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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조조(曹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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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9 조회5,8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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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주우 

 

  중국 역사에서 조조(155~220)만큼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저자인 진수(陳壽, 233~297)는 “조조야말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관중(羅貫中, 1330~1400 추정)이 쓴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는 악행(惡行)을 대표하는 인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과 유행으로 조조는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역사 속 조조의 인물과 삶을 정사 『삼국지』를 통해 살펴본다.

  

출생과 관료 생활
  조조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관료이자 위(魏)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이다. 그의 자는 맹덕(孟德)이고 어릴 때 이름은 아만(阿瞞)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중국 안휘성 박주시)에서 출생하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승(曹嵩, ?~193)은 환관 조등(曹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조등은 환제(桓帝) 때 중상시를 맡았고 이후 비정후(費亭侯)라는 작위가 봉해졌다. 아버지 조승은 조등의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太尉: 최고의 군사장관인 1품 관직)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가계의 영향으로 조조는 ‘환관의 자손’이라는 이름표가 붙게 되었다. 할아버지 조등은 30년간 네 임금을 섬겼는데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한다.01 당시 변고가 무상했던 조정에서 무사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처세술 때문일 것이다. 뒷날 조조라는 인물이 보여준 다재다능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이미 그 기초가 다져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조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평범하여 중국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에 수식어처럼 붙었던 어떠한 이적(異蹟)이나 기이한 풍모(風貌)도 찾아볼 수 없다. 정사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조조는 어려서부터 기지와 권모술수가 있었고, 의협심이 강하고 행동이 거리낌이 없었으며, 학업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조가 벼슬길에 나선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지역에서 매년 효도와 청렴한 사람을 추천하는 효렴(孝廉)에 선정되어 낭(郞)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북부위(北部尉)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기주(冀州)의 돈구현에 현령(縣令)으로 전출되었다가 수도인 낙양(洛陽)에 진출하여 황제의 자문역인 의랑(議郞)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린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
  조조가 활동한 당시의 중국은 후한 왕조가 무너지고, 약 100여 년에 걸친 긴 전란의 시대가 막을 연다. 2세기 중엽부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던 후한의 정치는 폭정으로 치달았다. 결국 184년 민중들의 생활이 황폐해지자 장각(張角)이 세운 태평도(太平道)의 신도가 주축이 되어 ‘황건(黃巾)의 난’이라 불리는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이때 조조는 서른 살로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황건적 진압에 공을 세운다. 이 공적으로 10개 현(縣)을 관할하는 제남(济南)지역의 상(相)으로 승진한다. 조조는 부임 후 뇌물과 향락에 물든 관리들을 모조리 파면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음사(淫祀)와 같은 민간신앙을 모두 금지하고 악습을 혁파하였다. 그 후 동군태수(東郡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돌연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한다. 이때 조조의 맞수라 할 수 있는 유비(劉備, 161~223)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함께 황건적을 공격한 공로로 기주의 작은 고을인 안휘현(安喜縣) 현위(縣尉)가 된다.
  한편 후한의 조정은 일대 혼란이 가중된다. 189년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고 어린 유변이 즉위하자 외척인 하진(何進)은 대장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하진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을 중용하여 환관들을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하진이 피살되자 원소는 환관 2,000여 명을 몰살한다. 이때 양주(涼州)의 제후였던 통탁(董卓)이 낙양에 입성하여 권력을 쥐게 된다. 동탁의 위세는 황제를 넘어섰고, 폭정에 백성들은 물론 지배 계급에서도 동탁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된다. 통탁은 황제와 하태후를 내쫓고 9살이던 유협을 즉위시킨다. 그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 181-234)이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후한 말기의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웅들이 패권 다툼을 시작했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를 중용하고자 하였으나 조조는 성(城)을 탈출하여 낙양을 떠난다. 고향에 도착한 조조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동탁과 맞설 준비를 했다. 다음 해 원소를 맹주로 반(反)통탁 연합군이 형성되자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에 합류한다. 그러나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제후 중 누구도 선두에 나서길 주저했다. 조조가 홀로 군사를 이끌고 싸웠지만 대패했다. 191년 조조는 황건적의 잔여 세력을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태수에 임명된다. 한편 192년 조정에서는 동탁이 부하였던 여포(呂布)에게 살해된다. 이때 조조는 연주목(兗州牧)에 임명되어 수장(壽張) 지방으로 진군하고 100만여 명에 달하는 청주의 황건적 잔당을 정벌했다. 당시의 군웅들은 황건적을 소탕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조조는 황건적의 항복과 동시에 그들의 귀순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조조는 일거양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첫째는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둘째는 황건적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제력 확보였다. 조조는 이들 가운데 정예의 병력을 선발해 독자적인 ‘청주병(靑州兵)’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조조의 주력부대가 된다. 이 무렵부터 조조는 순욱(荀彧)을 비롯한 많은 참모를 모을 수 있었고 각지의 군사들이 연이어 귀속함으로써 세력이 급성장하게 된다.

  

헌제 옹립과 둔전제(屯田制)를 실시
  196년 조조는 황제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許昌)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조조는 전쟁의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중앙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정 대신의 임명권과 군사권을 헌제의 명의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참모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한다. 이 제도는 임자 없는 농경지를 둔전(屯田)으로 하고 유민(流民)을 모아 농사를 주어 둔전민(屯田民)을 두는 것이다. 이 둔전제는 당시 징병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백성들의 기근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농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는 유민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써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는 이중효과를 달성하였다. 이 무렵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下邳)를 빼앗겨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참모 정욱(程昱)은 조조에게 유비를 제거하도록 진언하지만, 조조는 다만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혼란 속에 계속되는 전쟁과 식량 부족으로 무너지는 군벌들이 속출하였으나 조조는 둔전제의 성공으로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197년 조조는 완(宛: 형주 남양군의 현)에 출정하여 남방의 군벌이었던 장수(張繡)를 항복시킨다. 다음 해에는 장수와 유표(劉表)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하남 일대를 장악한다. 이때 원소는 북방에서 큰 세력을 지녔던 공손찬(公孫瓚)을 물리쳐 북방 4개 주[청(靑)·기(冀)·유(幽)·병(幷)]를 차지하였고 요동(遼東)의 공손강(公孫康)과 연합하여 황하(黃河) 이북을 통치하고 있었다. 199년에 조조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유비를 출정시켰지만, 유비는 재빨리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조조는 친히 출정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생포한다. 200년 형주에서 장수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조조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에 다급해진 원소는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 허창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조조가 관우를 선봉장에 세워 전투에 임하게 한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갔다. 결국, 2~3만 명의 군사로 관도(官渡)에서 대치하던 조조는 5,000여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원소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식량기지를 불태우고 대승을 거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과 원소가 내통한 문건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으나 조조는 부하들을 엄벌하지 않고 문건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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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창으로 돌아온 조조는 전란으로 파괴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시책을 모색한다. 먼저 전몰병사들의 유가족을 위해 토지를 분배하고 학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문헌전적(文獻典籍)의 연구와 인재 교육을 위해 500호 이상의 마을마다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배경에는 조조 자신이 학문을 좋아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들 조비(曹丕, 187~226)가 쓴 『전론(典論)』에는 아버지 조조가 시서(詩書)와 문적(文籍)을 좋아하여 비록 전쟁터라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02
  202년 원소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다. 기주목에 부임하여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자 세금을 면제하고 호족들의 세금 수납을 일정하게 정하여 착취를 억제하였다. 이후에도 원소가 차지하고 있던 청주, 병주를 평정하게 된다. 이로써 조조의 최대 숙적이던 원소군은 전멸하게 된다. 그리고 북방에도 둔전제를 시행하여 행정조직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결국, 동북방에서 세력을 떨쳤던 오환족(烏丸族) 20여 만 명이 투항하게 되어 변방인 요동(遼東), 요서(遼西)지방까지 평정시킬 수 있었다. 이해에 유비는 형주(荊州)의 융중(隆中)에 있는 제갈량을 찾아가 군사(君師)로 맞이했다.

  

적벽대전의 실패와 삼국(三國) 형성
  208년 조조는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른다. 군사와 행정을 장악한 조조가 형주로 진군하자 유종(劉琮: 유표의 아들)이 투항한다. 한편 조조군을 피해 남으로 달아났던 유비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남의 손권(孫權, 182~252)과 동맹을 형성하여 적벽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은 수전경험의 부족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타격을 입고 퇴패(退敗)하게 된다. 이리하여 조조의 천하 통일의 꿈은 멀어지고 남북의 대치국면이 형성된다. 이때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여 익주(益州)로 세력을 확대하고 손권은 강남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다. 이로써 천하가 삼분(三分: 훗날 위·촉·오 삼국)되는 형세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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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도 제갈공명초용병 (서울역사박물관)


  이후 조조는 내정(內政)에 주력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공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조는 일대 개혁정치를 펴는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재능과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과거의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장료(張遼, ?~222), 장합(張郃, ?~231), 가후(賈詡, 147~223)와 같은 적장(敵將)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조조의 인재 경영술은 무엇보다도 능력 위주의 발탁과 적재적소의 배치,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핵심이었다.03 이처럼 구현령은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이다. 이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인재가 모이고 국가는 더욱 강성해졌다.
  당시 중원에서 한중(漢中)의 장로(張魯)와 관중(關中)의 마초(馬超), 한수(韓遂)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먼저 관중을 평정한다. 또 진군하여 한중을 평정하고 참모 하후연(夏侯淵)을 주둔시켰다. 이때 헌제는 조서(詔書)를 내려 조조를 위왕(魏王)에 봉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고조(漢高祖) 때 공신이었던 소하(蕭何)의 경우처럼 조정에서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손권과 연대하여 형주의 관우군을 격파시킨다. 조조는 신하의 입장을 취한 손권을 형주목에 임명하고 관우의 장례(葬禮)를 제후의 예에 따라 치러주었다. 다음 해인 220년 당시 66세로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아들 조비가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위왕조(魏王朝)를 세웠던 것은 그로부터 9개월 후였다. 조비는 연호를 황초(黃初)로 바꾸고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하였다. 다음 해에는 촉한(蜀漢)의 유비도 제위에 올랐고, 손권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로부터 오왕(吳王)으로 봉해진다. 

 

조조에 대한 평가
  조조에 대한 평가는 한(漢)나라를 계승한 왕조의 정통론에 따라 달라진다. 진(晋)나라 때 지어진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한(漢), 위(魏), 진(晉)에 근거한 정통론에 따라 위를 정통으로 본다. 북송시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조조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남송시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춘추 사관에 입각하여 유비의 촉한 정통론을 강하게 주장한다.04 이때부터 조조의 이미지는 간웅(奸雄)과 난신(亂臣)으로 고정화된다. 이러한 반(反)조조의 감정은 민간문예에서도 나타난다.05 특히 명나라 나관중이 지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촉한의 유비에 맞서는 조조는 ‘난세의 간웅(奸雄)’으로 묘사된다. 이후 소설 『삼국지연의』는 어떤 역사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흥미를 유발하여 수많은 독자에게 읽혔다. 즉 일반 대중들에게 『삼국지』는 정사(正史)의 역사책보다는 ‘칠실삼허(七實三虛: 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로 평가받는 소설 『삼국지연의』가 널리 유포되었다. 그런 까닭에 조조는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간웅과 악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친숙하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대략 선조(宣祖, 1552~1608) 재위기간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가 『삼국지연의』를 읽는 것을 경연관(經筵官)이었던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만류한 기록이 나온다.06 이후로 많은 유학자가 정사의 역사적 정통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연의(演義)를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인 연의를 배격한 이면에는 그만큼 널리 읽혔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가 이미 17세기에는 민간에서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9세기에는 상업출판의 성행과 더불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07 상제님께서도 당시 민중들에게 유행하였던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와 관계된  한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08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빈(孫臏)의 재조는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릉(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량 (諸葛亮)의 재조는 조조(曺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 데 있느니라. (교법 3장 28절) 

 

  중국 역사에서 조조는 정치·군사·경제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통치자였으며, 많은 시를 남긴 훌륭한 문학가였다. 이와 같은 조조를 송나라의 소식(蘇軾, 1037~1101)은 “술을 걸러 강가에 가고,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읊었다. 진실로 일세의 영웅이다.”라고 했다.09 조조는 주해서(註解書)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를 남길 만큼 병법(兵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용병술을 지닌 인물이다. 이러한 조조의 능력은 난세를 평정한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둔전제의 실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교육제도의 정비 등 적극적인 민본정책을 강구한 정치가였다. 정사 『삼국지』에서 드러난 그의 업적과 삶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희대의 영웅이라 평가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  

 <대순회보> 194호


참고문헌
『전경』
진수 지음, 김원중 옮김, 『정사 삼국지』, 서울: 민음사, 2007.
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 서울: 삼인, 2008.
나채훈, 『카리스마 리더 조조』, 서울: 북폴리오, 2004.
고이데 후미히코 감수, 김준영 옮김, 『삼국지 인물사전』, 서울: 들녘, 2000.
『조선왕조실록』, 선조 2년 6월 20일 기사.
이은봉, 『〈삼국지연의〉의 수용 양상 연구』, 인천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이민경, 『반조조(反曹操) 현상 및 그 원인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이재하, 「조조의 생애와 그 평가」 『중국문제연구』 6,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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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범엽(范曄, 398-445)의 『후한서(後漢書)』 「관자열전(官者列傳)」: ‘騰用事省闥三十餘年, 奉事四帝, 未嘗有過.’
(이재하, 「조조의 생애와 그 평가」, 『중국문제연구』 6, p.86. 참조)
02 이재하, 앞의 글, p.8.
03 나채훈, 『카리스마 리더 조조』 (서울: 북폴리오, 2004), p.133.
04 이재하, 앞의 글, pp.27-29.
05 동진(東晉)의 배계가 지은 『어림(語林)』, 송나라(남북조시대)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찬한 『세설신어(世說新語)』, 원대(元代)의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등에서 조조는 간사하고 교활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이민경, 『반조조(反曹操) 현상 및 그 원인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pp.45-48.]
06 “신이 뒤에 그 책을 보니 단연코 이는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칩니다.(臣後見其冊, 定是無賴者裒集雜言, 如成古談.)”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 2년 6월 20일 기사.
07 이은봉, 『〈삼국지연의〉의 수용 양상 연구』 (인천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p.27.
08 이 부분에 대하여 정사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서는 “조조는 적벽에서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해졌다. 이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 왔다.(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라고만 되어있다.[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 (서울: 삼인, 2008), p.261. 참조] 그러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제갈량은 조조가 화용도로 패퇴하여 달아나는 길을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관우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 관우는 조조를 화용도에서 붙잡으나 전에 자신을 풀어 준 적이 있어 목숨을 구걸하는 조조를 놓아주었다고 묘사한다.(《대순회보》 122호, 「전경 속 역사인물 - 제갈량」, p.25. 참조)
09 나채훈, 『카리스마 리더 조조』 (서울: 북폴리오, 2004),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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