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염락제현: 장재(張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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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4.23 조회5,797회 댓글0건본문
傳敎
…佛道中興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불도중흥 기후오백년거금약일천년전대송지시염락제현일시전도)
(교운 2장 26절)
1923(계해)년 도주님께서는 “이재신원(利在新元)”을 선포하시고, 지난 ‘원(元)’ 동안 가르침의 역사를 밝힌 〈전교(傳敎)〉를 내리셨다. 이에 따르면 초통(初統)에는 성군(聖君)이, 중통(中統)에는 성인(聖人)이 출현하였고, 계통(季統)에는 성인들의 가르침[敎]이 일시적으로 부흥하였는데, 위 『전경』 구절의 염락제현(濂洛諸賢)은 바로 계통의 중회(中會) 때에 활동한 중국 송(宋)나라의 여러 유학자를 말한다. 후대에서는 이들이 거주했던 곳, 즉 주돈이(周敦頤)의 염계(濂溪), 이정(二程: 정명도와 정이천)의 낙양(洛陽), 장재(張載)의 관중(關中), 주자(朱子)의 민중(閩中)을 가리켜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 불렀다.
염락제현은 당시 주류였던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사상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새로운 유학을 건설했던 인물들이다. 장재(張載, 1020~1077)는 그 신유학(新儒學)의 중심에 있었던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그가 생존했던 북송(北宋) 중엽은 송의 태조(太祖: 조광윤, 927~976)가 표방한 문치주의(文治主義)와 황제 독재의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지방군대와 국경수비대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는 요(遼)와 서하(西夏) 등의 침략에 막대한 조공으로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대내적으로는 국정의 폐단이 쌓여 개혁론에 대한 당파 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송대(宋代)에 형성된 신유학은 이와 같은 시대 배경과 무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장재를 통해 염락제현의 개별적인 인물 특성과 더불어 그들이 공유한 사상적 지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북송의 관료이자 관중 지방의 풍습을 일신했던 학자인 그의 학문과 사상은 어떤 면모를 갖고 있을까?
생애01
장재의 자는 자후(子厚)이다. 아버지 이름은 적(迪)이고, 전중승(殿中丞) 지부주사(知涪州事: 현재 사천성 부릉지방을 다스림)를 지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부임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온 가족이 봉상미현(鳳翔郿縣) 횡거진(橫渠鎭: 현재 섬서성 미현 횡거)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를 ‘횡거선생’이라 일컫는다. 장재는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다. 특히 병법(兵法)에 관심이 많아 항상 병서를 탐독하고 용병술을 의논했다.
당시에는 서북부의 서하(西夏)가 국력을 키워 북송의 변방을 자주 침략했다. 1040년 조정에서는 방어책으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을 섬서경략안무부사(陝西經略安撫副使)로 연주(延州: 현재 섬서성 연안)에 부임시켜 군사업무를 맡게 하였다. 당시 21세의 장재는 범중엄에게 편지를 써 전장에 나갈 뜻을 전했다. 그때 장재의 기국(器局)을 알아본 범중엄은 “유가에는 본래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가 있는데, 어찌하여 병법을 일삼으려 하는가”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읽을 것을 권했다. 장재는 『중용(中庸)』을 읽은 후 한동안 도를 구하기 위해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지만, 스스로 얻은 바가 없음을 깨닫고 유가(儒家)의 6경(六經)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불(道佛)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철학 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는 30세를 넘기자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관중 지방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056년 36세에 수도인 변량(汴梁: 현재의 개봉)에서 과거를 준비하며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는데, 어느 날 먼 친척 조카인 낙양의 이정 형제가 찾아왔다. 그들과 도학(道學)의 종지(宗旨)를 논의하고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다음 해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기주사법참군(祁州司法參軍), 단주운암현령(丹州雲岩縣令), 저작좌랑(著作佐郞), 첨서위주군사판관(簽書渭州軍事判官) 등 주로 변방의 군사 관련 지방관으로서 여러 공적을 쌓았다. 장재의 명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고, 그때 어사중승(禦史中丞) 여공저(呂公著, 1018~1089)가 “학문의 본원이 있으며 사방의 학자들이 그를 주종(主宗)으로 삼는다”고 하며 그를 조정에 추천했다.
1069년 49세 때에 황제인 신종(神宗, 1048~1085)이 중용하고자 했지만, 장재가 이를 극구 사양하여 숭문원교서(崇文院校書)에 임명되었다. 당시 장재는 구법당(舊法黨)02에 속하지 않았지만, 집정(執政: 내각의 최고 책임자)이었던 왕안석(王安石, 1021~1086)과의 대담에서 신법(新法)에 관한 의견 대립이 많아지자 왕안석의 반감을 사게 된다. 그는 조정에서 추방되어 절강성 동쪽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복귀하였다. 이때 그의 아우 장전(張戩) 또한 변법(變法)에 반대하여 왕안석을 비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는데 신법당(新法黨)의 공격을 받고 사죽감(司竹監)으로 좌천되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장재는 50세에 사직하고 횡거진으로 돌아가 학문과 교육에 힘을 다했다.
장재는 독서와 강학(講學)에 몰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을 구제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사회의 실제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유학의 경전에서 찾기 시작했다. 경제적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해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와 그 제도의 성공을 위해 봉건제(封建制)를 제시하고, 실제로 정전제를 작은 고을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종법제(宗法制)와 더불어 관혼상제에 있어 유가의 고례(古禮)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삼대(三代: 하·은·주)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1077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자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정치상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입궐하여 의례를 담당하는 태상예원(太常禮院)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낙양에서 이정 형제를 만났으며 도중에 병이 깊어져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남송(南宋)의 이종(理宗, 재위 1224~1264)은 1241년에 장재를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학문과 사상
송대의 잦은 외세 침략과 정치적 혼란은 소위 정통성에 입각한 전통사상의 재정립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대두시켰다. 즉 당시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문화적 사상적 과제는 출세간(出世間)적인 도교와 외래사상인 불교를 극복하고 원시유교의 정신을 부활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유가의 가르침이 참된 도(道)라고 주장하고 그 도는 유학의 전적(典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03 이들이 공유한 철학적 이념은 현세주의와 도덕주의의 정신, 즉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유학의 근본정신에 대한 확신이었다.04
장재 역시 송대의 신유학자들처럼 공자 사후에 전해지지 못한 유가의 도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강한 역사적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세계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철학적 근거와 함께 인간 사회의 윤리 실천에 대한 근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학의 바탕 위에 도·불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비판 수용하여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맞는 정교한 이론체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05 이러한 입장은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천(天)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06 는 장재의 말에서 분명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장재의 철학은 기(氣)를 중심으로 한 사유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의 우주론은 태허즉기(太虛卽氣)의 기일원론적 입장에서 설명된다.07 태허(太虛)로서의 기는 만물의 근원이 되며, 또 형이상학적 의미의 실유(實有)이다. 여기서 기는 우주 자체를 이루는 것으로 모든 존재는 기의 운동변화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장재의 기란 세계의 궁극적인 실체이고, 모든 존재를 이루는 근원이므로 태허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그 외연이 넓다. 장재는 “태허에는 기가 없을 수 없고, 기는 모여서 만물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만물은 흩어져서 태허가 되지 않을 수 없다”08 라고 하여 기에서 만물로, 혹은 기에서 태허로의 변화과정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항상됨이 없지만 기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장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생사 문제도 기의 취산(聚散: 모이고 흩어짐)으로 설명하고, 인간의 내면적 구조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09
장재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기의 취산에 의해 생겨날 때 가지게 되는 본성(本性)을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 부른다. 즉 만물의 본성과 하늘[태허]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천지지성을 품부 받은 인간과 사물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지우(智愚: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장재는 차별성의 원인을 형체를 가지게 된 조건인 기질(氣質)에 근거하여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기질지성과 천지지성이 별개의 성이 아니라, 천지지성이 기질의 차이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 기질지성이다. 따라서 기질의 극복을 통한 본연의 순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을 강조한다. 그리고 장재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심은 성과 정을 통섭한다)의 명제를 제시하고,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심(心)의 내면적 수양을 통해 그 태허 상태의 심의 모습을 간직할 것을 주장한다.
이로써 장재의 학문적 목표는 태허즉기(太虛卽氣)를 본체로 하는 우주론에 기초하여 인간의 심성론(心性論)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궁극적으로 유학이 지향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을 위해 장재는 “학문이란 반드시 성인(聖人)이 된 후에 그쳐야 한다(學必如聖人而後已)”고 강조했다.
저작과 학문적 영향
장재의 학문은 특별한 사승(師承) 관계가 없이 고심하여 얻은 독자적인 것이다. 1070년 관중에 돌아와 저술과 강학을 병행할 때 그를 따르는 제자와 학자가 많이 모였다. 이들을 관학파(關學派)라고 불렀는데, 『송원학안(宋元學案)』의 「횡거학안(橫渠學案)」과 「여범제유학안(呂范諸儒學案)」 등의 기록에 의하면 관학의 규모는 매우 컸고, 장재 사후에도 일정 기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삼여(三呂)’로 불리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만든 여대균(呂大勻)과 여대충(呂大忠), 여대림(呂大臨) 3형제가 있고, 이밖에도 소병(蘇昞), 범육(范育), 설창조(薛昌朝), 이복(李復) 등 다수의 제자가 있다.10 장재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전하나 저작 중 일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현재 『장재집』에는 제자 및 후대 학자들이 그의 문장을 정리·편집한 「정몽(正蒙)」, 「횡거역설(橫渠易說)」, 「경학이굴(經學理窟)」, 「문집일존(文集佚存)」, 「장자어록(張子語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장재는 사서(四書)와 『주역』, 『예기』 등 유가 경전을 망라하고 심지어 도불의 전적에서 배움을 구했다. 이러한 모색의 결과는 송대 신유학의 전개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학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송명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11 그가 기획했던 철학의 명제와 사유체계는 이후 이정을 거쳐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와 심학(心學)을 주창한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에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천지지성과 기질지성, 심통성정의 철학적 개념은 신유학의 인성론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장재의 철학사상은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존숭을 받았다. 특히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그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퇴계 이황(李滉)은 선조(宣祖)에게 성학(聖學)의 요점을 담아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장재의 「서명(西銘)」을 수록했다.
한 시대를 고뇌했던 장재에 대해 이정은 “맹자 이후 유학자 중에는 어느 누구도 그와 식견을 견줄만한 이가 없었다.”라고 평했다. 송대에 염락제현의 학문이 일시에 도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관학을 일으킨 장재의 역할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재가 제기한 유학자의 사명과 인생의 이상이 무엇인지 다음의 글이 그의 원대한 포부를 대변해 준다.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지나간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한 세상을 여노라(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
『장재집』, 「근사록습유(近思錄拾遺)」 중-
01 장재의 생애에 관해서는 『장재집(張載集)』에 수록된 「여대림횡거선생행장(呂大臨橫渠先生行狀)」과 「송사장재전(宋史張載傳)」을 참고하였다.
02 왕안석의 신법(新法)은 전쟁 등으로 매우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둔 변법이다. 이 법은 왕안석(王安石), 채경(蔡京) 등 신법당(新法黨)의 정책이며 이를 반대한 당파인 구법당이 있다. 구법당은 사마광, 한기(韓琦) 등이 중심인물이며 구법당의 관리는 주로 화북지방의 대지주나 대상인 출신자가 많고 그 정책도 보수적이다. 그에 비해 왕안석을 수장으로 한 신법당에는 남방의 하급 지위 출신자가 많고 정책이 혁신적이었다. 신법당을 중용한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이 재상에 오르면서 신법당에서 실시해 오던 정책을 모두 폐지했다. [김학주, 『중국의 북송시대』,(서울: 신아사, 2018), pp.132~138 참고.]
03 중국철학회, 『역사 속의 중국철학』 (서울: 예문서원, 2009), p. 254.
04 박경환, 「장재의 기철학적 천인합일사상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p.9.
05 함현찬, 『장재-송대 氣철학의 완성자』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3), p.31-32.
06 『장재집(張載集)』, 「횡거역설(橫渠易說)」, ‘설괘(說卦)’, “故思知人不可不知天能知天斯知人矣.”
07 『장재집(張載集)』, 「正蒙(정몽)」, ‘太和(태화)’, “太虛無形, 氣之本體.”
08 『장재집(張載集)』, 「正蒙(정몽)」, ‘太和(태화)’,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萬物不能不散而爲太虛.”
09 함현찬, 앞의 책, p.72-73.
10 함현찬, 앞의 책, p.36-38.
11 후외려 외 저, 『송명이학사1』, 박완식 옮김 (서울: 이론과 실천, 1993),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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