병사(病死)해
상제님께서「의약 · 복서 · 종수지문」의 책, 땅에 묻으시고「진시황의 해원(解冤)공사」보셔
姜相年 <硏究委員>
진시황제(秦始皇帝, 제위 B.C 246~210)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진(秦)나라의 황제이다. 그는 BC 259년 조(趙)에 인질로가 있던 장양왕(藏襄王)의 아들로 조의 도성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원래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으므로 부친은 여불위라는 설도 있다. 그는 법가(法家)의 인물을 기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한, 위, 조, 초, 연, 제(韓, 魏, 趙, 楚, 燕, 薺)〉를 정복하여 17년만인 39세 때에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구축 하였다. 통일을 완성한 그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공덕을 한 몸에 겸하였다는 뜻에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썼다.
그의 집권 중 가장 충실하게 그를 보좌한 사람은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이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진 나라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멸망에 이르게 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지나친 권력욕이 스스로를 죽였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에 따라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실시하여 지방의 관리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 시켜 통치하였다. 또 내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호족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키고, 필요 없는 성곽을 모두 파괴하는 동시에 민간의 무기를 몰수하여 12개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반대세력의 대두를 방지하였다. 한편 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는 등 중앙집권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면 시황제를 연상시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만리장성(萬里長城)등을 살펴보자.
▶분서갱유(焚書坑儒)
시황제 34년(BC 213)수도 함양궁 에서도 천하 통일을 경축하는 잔치가 푸짐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치 자리에서는 오랫동안 곪아 온 정치투쟁이 폭발하고 말았다. 시황제의 측근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시황의 공덕을 칭송하며 축배를 올렸다. 이때 순우월(淳于越)이 앞에 나가 경전을 인용하여 옛 것을 찬미하고 현재를 풍자하는 발언을 하였다. 숭상 이사는 순우월의 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 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극단적인 탄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 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등이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많은 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다만 의약(醫藥), 복서, 종수(種樹:나무 심고 가꾸는 것)에 관한 서적만 남기도록 하였다. 이 분서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시황제를 비판하였다. 이들 비판세력을 누르기 위한 강경한 탄압정책이 취해졌다.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갱유(坑儒)」사건이 발생하였다. 갱유는 사실상 사상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발단이 된 것은 방사(方士, 선술로써 불로 장수약을 구하는 자들을 말함)들의 배신행위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천하 통일을 한 시황제는 오직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생각하여 선술을 좋아하는 서복(徐福) (사기(史記)에는 서시(徐市)로 기록됨)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선단(船團)을 거느리게 하여 동양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서복은 불사약을 구할 수가 없었고, 그대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을 보여주듯 지금 일본 각지에는 서복의 묘가 있다. 또 B.C 212년 어느 날 불사약을 못 구하여 책임 추궁을 두려워한 두 사람의 방사 후생(候生), 노생(盧生)이 시황제를 헐뜯고 도망해 버렸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기를 비방하는 자는 주로 유생들이라는 것을 알고 이와 관련된 유생 406명을 체포하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하면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陵墓)를 만들기 시작하여 그가 50세에 죽을 무렵이 되어 완성하였다. 36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이 대공사는 서안시(西安市)동쪽 섬서 성의 임동(臨童)으로부터 동쪽으로 5~6㎞되는 지점에 실시되었는데 여산릉이라고 하며 시황릉이라고도 부른다. 또 시황제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능묘 안의 돔식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반짝이고, 지면에는 수은을 이용한 하천과 호수가 만들어져 천문, 지리 형세의 천하가 펼쳐져 있었다. 또 실내에는 문무백관의 자리가 차례대로 펼쳐져 있고, 고래기름에 의해 점등되었다. 묘실에는 활을 장치해놓아 도굴자가 침입하면 즉시 화살이 쏟아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공사에 무려 5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여산릉 공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또 하나의 대토목 공사는 「아방궁(阿房宮)」 건축 공사였다. 역사 이래로 써 오던 함양궁은 협소하여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궁전으로 위엄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아방궁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 아방은 원래지명으로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완성된 후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기로 하였는데,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의 비운을 맞게되었다. 아방궁을 지을 때 먼저 전전(前殿)을 짓기로 하였는데 동서의 길이가 5백 보(590m), 남북이 51장(115m), 위층에는 1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서는 높이 5장(11.5m)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이 건축 공사에도 무려 70만명의 강제 노역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하여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족을 쫓아버리고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병사와 인부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극적 전설을 낳고 있다.
맹강녀(孟姜女)는 만리장성 축조 공사에 징용되어 간 남편을 위하여 겨울옷을 준비하여 도착하였으나, 남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유해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가 통곡하며 장성 주위를 맴돌자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해가 나타났던 것이다. 전쟁이나, 부역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몇 만 몇 십만에 이르는지 헤아릴 수 없다.
BC 210년(51세)시황제가 동쪽의 낭야로 순행 중에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천하를 호령하고 통치하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는 진의 멸망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은 백성에게 인의(仁義)의 정치를 베풀지 않은 것과 공격하는 측인 반란군과 지키는 측인 진 왕조 사이에 세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이십 장으로 책 두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 종수지문(醫藥卜筮 種樹之文」이라 쓰시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도수이니라」하시고 한 권을 신원일의 집 뒷간에 묻고 또 한 권을 황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 (공사 3장 17절) 진시황이 분서할 때 남긴 책이 의약 · 복서 · 종수의 책이므로,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불사약을 구하지 못한 채 51세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진시황의 원을 상제께서 풀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순회보》 29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