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신릉군(信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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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5.14 조회5,729회 댓글0건본문
전국시대는 주(周)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각 제후국이 무력과 지략을 경쟁하던 때이다. 진(秦)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6개 제후국[조(趙)·위(魏)·한(韓)·제(齊)·연(燕)·초(楚)]의 귀족들이 인재를 끌어들여 국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01이다. 전국사군자에 속하는 신릉군(信陵君, ?~기원전 243)은 위(魏)나라 소왕(昭王, ?~기원전 277)의 막내아들이자 안희왕(安釐王, ?~기원전 243)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위무기(魏無忌)02이다. 상제님께서는 『전경』 예시 59절 손병희의 만사(輓詞)03에서 그의 명성과 손병희의 명성을 비교하셨다. 과연 그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사기(史記)』의 「열전(列傳)」과 『전국책(戰國策)』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릉군은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기원전 276~243)한 후 안희왕에게 신릉(信陵: 현 하남성 영릉현) 지방의 영주로 봉(封)을 받고 얻은 봉호(封號)이다. 어느 날 신릉군과 안희왕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북쪽 경계선에서 봉화가 올랐다는 긴급전갈을 받았다. 왕과 대신들은 조나라가 침범해오는 것이라며 황급히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은 식객(食客)을 통해 이미 조나라 왕이 사냥하러 온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왕을 안심시키며 다시 여유롭게 바둑을 두었다. 이 일로 안희왕은 신릉군에게 조나라 왕을 정탐하는 식객이 있을 정도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신릉군을 경계하였다.04
신릉군에게는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이 있었다. 식객들은 신릉군이 자신의 권세를 내세워 선비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선비가 불초하더라도 겸손하게 예를 갖추었으므로 앞다투어 그의 식객이 되고자 하였다. 위나라에는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 준 후영(侯嬴)이라는 현자가 있었다. 후영은 높은 인격과 학식을 갖춘 70세 노인이지만 집이 가난하여 대량성(大梁城)의 이문(夷門)05을 지키는 문지기를 하였다. 신릉군은 그의 소문을 듣고 20근의 금을 주려 하였으나 그가 거절하자 연회를 열어 초대하기로 하였다. 신릉군이 직접 후영을 맞이하러 이문으로 수레를 몰았다. 신릉군은 후영에게 수레의 상석 자리를 내어주면서 예를 갖춰 대하였다. 그러나 후영은 연회장에 가는 길에 갑자기 시장에서 도살업을 하는 친구 주해(朱亥)에게 가자고 하고선 일부러 신릉군을 한참 동안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신릉군의 태도에 감동한 후영은 연회장에서 그의 인품과 덕행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의 식객이 되었다. 그 후 신분과 상관없이 인재를 극진한 예로 대하는 신릉군의 명성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06
안희왕 20년(기원전 257)에 진나라 소왕(昭王)이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여 조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신릉군의 매형(妹兄)인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은 안희왕과 신릉군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처음에 안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하려 하였으나 소왕의 협박이 두려워 진비 장군을 업(鄴: 현 하북성 임장현) 땅에 주둔시켰다. 이는 조나라를 돕지 않은 채 상황을 보고 행동하겠다는 의도였다. 안희왕의 의도를 눈치챈 평원군은 신릉군에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질책했다. 신릉군은 평원군을 돕고 싶었으나 안희왕이 반대하였다. 하지만 신릉군은 평원군과의 의리는 물론,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군사 없이 몇 명의 식객들과 함께 승산 없는 전쟁에 목숨을 바쳐 조나라의 멸망을 막고자 했다. 이때 후영이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싸울 수 있는 계책을 세웠다.07
후영의 계책은 왕의 허락 없이 진비의 군사를 빌리는 것이었다. 진비가 순순히 병권을 내놓지 않자 결국 주해를 시켜 그를 죽이고 신릉군은 그의 8만 군사들과 함께 진나라를 물리쳤다. 군사가 8만 명인 이유는 신릉군이 아비와 자식이 함께 군중에 있는 경우에는 아비를, 형과 아우가 함께 군중에 있는 경우에는 형을 위나라로 돌려보냈으며, 독자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사가 2만 명이나 줄었지만, 이러한 신릉군의 어진 정사 덕분에 군사들은 전심전력으로 싸울 수 있었다.
이 계책을 알려준 후영은 신릉군의 일행이 진비의 군영에 도착할 무렵 스스로 자결했다. 비록 조나라에 대한 의리는 지켰으나 위나라 안희왕의 명을 어기고, 진비의 병부를 훔친 후 그를 살해하였으므로 안희왕과 진비를 볼 면목이 없었던 후영은 자신의 목숨으로 신릉군에게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신릉군 또한 진나라군을 물리치고 조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다시 위나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군사들은 위나라로 보내고 자신과 식객들은 조나라에 10년 동안 머물면서 정세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조나라 효성왕은 구해준 보답으로 신릉군에게 5개의 성을 봉읍(封邑)으로 주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릉군이 잠시 교만함과 자부심을 보이자 그의 식객이 충언하였다. 신릉군은 충언을 즉시 받아들여 자신은 위나라를 배신한 자라고 스스로 자책하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효성왕은 그에게 호(鄗: 현 하북성 백향현)를 탕목읍08으로 주면서 조나라에 머물게 하였다.09
조나라에도 후영과 같은 현자가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도박하는 무리에 숨어지내는 모공(毛公)이며, 또 한 사람은 술을 파는 집에 숨어 사는 설공(薛公)이다. 두 사람은 신릉군을 만나려 하지 않았지만, 신릉군은 직접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평원군은 신분이 낮은 사람과 어울리는 신릉군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였다. 이를 안 신릉군은 평원군이 평상시 친구를 사귐에 진심으로 예우하지 않고 겉치레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조언하며 행장을 차려 떠나려고 하였다. 비록 평원군이 사죄하였으나 이 소문을 들은 평원군의 식객 절반가량이 신릉군에게 왔고, 천하의 선비들도 다시 신릉군을 찾아 왔기에 신릉군은 평원군보다 식객이 더 많아졌다.10
신릉군이 없는 사이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자 안희왕은 신릉군에게 귀국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안희왕의 보복이 두려웠던 신릉군은 위나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공과 설공의 설득으로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나라를 떠났다. 다행히 안희왕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에게 상장군(上將軍)의 관인을 주고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제후들은 신릉군이 상장군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파견하여 위나라를 도왔다. 신릉군은 5개국의 연합군11을 지휘하여 진나라 장군 몽오(蒙鷔)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추격하여 함곡관(函谷關: 현 하남성 신안현 동쪽에 있는 관문) 안으로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신릉군의 명성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각 제후의 식객들은 신릉군을 찾아와 목숨과도 같은 그들의 병법을 바쳤다. 신릉군은 그것을 하나로 모아 병법서를 만들었는데, 그 책이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고 한다.12
두 번이나 신릉군의 군사에게 대패하고 위태로움을 느낀 진나라 왕은 황금 만 냥으로 신릉군에 의해 살해된 진비 장군의 식객들을 매수하여 신릉군이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안희왕은 결국 그 소문을 믿고 신릉군의 상장군 직위를 박탈하였다. 왕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안 신릉군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운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의심과 모함뿐이었다. 신릉군은 허무함에 빠져 4년 동안 술과 여자로 세월을 달래다 결국 술독으로 죽고 말았다. 그해 안희왕도 죽었다. 신릉군이 죽은 지 18년(기원전 225) 만에 진나라는 위나라 도읍인 대량을 차지하고 위나라를 멸망시켰다.13
전국사군자 중에서 신릉군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의(仁義)를 중시하였으며, 덕(德)을 베풀었기에 그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제후들이나 식객들이 신릉군을 추앙한 이유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물론 진심으로 현자를 예우하였고, 곤경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간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고치려 하였기 때문이다. 식객들은 그런 그를 위해 목숨도 바쳤다. 신릉군의 어진 인품과 그의 무수한 식객들로 인해 당시 제후들은 안희왕 12년부터 30년(기원전 265~247)까지 18년 동안 감히 위나라를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한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02~195)은 미천한 시절부터 신릉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앙모(仰慕)하여 대량을 지나칠 때마다 꼭 신릉군의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만사(輓詞)에 이러한 신릉군의 명성을 손병희의 명성과 비교하셨으며,14 신릉군보다 손병희의 명성을 더 높이 평가하셨다. 부국강병을 추구하고자 한 신릉군과 손병희는 이러한 의지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15 신릉군의 이러한 명성으로 인해 결국 형인 안희왕의 질투와 오해를 받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신릉군의 인의와 덕은 후세에 계속 전해지면서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전경』
『사기(史記)』
『전국책』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유향, 『전국책(戰國策) 3/4』 , 임동석 역, 서울: 동서문화사, 2009.
이인호, 『이인호 교수의 사기』, 서울: 천지인, 2007.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서울: 이회문화사, 2010.
장자화, 『장자화의 사기 3』, 전수정 옮김, 파주: 사계절출판사, 2018.
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 下』, 서울: 현암사, 2007.
조성기, 『새롭게 읽는 전국책 2』, 서울: 동아일보사, 2004.
천쭈화이, 『중국을 말한다 4』 , 남희풍ㆍ박기병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8),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 초(楚)나라의 춘신군,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기원전 243)을 말하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도 한다. 이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널리 인재를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여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상제님께서 만사에 언급하신 ‘맹평춘신(孟平春信)’은 맹상군ㆍ평원군ㆍ춘신군ㆍ신릉군을 칭한 것이다.
02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서울: 이회문화사, 2010), p.854 참고.
03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로 만장(輓章)이라고도 한다.
“…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도다.
知忠知義君事君 一魔無藏四海民 孟平春信倍名聲 先生大羽振一新”
(지충지의군사군 일마무장사해민 맹평춘신배명성 선생대우진일신)
‘맹평춘신배명성(孟平春信倍名聲)’은 ‘손병희의 명성이 맹평춘신의 명성보다 배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04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43-244 참고; 이인호,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서울: 천지인, 2007), p.362 참고.
05 위나라의 도성인 대량(大梁: 현 하남성 개봉시)의 성에 있는 20개의 성문 중에서 동문을 뜻함.
06 사마천, 앞의 책, pp.244-245 참고.
07 같은 책, pp.245-249 참고; 조성기, 『새롭게 읽는 전국책』 (서울: 동아일보사, 2004), pp.535-551 참고; 유향, 『전국책(戰國策) 3ㆍ4』 , 임동석 옮김 (서울: 동서문화사, 2009), pp.1236-1237 참고.
08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가 목욕할 비용을 마련하도록 천자가 내린 곳이다.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는 목욕하여 몸을 깨끗하게 해야 했으며, 그 비용을 여기서 마련한 것이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실제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사한 봉읍을 가리킨다.
09 사마천, 앞의 책, pp.249-250 참고.
10 같은 책, pp.250-251 참고; 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 下』 (서울: 현암사, 2007), pp.362-364 참고.
11 연(燕)ㆍ제(齊)ㆍ조(趙)ㆍ초(楚)ㆍ한(韓) 나라.
12 사마천, 앞의 책, p.251 참고.
13 같은 책, pp.252-253 참고; 장자화, 『장자화의 사기 3』, 전수정 옮김 (파주: 사계절출판사, 2018), pp.196-197 참고.
14 예시 59절.
15 손병희에게도 신릉군의 식객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훗날 친일로 변절하였으나 손병희가 일본으로 망명하였을 때 돕고, 귀국 후 그를 대신하여 일제의 탄압 속에서 진보회의 운영을 맡았던 제자 이용구(李容九, 1868~1912), 손병희의 사위이자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한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삼갑운동(三甲運動)을 계획했던 적극적 성향의 독립운동가 이종일(李鍾一, 1858~1925)과 천도교 간부들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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