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염락제현(廉洛諸賢): 정 명 도(程明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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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3.19 조회5,934회 댓글0건본문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기후오백년거금약일천년전대송지시렴낙제현일시전도)
(교운 2장 26절)
도주님께서는 「전교(傳敎)」를 통해 성인(聖人)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한 사실을 밝히셨다. 위 구절은 전교의 내용 중 계통(季統) 중회(中會)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중국 송나라 때 염락제현(濂洛諸賢)이 도를 전했다는 내용이다. 염락제현은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따르면 염학(濂學)파의 주렴계(周濂溪, 1017~1073)와 낙학(洛學)파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정이천(程伊川, 1033~1107) 등을 포함한 여러 현인을 이르는 말이다.01 이들 중 정명도는 맹자 사후로 단절되었던 유가의 전통 개념들을 서로 연관시키고 체계화시켜 형이상학적인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후학을 양성하여 북송(北宋) 오자(五子)02 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상제님께서 종도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때때로 읽어 주셨다고 하는 시 가운데 하나인 “道通天地無形外, 思入風雲變態中”(교법 3장 47절)의 원저자이기도 하다. 이 시구는 그가 지은 7언율시 ‘추일우성이수(秋日偶成二首)’ 중의 두 번째 시03 에서 5·6행에 해당하는데, 글자 하나를 바꾸어(有 → 無) 읽어 주신 것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이정전서(二程全書)』04 에 기술되어 있으므로 이를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생애
정명도는 북송시대 하남(河南) 낙양(洛陽)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호(顥), 자는 백순(伯淳)이며 그의 선조는 주대(周代)의 대사마(大司馬: 군사 관련 업무)일 때부터 정(程)을 성씨로 삼았다. 조상 대대로 벼슬을 하였으며 부친 정향(程珦)은 지주[知州: 중국 송나라 때 주(州)의 벼슬아치]를 여러 번 한 뒤 태중대부(太中大夫: 정치고문)가 되었다.05 정향은 부인 후(侯)씨를 얻어 6남 4녀를 낳았으며, 이중 셋째 아들이 명도이고 넷째 아들이 이천이었다.
명도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고 기억력이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남달랐다. 한 일화로, 작은할머니 임씨가 명도를 안고 있다가 비녀를 떨어뜨렸다. 며칠 후 임씨는 비녀를 찾아 헤매었는데, 이때 말도 못 하던 명도가 어떤 곳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보니 떨어뜨린 비녀가 있어 모두 놀라고 신기해하였다. 몇 년 후, 그의 뛰어난 능력은 시서(詩書)를 배울 때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시서를 한 번 보고 단번에 다 외웠으며 어린 나이에 “중심이 스스로 굳다면 외물이 어찌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06 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명도는 1057[인종(仁宗) 2]년 26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1066[영종(英宗) 3]년에는 진성(晋城: 중국 산시성 동남단의 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하였다. 백성들이 일 때문에 명도가 있는 곳으로 오면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일러주면서 연장자를 섬기는 법을 알려주었다. 환란(患亂)에는 서로 돕도록 하였고, 부모형제 없이 외롭고 쇠약한 사람은 친척이 책임지게 하였다. 학교 선생이 잘 가르치지 않으면 곧바로 교체하였으며 우수한 아이들을 골라 특별히 가르쳤다. 십여 년이 지난 후, 그들 대부분이 유자(儒者)가 되어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으며 명도가 부임한 후에는 강도나 싸우다가 죽는 사람도 많이 없어졌다.07 백성들은 그를 부모와 같이 받들었으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날에는 울음소리가 들판을 울렸다고 하였다.
명도는 우수한 통치력을 인정받아 1069[신종 2]년에 중앙관직인 감찰어사(監察御使: 관리의 규찰과 탄핵을 담당)에 임명되었다. 신종은 명도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여러 차례 불렀다. 명도와 신종은 군신 간에 편안히 응대하여 점심을 먹는 것조차 잊을 만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후로 명도는 신종에게 전통적인 유자의 정치적 태도와 천자가 갖춰야 할 것에 대해 말하였으나 신종은 결국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택하였다.08
왕안석이 속한 신법당과 사마광이 속한 구법당은 서로 정책적으로 대립을 이루었다. 명도는 신법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신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신종에게 대면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명도는 자신을 벌하여 달라고 하였지만, 신종은 그에게 형옥(刑獄)을 관리하는 관직을 내리는 정도로 그쳤다. 명도는 벌을 청하였는데 오히려 관직의 자리만 옮기니 처벌과 상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여겨 파직을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몇 년 뒤에 고향인 낙양으로 내려갔다.
신종 8년 10월 혜성이 나타나자 조정에서는 불길한 징조라 보고 해결방안을 널리 구하였다. 이때 명도는 조정의 정사를 절실히 논하여 상소를 올렸다. 명도가 쓴 것을 본 신종은 그를 중히 쓰려고 중앙관리로 부르려 하였으나 신법당의 반대로 지방관리인 부구현(扶溝縣)의 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지방관리로 있으면서도 틈틈이 왕에게 조언을 올렸다. 철종 즉위 이후 사마광이 집정자가 되어 명도를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진 그는 복귀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
명도는 북송오자의 한 사람으로 동생 이천과 함께 신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유학은 중국 송나라 때 발흥한 유가의 새로운 학풍으로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에는 도학(道學)이라 불렸으며 북송오자에 의해 시작되어 명맥을 이어오다가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후 송명이학(宋明理學) 또는 주자학, 성리학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신유학의 기초를 잡은 명도는 아버지 정향에 의해 동생 이천과 같이 15~16세부터 주렴계에게 배우면서 그의 학문은 시작되었다. 그는 주렴계가 도에 대해 논하는 것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 이후 도를 구하려는 뜻을 세웠다.
명도는 도를 얻기 위해 도가와 불가에 수년 동안 출입하였는데, 당대 학자들도 대부분 그와 같이 젊어서 노(老)·불(佛)에 심취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여러 학자와도 교류하였으며 친척인 장횡거(張橫渠, 1020~1077)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명도와 횡거가 질의 응답한 「답횡거선생정성서(答橫渠先生定性書)」에는 명도가 도가에 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만물을 보편적으로 대하되 무심하다(普萬物而無心)”라는 것이나 “만물에 순응하면서 무정하다(順萬物而無情)”09 라는 것 등 노장(老莊)에서 말하는 용어들로 노자(老子)의 사상이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명도는 불가에도 출입하였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의 저작 중 하나인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에 “석가가 말하는 도는 대나무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단지 바로 위쪽에만 힘써서 오직 한쪽만을 보고 사방을 보지 못하므로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없다.”10 라며 비판하였다. 명도는 도를 찾기 위해 도가와 불가에 드나들었지만 얻지 못하였고 결국 유가로 돌아와 육경(六經)11 에 이르러 도를 얻게 되었다.12
육경에서 도를 얻은 명도는 공자와 맹자 시대의 유학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하남정씨유서』에 명도가 『논어』, 『맹자』등의 내용을 공맹처럼 사람의 인성과 도덕에 대해서 논하는 등 사람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명도는 우주론을 말한 주렴계와 만물일체론을 주장한 횡거의 영향으로 공맹 사상에서 우주적 범주인 하늘까지 확장하여 설명하였다.
이후 천리(天理)를 체득하였다고 말하였다. 천리는 하늘의 이치로 모든 만물에 내재한 보편적 원리와 이치를 말한다. 이렇게 천리는 형이상적 원리로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 마음의 본체에 대한 개념들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자연의 이치란 춘하추동과 주야(晝夜) 등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도리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오륜(五倫) 등의 인간 도덕 규범을, 마음의 본체는 양심(良心)으로 발현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학문은 천리를 온전히 체득하고 공맹의 유학을 부흥시켜 끊어졌던 유학의 명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13
이렇게 천리를 체득한 명도는 이천과 함께 고향 낙양으로 가서 학문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명도는 목소리가 생기 넘치고 자애로워 사람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었으며 제자들도 많이 따랐다. 제자인 유립지(劉立之)가 말하길 “선생은 어질고 너그러우며 인자하였다. 선생을 따른 이후 30여 년 동안 일찍이 성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사람을 대할 때도 온순히 대하여 현명한 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그를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였다.”14고 하였다.
그의 성격은 온화하였지만 제자를 가르칠 때는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하였다. 당시 교육법은 대부분 경전을 암송하는 것이었는데, 명도는 스스로 생각한 방법으로 학생을 지도했다. 가르치는 순서를 정하여 제자를 교육하였고 방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따르지 않았으며 학생 스스로 유학의 진수(眞髓)를 체득하여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제자인 사량좌(謝良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도 선생은 시를 즐겨 말하였는데 장구(長句) 해석은 거의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완미(玩味)하고 상하의 음률을 음미하여 사람들을 깨닫게 하였다. 또한 시를 항상 읊었는데 자구(字句)에 대한 훈고(訓詁)를 내리지 않았으며 글자를 한두 개씩 바꿔 생각을 다르게 해보도록 하여 내용을 습득하게 하였다.”15 시를 논할 때뿐만이 아니라 『논어』나 『중용』을 설명할 때도 그렇게 하였다. 명도는 문인들과 경전의 뜻을 풀이하고 논의할 때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배척하지 않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배우는 자가 깨달으면 더욱더 잘하라고 북돋아 주었는데, 그의 말은 다른 사람을 깨우치는 힘이 있었다.16
명도와 관련된 저작은 『이정전서』를 기반으로 그가 직접 남긴 것과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명도가 직접 쓴 『명도선생개정대학』은 『대학』을 개정한 것으로17 그가 수정하기 이전에는 『시경』이나 『서경』에 나오는 문장들이 불쑥 인용되기도 하였고 고대 임금들을 찬양하는 말이 아무 설명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18 이렇게 두서없이 되어있던 부분을 명도가 최초로 개정하여 대부분을 해결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남정씨유서』, 『하남정씨외서(河南程氏外書)』, 『수언(粹言)』 으로 명도의 말을 글로 남겨놓은 어록이었다. 『하남정씨유서』는 1168(건도 4)년에 명도와 이천의 제자들이 기록한 『이정어록(二程語錄)』을 주희가 『하남정씨유서』라고 이름 붙여 모두 25권으로 편찬하였다.19 『하남정씨외서』는 주희가 『하남정씨유서』를 12권으로 다시 구성하여 편찬할 때 유래를 알 수 없고 잡다한 것에서 취하였다고 하여 『하남정씨외서』라 하였다.20 『수언』은 이천의 제자인 양시(楊時)가 『이정어록』을 보다 운치 있는 문장으로 고쳐 쓴 것이다.
이렇듯 명도는 여러 저작을 남기고 54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부음을 듣고서 그를 알던 사람이나 모르던 이나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21고 하였다. 그가 죽은 후 1220(가정 13)년에 순공(純公)이라는 호를 받았고 1241(순우 1)년에 하남백(河南伯)에 봉해져 공자 사당에 종사(從祀)되었다.22
정명도는 맹자 사후 끊겼던 유학의 명맥을 잇고자 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도가와 불가의 내용을 극복하는 신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자신이 체득한 천리를 철학의 최고 범주로 삼아 ‘리(理)’를 중시하는 송명리학에 영향을 미쳤다. 고향에서 이천과 강학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자신이 체득한 천리를 전하였다. 이천에 비해 내향적인 체험을 더 중시하였던 명도는 ‘심학’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명도의 이러한 공로는 이천에게서 맹자 사후 제 일인자라는 평을 받게 된다.
참고문헌
『이정전서(二程全書)』
『상채어록(上蔡語錄)』
『동몽선습(童蒙先習)』
강성률, 『동양철학사를 보다』, 서울: 리베르, 2015.
김기현, 『대학: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서울: 사계절, 2002.
김학주, 『중국의 북송시대』, 서울: 신아사, 2018.
장덕린, 『정명도의 철학』, 박상리ㆍ이경남ㆍ정성희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04.
허벽, 「정명도의 천리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01 『동몽선습(童蒙先習)』, “宋太祖 立國之初 五星聚奎 濂洛關閩 諸賢輩出 若周敦頤 程顥 程頤 司馬光 張載 邵雍 朱熹 相繼而起 以闡明斯道 爲己任.”
02 북송의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소강절이다.
03 『하남정씨문집(河南程氏文集)』, 권3, ‘秋日偶成二首’, “閒來無事不從容, 睡覺東窗日已紅. 萬物靜觀皆自得, 四時佳興與人同. 道通天地有形外, 思入風雲變態中. 富貴不滛貧賤樂, 男兒到此是豪雄.”
04 주자가 집록, 선별 , 편차 작업해 두었던 것을 1606년 명나라 학자 서필달(徐必達)이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05 장덕린,『정명도의 철학』, (서울: 예문서원, 2004), p.16 참조.
06 같은 책, p.17.
07 같은 책, p.250 참조.
08 왕안석의 신법(新法)은 전쟁 등으로 매우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둔 법이다. 이법은 왕안석(王安石), 채경(蔡京) 등 신법당(新法黨)의 정책이며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 집단 구법당이 있다. 구법당은 사마광, 한기(韓琦) 등이 중심인물이며 구법당의 관리는 주로 화북지방의 대지주나 대상인 출신자가 많고 그 정책도 보수적이다. 그에 비해 왕안석을 수장으로 한 신법당에는 남방의 하급 지위 출신자가 많고 정책이 혁신적이었다. 신법당을 중용한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이 재상에 오르면서 신법당에서 실시해 오던 신정책을 모두 폐지했다. [김학주, 『중국의 북송시대』,(서울: 신아사, 2018), pp.132~138 참조.]
09 허벽, 「정명도의 천리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p.24.
10 장덕린, 앞의 책, pp.61~62.
11 육경은 『역전』, 『시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이다.
12 장덕린, 앞의 책, p.64 참조.
13 허벽, 앞의 글, pp.144~153.
14 장덕린, 앞의 책, p.29.
15 『上蔡語錄』下, “伯諄常談詩, 並不下一字訓詁, 有時只轉卻一兩字, 點綴地念過, 便敎人省悟.”
16 『上蔡語錄』中, “明道終日坐如泥塑人,然接人則渾是一團和氣”
17 장덕린, 앞의 책, pp.51~52 참조.
18 김기현, 『대학: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서울: 사계절, 2002), p.39 참조.
19 장덕린, 앞의 책, p.35 참조.
20 장덕린, 앞의 책, p.38 참조.
21 장덕린, 앞의 책, p.32.
22 장덕린, 앞의 책, p.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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