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소서(小暑) 절후를 관장하는 시소(柴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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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14 조회6,228회 댓글0건본문
부부가 같이 당 창업에 기여한 시소와 평양공주 이씨
시소(柴紹, ?~638)는 자(字)가 사창(嗣昌)이고 진주(晉州) 임분[臨汾, 현재 산서성(山西省) 임분]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용감했으며 자라서는 용기와 힘을 가지고 있어서 협객(俠客)들 사이에 알려졌다.
시소는 정통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시열(柴熱)은 북주(北周, 557~580)01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지냈고 수(遂), 양(梁) 두 곳의 자사(刺史)를 역임했으며 관군현공(冠軍縣公)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아버지 시신(柴愼)은 수(隋)나라에서 태자우내솔(太子右內率)을 지냈고 거록군공(鉅鹿郡公)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시소는 어린 나이에 수(隋)나라 태자의 천우비신(千牛備身)02이 되었는데 이때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이연이 당을 창업하기 전에 자신의 딸을 시소에게 출가(出嫁)시켰는데 뒷날 평양공주(平陽公主)가 된다. 평양공주는 대단한 여장부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할 것이다.
617년[대업(大業) 13]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면서 하동(河東)에 있던 두 아들 이건성(李建成), 이원길(李元吉)과 장안(長安)에 있던 시소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을 불러 들였다. 시소는 지름길로 달려가서 이연의 군대를 맞이하려다가 태원으로 가는 도중에 이연의 두 아들과 만나게 되었다.
수(隋)나라의 관리들에게 쫓기고 있던 이건성이 말했다.
“우리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관리들에게 잡힐까 두렵다. 도적들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이 어떨까?”
시소가 대답했다.
“안 됩니다. 도적들은 그대가 당공[唐公, 이연(李淵)이 거병할 때의 작위(爵位)]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대를 잡아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헛되이 죽게 될 따름입니다. 태원까지 빨리 가는 것이 낫습니다.”
이들이 태원에 들어서서 작서곡(雀鼠谷)에 이르렀을 때 이연의 거병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건성이 ‘시소는 지략이 있다.’ 하며 서로 축하했다.
이연의 군대에 합류한 시소는 우령군대도독부(右領軍大都督府)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 이연의 군대가 진양(晉陽)을 출발할 때 시소는 활을 지닌 기병을 이끌었다. 시소는 이연의 본진에 앞서 곽읍(邑)에 이르러 성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곽읍은 수(隋)의 장수 송노생(宋老生)이 지키고 있었다.
정찰을 마친 시소가 돌아와서 말했다.
“송노생은 우리 군사가 당도하면 필시 싸우려 나올 것입니다. 그때 사로잡으면 됩니다.”
이연의 본진이 도착하자 과연 시소의 예상대로 송노생이 출전했고 그는 힘껏 싸워 공적을 세웠다. 시소는 이세민을 따라 임분(臨汾), 강군(絳郡)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수(隋)의 장수 상현화(桑顯和)가 이연의 군대와 맞섰는데 시소가 수군(隋軍)의 배후를 사대내(史大奈)와 함께 공격하였다. 상현화는 마침내 패배했고 이후 장안이 평정되었다.
시소는 장안평정의 공으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와 임분군공(臨汾郡公)에 임명되었다. 시소는 이세민을 따라 여러 차례 토벌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을 세워 곽국공(國公)과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승진했다.
623년[무덕(武德) 6] 토욕혼(吐谷渾)03과 당항(項)04이 변방을 노략질을 하자 시소에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토욕혼과 당항 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당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마치 비가 오는 듯 했다. 이를 본 당의 병사들은 사색이 될 정도로 당황했다.
그러나 시소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발한 전략을 폈다. 시소는 사람을 보내 호비파(胡琵琶)를 연주케 하고 두 사람의 여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했다. 당군의 이와 같은 괴이한 행위에 전투는 중단되었다. 전투 중에 들려오는 귀에 익은 비파 소리와 눈앞에 펼쳐진 춤사위. 전쟁 중에 펼쳐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전개에 토욕혼과 당항 군의 장수와 병졸이 모두 춤 구경을 하느라 자신들이 지금 적군과 대치하고 있으며 전투 중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시소는 토욕혼과 당항 군이 춤 구경을 하느라 방심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시소는 날랜 기병을 보내 이들의 배후를 습격하게 하니 방심하고 있던 적군은 궤멸되었다. 당군의 입장에서 보면 기발한 작전의 승리지만 토욕혼과 당항 군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패배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05을 보면 고조 이연의 시대에 시소는 주로 변방의 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23년[무덕(武德) 6] 5월 시소를 파견하여 민주[岷州, 감숙성(甘肅省) 민현(岷縣)]를 구원하였다.
같은 해 6월 시소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토욕혼과 당항의 토벌에서 기발한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624년(무덕 7) 시소가 두양곡(杜陽谷, 섬서성 봉상현 동북쪽)에서 돌궐을 격파하였다.
625년(무덕 8) 돌궐이 선주(州, 청해성 낙도시)를 노략질 하니 시소를 파견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626년(무덕 9) 시소를 파견하여 호족(胡族)을 쳤다.
같은 해, 돌궐이 농주(州, 섬서성 농현), 위주(渭州, 감숙성 농서현)를 노략질하니 시소를 파견하여 돌궐을 쳤다.
같은 해, 시소가 돌궐을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시)에서 격파했다.
당태종이 즉위한 이후 시소는 당 창업에 걸림돌이 되는 반란세력 토벌에 공을 세우게 된다. 628년[정관(貞觀) 2]에 시소는 오랫동안 돌궐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양사도(梁師都, ?~628)06를 평정하고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옮겼다.
629년(정관 3) 당태종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돌궐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화주자사(華州刺史)였던 시소도 승주도행군총관(勝州道行軍總管)에 임명되어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시소는 이때의 공으로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의 직책이 더해졌으며 봉국(封國)은 초국(國)으로 옮겨졌다.
638년(정관 12) 시소의 병이 깊어지자 당태종이 친히 병문안 했다. 시소가 죽으니 형주도독(荊州都督)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를 양(襄)이라 했다. 시소는 고조 이연의 사위로 당 창업의 초기부터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워 당의 창업과 국가적인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다.
낭자군(娘子軍)을 이끈 여장부 평양공주(平陽公主) 이씨
당 창업 초기의 공훈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소의 아내 이씨도 누구 못지않은 공신이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별도의 군을 조직하고 이끌었는데 이때 이씨가 이끈 군대를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불렀다. 이연이 당의 초대황제가 되면서 이씨는 평양공주(平陽公主)로 봉해졌는데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의 소생(所生)이다. 이씨의 이름과 나이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 등 이른바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없다. 단지 이씨의 이름은 이수녕(李秀寧)이라 전해진다. 고조 이연에게는 19명의 딸이 있었는데 태목황후 두씨와의 사이에서 본 딸은 이씨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였을 때 시소와 이씨는 장안(長安)에 있었다. 이연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시소는 이씨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존공(尊公, 이연)께서 군사를 일으키시고 나는 그 의로운 군대를 맞이하려는데 같이 갈 수는 없소. 내가 홀로 가고 나면 남은 사람들에게 후환(後患)이 있을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겠소.”
이씨가 말했다.
“공께서는 마땅히 속히 가십시오. 저는 일개 아녀자이니 잠시 몸을 숨기기는 쉽습니다. 또한 응당 스스로를 보전할 계책이 있습니다.”
이씨는 호현[縣, 현재 섬서성(陝西省) 호현(戶縣)]으로 몸을 피하고 재산을 풀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단지 재산만 있다고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할 수는 없다. 이는 이씨가 무예가 뛰어난데다 남자 못지않은 담력이 있어 가능할 일이었다. 그녀는 남장(男裝)하고 스스로를 ‘이공자(李公子)’라 칭하며 공개적으로 병마(兵馬)를 모아 수나라에 대항했다.
어느 정도 세력을 규합한 이씨는 가동(家) 마삼보(馬三寶, ?~629)07를 주변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하반인(何潘仁, ?~619)에게 보내어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이씨는 하반인과 함께 호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근거지를 확보한 이씨는 다시금 마삼보를 보내어 군도(群盜) 이중문(李仲文), 향선지(向善志), 구사리(丘師利) 등을 설득하여 이들 역시 자신의 세력권으로 병합하니 무리가 수천에 달했다.
수군(隋軍)이 여러 번 이들을 토벌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이들의 세력은 더욱 팽창하여 주질(, 섬서성 주질), 무공(武功, 섬서성 무공), 시평(始平, 섬서성 흥평) 등이 그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씨는 엄격한 군율을 제정하여 병사들의 약탈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이씨의 무리는 일개 도적의 무리가 아닌 규율을 갖춘 군대로 변모했다. 이씨를 따르는 세력들은 더욱 증가하여 그 숫자가 7만(萬)에 달하였다.
이씨는 자신의 일을 이연에게 알렸다. 이연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연은 시소에게 기병을 주어 이씨를 맞이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이씨는 만여 명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이세민과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연의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였을 때 이씨는 시소와는 별도의 막부(幕府)를 두어 참여했다. 이때 이씨가 거느리는 군대를 군중(軍中)에서는 ‘낭자군(娘子軍)’이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낭자군’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한다.
장안이 함락되고 당이 성립하면서 이씨는 평양공주에 봉해진다. 여러 공주들 중에서 평양공주와 같은 군공(軍功)을 세운 이는 없었다. 고조는 매번 상을 하사하여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우대했다.
623년(무덕 6) 평양공주가 죽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대략 20세 중반이나 30세 초반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의 성립에 큰 공을 세운 공신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다. 고조는 평양공주의 장례 행렬의 전후에 우보(羽)08, 고취(鼓吹)09, 대로(大輅)10, 휘당(麾幢)11, 반검(班劍)12을 든 40인에 호분(虎賁)13 갑졸(甲卒)14을 배치하여 호위하도록 했다. 이는 그 어떤 장군과 대신들의 장례식 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공신이고 공주라고 해도 여성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태상(太常)15이 고조에게 상주(上奏)했다.
“예법(禮法)에 의하면 부인의 장례에 고취(鼓吹)는 하지 않습니다.”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고조는 단호했다.
“고취는 군악(軍樂)이다. 지난 날 공주는 친히 금고(金鼓)16를 잡고 군대를 모아 대업을 도왔다. 부인으로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고금(古今)에 있는가. 사용함이 마땅하다.”
고조로서는 이렇게 함으로써 공주의 공적(功績)을 표창하고자 했다. 또한 공주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소(昭)라 하여 이씨는 평양소공주(平陽昭公主)가 되는데 이때 ‘소(昭)’는 ‘명덕유공(明德有功)’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소 부부의 일을 보면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들 부부는 당 창업과 당이 국가적 토대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 창업에 기여한 많은 인물들 가운데 이들처럼 부부가 같이 공을 세운 사례는 없었다.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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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북조(北朝)의 하나. 선비족(鮮卑族)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를 멸하고 세운 나라. 후주(後周)라고도 함. 도읍은 장안. 5주(主) 24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하였음.
02 임금의 시위(侍衛)를 맡은 무관(武官). 북위(北魏) 때에 처음 두었다. 천우(千牛), 천우위(千牛衛)로도 불림.
03 선비(鮮卑)의 지족(支族). 원래 청해(靑海) 부근에서 부락을 이루어 당(唐)나라에 예속(隸屬)되었다가 나중에 토번(吐藩)에 병합 당함.
04 고대의 부족(部族) 이름. 서강(西羌)의 별종(別種).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지금의 청해(靑海)·감숙(甘肅)·사천성(四川省)의 변방 지대에 거주하면서 목축에 종사하다가 당대(唐代)에 감숙·영하(寧夏)·섬북(陝北) 일대로 옮겨 살았으며, 북송(北宋) 때에 그 부족의 이원호(李元昊)가 대하(大夏)를 세웠다.
05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20』 당(唐)시대Ⅰ, 도서출판 삼화, 2009.
06 하주(夏州) 삭방[朔方, 현재 내몽고(內蒙古) 조심기(鳥審旗) 백성자(白城子)]사람. 군(郡)의 호족(豪族)으로 수(隋)에 벼슬하여 응양부낭장(鷹揚府郎將)으로 있다가 대업[大業, 수양제(隋煬帝)의 연호]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무리들을 모아서 군승(郡丞) 당종(唐宗)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군을 근거로 자칭 대승상(大丞相)이 되어 돌궐(突厥)의 힘을 빌려 세력을 확산시켰다. 이후 돌궐의 후원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양(梁)이라고 했다. 당(唐)이 세워지고 나서 양사도를 여러 차례 토벌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돌궐에 의지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628년[정관(貞觀) 2] 시소(柴紹)와 설만균(薛萬均)이 이끈 당군이 양사도의 성을 포위하자 그는 돌궐에 다시 구원을 요청하였다. 돌궐이 구원에 나섰으나 시소가 이들을 격파하였고 이후 양사도는 살해당했다. 반란을 일으키고 망하기까지 12년으로 수나라 말에 일어난 많은 반란의 무리들 중 가장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07 가동(家)에서 장군의 지위에 오른 인물. 처음에 장안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감문솔(太子監門率)에 임명되었다. 이후 설인과(薛仁果) 토벌에 참가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 되었다. 시소가 민주(岷州)에서 토욕혼(吐谷渾)을 격파할 때 선봉에서 적진을 깨트렸다. 이 과정에서 적의 이름난 왕을 참수하고 포로로 남녀 수천을 사로잡았다. 이때의 공로로 신흥현공(新興縣公)에 봉해졌다. 629년[정관(貞觀) 3] 마삼보가 죽으니 당태종이 그의 죽음을 조상하여 조회(朝會)를 폐(廢)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니 충(忠)이라 했다.
08 장례 때 사용하는 의장(儀仗)의 일종. 새털을 깃대 꼭대기에 모아 일산(日傘)과 같이 만든 물건.
09 북을 치며 피리를 붐, 또는 사기(士氣)를 붇돋움.
10 천자가 타는 수레.
11 관리들이 나들이 때 차리는 의장용(儀仗用) 깃발.
12 진대(晉代) 조회(朝會)에서 찼던 무늬가 새겨진 목검. 한대(漢代) 진검을 차던 것을 바꾼 것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했다고도 한다. 뒤에 의장용으로 쓰여 무사가 차거나 천자가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13 날래다는 뜻으로 천자를 호위하는 군사 또는 용사.
14 갑사(甲士). 무장한 군사.
15 구경(九卿)의 하나. 종묘(宗廟) 등의 제사를 맡은 벼슬.
16 군중(軍中)에서 치는 쇠붙이와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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