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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사명당(四溟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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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3,9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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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당 혹은 사명대사01로 널리 알려진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종봉(鍾峯), 사명당(四溟堂)이라 불렀으며, 유정은 그의 법명이다.   

  경상남도 밀양군 괴나리의 사대부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하였다.  

  그가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일곱 살 무렵 조부(祖父)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우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성현(聖賢)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13세 무렵에는 조선조의 문신으로 이름난 황여헌(黃汝獻, 1486 ~ ?)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수학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무언지 모를 공허함과 번민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황여헌에게서 『孟子』를 배우던 중 급기야 읽고 있던 서책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곧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번뇌 없는 학문에 뜻을 두고, 불가(佛家)에 귀의하기로 다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해에 예기치 못한 아버지의 죽음과 다음 해에 연이은 어머니 사망은 그의 다짐을 막아섰다. 결국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후, 16세가 되어서야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뜻을 펼치기 위해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간다.   

  한편 신묵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학동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유정(惟政)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사명당은 18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봉은사에 들어가 착실하게 불교공부를 하는 한편 많은 유생들과도 교유(交遊)하며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02 

  그의 학문영역은 불법만이 아니었다. 학사대부와 시인에서 조정의 고관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유·불·선을 넘나들며 광범위한 교유를 펼쳐나갔다. 이는 어린 시절 조부와 황여헌에게 배운 유교와 독서의 범위를 그들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중기의 시대상황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의 탄압이 극심하였다. 하지만 사명당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불법에 정진하여 30세 무렵 직지사 주지를 거치면서 불교계의 중진이 되었다. 그리고 32세 되던 해에 대중(大衆)의 요청에 따라 선종(禪宗) 본사인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천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명당은 이를 사양하고 대신 묘향산 보현사 주지인 서산대사(1520~1604)를 찾아가 설법을 듣고, 지금까지의 문장은 꾸며진 유희(遊戱)에 불과함을 깨닫고, 정법(正法)을 배우기 위해 서산대사의 곁에 3년 동안 머문다.   

  서산대사의 곁을 떠난 사명당은 금강산 만폭동의 보덕암에서 3년을 머문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해 동안 전국의 여러 명산03을 순례하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운수행각(雲水行覺)을 통해 수행을 하던 사명당은 43세 되던 봄에 옥천산의 조그만 암자[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常)의 법리(法理)를 크게 깨닫는다. 

  그 후 오대산에 들어가 월정사를 재건하고, 경인년(1590) 여름에 금강산 유점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명당이 유점사에 머문 지 두 해 여름이 채 지나기 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일본군이 유점사에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유점사에 침입하여 승려들을 결박하고 행패를 부리며 금은보화를 요구하였다. 불교문화가 발달한 조선의 고찰에는 반드시 금으로 만든 불상과 불구류(佛具類)가 많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까닭이다. 사명당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불교의 이치로 왜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후 대사는 왜적의 사나운 성질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다칠 것을 우려하여 고성읍(高城邑)에 주둔하고 있던 본부대로 찾아가 적장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글로써 당부하였다. 왜장은 대사의 훈계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를 그곳에서 3일 동안 지성으로 공양하고, 떠날 때는 성 밖까지 사명당을 배웅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영동지방의 아홉 고을 백성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승려[의승군]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7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처음에는 금강산에서 왜적을 만나 불법의 자비사상으로 왜장을 설득하여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두었으나 조선 전국에 퍼져 유린하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침략은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사명당이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고심하고 있을 때, 마침 조정에서 보낸 근왕문과 서산대사의 격문04을 받고 의승병(義僧兵)을 일으킬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중에 있는 승려들을 선동(煽動)하여 2,000여 명의 의승병을 조직하고,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 전투(1593)에 참가하였다. 사명당은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한편, 그해 3월에는 서울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대승의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 전공을 높이 사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05하였다.   

  1494년 4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자 사명당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강화사(講和使)가 되어 울산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찾아가서 교섭을 벌이게 된다. 사명당은 왜적의 영중에 들어가 적의 사정을 정탐하고, 가토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여러 가지 외교적 성과도 거두었다.06  

  사명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갑오년(1594)과 을미년(1595)에 상소를 올렸다.07 그 후 다시 있을지 모를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해 영남지방으로 내려갔다. 경북 성주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축조를 시작으로 전국에 산성을 축조했다. 이때 이미 사명당은 왜적의 재침략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왜적의 증원군이 오기 전에 군사를 재정비한 후, 그들을 급습하여 승기(勝機)를 잡는 것.”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적진의 정황을 정확히 꿰뚫고 정곡을 집어낸 상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섣불리 공격하여 적의 분노를 돋우지 말자는 대답을 내놓았다. 게다가 사명당의 말을 외면하고 오히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명당의 예견은 적중하여 전 국토가 정유재란(1598)08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의 추격 속에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1592년에 시작된 7년간의 전쟁이 종결, 선조는 사명당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격시켰다.  

  전쟁 종결 이후 사명당은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잡혀간 3,5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하였다.09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을 일기로 설법도중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ㆍ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1995  

ㆍ조영록, 『사명당평전』, 한길사, 2009 

ㆍ최문정, 『임진록연구』, 박이정, 2001  

ㆍ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1995 

<대순회보>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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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유정을 높여 부르는 말. 

02 유정은 당시 재상의 위치에 있었던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이두[李白ㆍ杜甫]의 시(詩)도 배웠다. 

03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04 특별한 경우에 군병을 모집하거나 널리 일반에게 알려 부추기기 위한 글. 

05 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바로 벼슬을 시킴. 

06 사명당과 가토의 회담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화를 허균의 「석장비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토가 대사에게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하고 물었는데, 대사는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대의 머리를 보배로 보고 있으니 보배는 일본에 있는 셈이다.” 하니 가토가 탄복하며 놀랐다고 한다.   

07 갑오상소에서는 전쟁과 화의에 대한 것이다. 을미상소는 가토와의 회담에서 적진을 정탐한 내용과 함께 강화는 어디까지나 고식적인 처방에 불과한 것이며, 시국의 폐단을 바로잡는 개혁에 대한 내용과 가장 절실한 방안은 적을 쳐서 부수는 데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08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09 『임진록』에는 사명당이 선조의 명을 받고 강화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의 항복을 받는 과정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해용왕이 저은 배를 타고 순식간에 일본에 도착한 사명은 생불이 왔다고 왜왕에게 알렸다. 왜왕과 그의 신하는 사명당을 시험하였다. 사명당은 말을 타고 지나가며 병풍에 쓰여 있는 1만 5천 자의 글을 모두 외우고, 불에 달군 무쇠 방에서 견디고, 연못에서 구리방석을 타고 다녔다. 그리고 달군 무쇠 말을 타게 하자 사해용왕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하여 왜국을 물바다로 만드는 이적을 보이자 왜왕과 그의 신료들은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부자지국(父子之國)의 항복문서와 인피조공(人皮朝貢)의 약속을 받아내고 비를 그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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