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불보살낭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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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3 조회5,492회 댓글0건본문
-海東편-
남궁두(南宮斗) (1526∼?)
때는 조선조 중엽,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의 임피(臨陂)에 남궁두라는 부호가 살고 있었다. 나이 서른에(1555년 명종 10) 진사가 되어 서울에 살고 다만 애첩 하나를 시골집에 두어 농장을 경영하게 했다. 그런데 그 애첩이 남궁두의 당질과 눈이 맞아 간통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궁두가 여러 번 타일렀으나 잘못을 고치지 않자 화가 난 그는 화살로 두 사람을 쏘아 죽이고 죄를 참회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어느 날 남궁두가 경상도 의령의 작은 암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데 한 젊은 중이 힐끗 쳐다보면서 『당신은 양반인데 어째서 뒤늦게 삭발을 하였습니까?』하였다.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니 『무척 참을성이 있는 분이군요』하고 웃으면서 『두 사람의 목숨을 해쳐,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남궁두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 있었지만 이 말에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과거를 마치 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 날 밤 남궁두는 젊은 중의 침실로 찾아가 사실대로 고하고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저는 다만 관상을 볼뿐입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천문, 지리, 관상, 의술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시어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가르치십니다. 그 분을 만나보십시오. 그분은 무주 치상산(雉嘗山:적상산을 말함)에 계십니다.』하였다.
다음 날 남궁두는 무주로 향하였다. 치상산에 있는 여러 절을 모두 찾았으나 이인(異人)이라 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2년 간을 그곳에 머물면서, 층암절벽은 물론 새의 자취도 닿지 않은 곳까지 찾아보았으나 젊은 중의 스승이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실의에 차 그만 돌아가려고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계곡 물에 큰 복숭아 씨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 아래 초가 한 채가 절벽을 의지하여 서있었다. 한 늙은 스님이 홀로 앉아 있는데 모습이 마치 마른나무 껍질 같았다. 다 헤어진 장삼을 걸치고 나와 『화상(和尙)의 풍골과 신수가 훤하니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이런 곳까지 오시었소?』라고 묻는 것이었다. 남궁두는 꿇어 앉아 『우둔한 저는 별 재주가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이인(異人)이라는 말을 듣고 한가지 재주라도 배워 세상에 써 보고자 불원천리하고 스승님을 찾아 2년 동안 헤매던 끝에 가까스로 이곳을 찾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그러나 그 선사는 『나는 산 속에서 이미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인데, 무슨 재주가 있겠소』하면서 거절하였다. 남궁두는 무수히 절하면서 간절하게 부탁하였으나 선사(仙師)는 방문을 굳게 닫고 다시 나타나지를 않았다. 남궁두는 행랑아래에 엎드려 새벽이 될 때가지 애원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결가부좌하여 입정에 든 채로 3일이 지나갔다. 그래도 남궁두는 단념하지 않으니 그제야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스승은 남궁두를 훑어보더니,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우둔하고 소박하니 다른 재주는 관두고 다만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남궁두는 너무 기뻐 일어나 절하였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다른 것을 배워서 무엇에 쓰겠습니까?』스승은 다시 말하였다. 『모든 도술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을 모은 뒤에야 이룰 수 있다. 하물며 혼백을 단련하고 마음을 취정(娶精)하여 신선이 되고자 함에 있어서랴! 정신을 모으는 데는 잠을 자지 않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으니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해라.』
남궁두가 자지 않은지 이틀이 되니 혼미하고 권태로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참아 내었다. 셋째, 넷째 날 밤에는 더욱 싫증이 나고 피곤하여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륙 일째는 온몸이 조각나듯이 고통스럽고 힘이 들어 머리를 벽이나 문설주에다 부딪치기도 하며 견디어 나갔다. 일곱째 밤을 지나니 모든 졸음이 가시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사는 기뻐하면서 『너는 인내력이 대단하니 참으로 쓸만한 그릇이다』하면서 그에게 《위백양 참동계(參同契)와 황제내외옥경경(皇帝內外玉景經)》을 전해주고 드디어 자(子) · 오(午) · 묘(卯) · 유(酉)의 육자비결(六子秘訣)을 가르쳐 주었다. 남궁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화후(火候)의 승강전도(昇降顚倒)와 내관(內觀)공부에 여섯 달 넘게 전념하였는데, 어느 날 단전(丹田)이 꽉 차 오르면서 배에서 금빛 광채가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아, 드디어 나도 신선의 관문에 들어서는구나!』남궁두는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 마음이 실패의 원인이 될 줄이다! 욕심이 생기자 몸 내부의 금빛 기운이 머리 위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남궁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쩍 뛰어 올랐다. 옆에 있던 스승이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아아! 아깝다. 성공치 못했구나!』하고서는 편안하게 앉게 하고 기를 안정시켜 몸을 조리 시켰다. 『몇 백년 만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너를 만나 신선의 가르침을 전하였으나 전생의 업보 때문인지 잘 되지 않았구나. 그러나 네가 비록 신선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으나 항상 근신하고 여태까지의 공부방법으로 정진한다면 지상선(地上仙)은 될 수 있다. 나와의 인연은 다한 것 같으니 그만 하산하도록 하여라』스승의 이 말에 남궁두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선사는 남궁두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도가의 공부는 마음을 닦는 데에 있으니 그 요결은 오로지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생각의 옳고 그름을 신명이 좌우에 늘어서서 일일이 먼저 알고 있다. 옥황상제님께서는 항상 가까운 곳에 계시어, 선악을 북두성(北斗星)에 기록토록 하여 때가 되면 보응(報應)이 나타나도록 하고 있다. 너는 참을성이 매우 강인하나 그만큼 욕심이 없지 아니하니 이상한 취미에 빠져들어 고초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 몸을 삼가도록 하라.』 남궁두는 하산하여 세속에 돌아왔으나 옛 스승의 교훈을 마음깊이 새겨 수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수염도 머리도 희어지지 않았다.
허균(許筠:광해군 때의 학자 홍길동전의 작가)이 만력 35년(1608) 가을. 공주의 관직을 그만두고 부안에 살 때에 남궁두가 고부(古阜)로부터 걸어서 찾아와 사경(四經)의 오묘한 뜻을 가르쳐주고, 아울러 스승을 만난 전말을 위와 같이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남궁두는 그 당시 83세였으나 용모가 마치 40세와 같았으며, 허균과 같이 있는 동안 며칠씩 식사를 하지 않고 잠도 전혀 자지 않으면서 『참동계』와 『황정경』을 쉬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허균과 남궁두는 몇 십일 동안 교분을 맺었는데, 어느 날 남궁두는 홀연히 떠나 그 후로 자취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붕유설(芝崩類說)에 남궁두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남궁두는 함열(咸悅)사람으로 을묘에 진사가 되었다. 소시에 어떤 일로 망명하여 다니다가 이인을 만나 비결을 배워 산수간을 노닐었는데 90이 되어도 안색이 늙지 않으니 사람들이 지상선(地上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순회보》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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