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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우암(尤庵)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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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4,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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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렬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상제를 모시고 있었도다. 그러던 어느날 형렬이 상제의 말씀 끝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라고 아뢰니…(행록 1장 36절)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요,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아버지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와 어머니 선산 곽씨(善山郭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永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 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기에 세간에는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 살 때 이미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 8살 되던 해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고,01 12세 때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게 되었다.   

  1625년(인조 3)에는 도사(都事)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에 사는 김장생(金長生, 1548~1631)02에게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사망한 뒤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27세(1633)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고, 송시열은 인조(仁祖)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때 19세의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결국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여 전쟁이 끝나고 남한산성에서 나온 송시열은 황간(黃澗) 냉천리(冷泉里)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학문에만 정진하게 된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고자 군비확충과 군사 훈련강화에 전념하였다. 이때 효종의 정책에 따라 산림(山林)의 재야 학자와 척화파(斥和派)를 대거 기용하면서, 김집의 추천으로 송시열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의 관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함)와 복수설치(復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의 중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03 그러나 김자점 등이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은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후 1653년에 충주목사, 1654년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시 1658년 7월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북벌 계획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자의대비의 복제(服制)문제로 예송논쟁(禮訟論爭)04이 일어나면서 그해 12월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이후 1668년에 우의정과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은거한다. 비록 송시열은 재야에 있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1674년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으로 인한 제2차 예송05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西人)들이 패배하자 그들은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경상도 장기(長)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는데, 남인(南人)들이 가중 처벌을 주장함에 따라 유배 기간 중에 죽음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06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어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종신토록 녹봉을 받는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송시열은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척신세력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비난을 받기에 이른다. 이 일을 계기로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를 겪었고, 1683년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4)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아울러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禧嬪)으로 책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그때 송시열은 83세의 나이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당시 조선에서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따라 명나라를 높일 것과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 자신의 뜻에 따라 문인 권상하에게 만동묘(萬東廟,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소재)를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 후인 숙종 20년에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년)07으로 폐비 민씨의 복원을 반대하였던 남인이 대거 실권하고, 다시 서인(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모든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와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1756년(영조 32)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고, 1776년에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것을 명함으로써, 마침내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모두 공인되기에 이른다.   

  그는 문묘 외에도 전국 23개의 서원과 9개의 사우(祠宇)에 제향되었다. 그중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大老祠)는 한강변에서 효종의 묘인 영릉(英陵,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소재)을 마주보고 서 있다. 당시 정조는 대로사의 비문을 직접 써주고, 국비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최고의 유학자로 훗날 ‘송자(宋子)’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도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왕족실록』에 3천 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기에, ‘정계의 대로(大老)’, ‘동방의 주자’ 등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 신봉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총 8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암이 평생 존경해 마지 않은 주자(朱子)의 제자도 44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우암이 누렸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알게 하는 일면이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에 간행된 『우암집(尤庵集)』 167권과 1787년에 출간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참고문헌>  

ㆍ『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  

ㆍ『우암 송시열』, 국립청주박물관, 2007 ㆍ이종호, 『우암 송시열』, 일지사, 2000 

ㆍ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0 ㆍ현상윤, 『조선유학사』, 현음사, 2003  

<대순회보> 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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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송준길(1606~1672, 호 동춘당)과 이를 계기로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된다. 

02 본은 광산이고, 호는 사계(沙溪)이다.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로부터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예학에 관해서는 당대 제일의 인물로 평가된다.  

03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북벌(北伐)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래서 김자겸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숙청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길준 등의 반청파(反淸派) 문신과 이완, 유혁연 등의 장수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북벌의 의지는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04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함에 따라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왕이나 장자(長子)가 아니므로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차자(次子)이지만 인조의 뒤를 이은 왕이므로 참최복(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 간의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마침내 기년복으로 일단락되고 남인세력이 대거 축출된다. 

05 2차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에 대해 서인은 차자비(次子妃)로 보는 9개월설(대공설)을, 남인은 장자비(長子妃)로 보는 1년설(기년설)을 주장하였다. 현종이 기년설을 채택하면서 다시 남인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06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한 사건.  

07 갑술환국은 노론의 김춘택(金春澤), 소론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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