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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손빈(孫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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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4,0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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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저술한 손무(孫武)의 후손으로 알려진 손빈(孫臏)은 제(齊)나라의 아(阿)와 견(甄) 지방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도 일찍이 부모를 여읜 후 친척집에서 살며 온갖 고생을 했다는 것 외에 알려진 내용이 없다. 손빈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은거현인(隱居賢人) 귀곡자(鬼谷子)에게서 병법을 수학(受學)할 때부터이다. 

  손빈이 귀곡자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던 때에 방연(龐涓)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두 사람은 동문수학하며 3년을 함께 보냈는데, 방연이 훗날 성공하면 반드시 손빈을 찾겠노라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하산을 하였다. 그러자 귀곡자는 손빈에게 『손자(孫子)』 13편을 내주었다. 평소에 손빈의 인품과 학식을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방연의 시기심을 염려하여 그때까지 보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빈은 스승의 배려에 감사하며 손무의 병법을 익혀나갔다.   

  어느 날 방연에게서 손빈을 초청하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손빈은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편지를 보내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행장을 꾸려 위나라로 향했다. 그리고 혜왕(惠王)을 알현한 후, 문답(問答)을 나누고 나서 객경(客卿)으로 임명되었다.  

  반년 후, 제나라 사람 한 명이 손빈의 사촌형에게서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그를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집안 사정이 어렵게 되어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비통해졌다. 그러나 한 나라의 벼슬에 매인 몸이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빈은 지금 바로는 갈 수 없다는 내용의 답장을 써서 편지를 가져온 사람 편에 보냈다.   

 

  이튿날, 방연이 손빈을 찾아왔다. 

  “형님,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고 들었는데 왜 가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온당치 않은 것 같아 가지 않았네.”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여러 해이고 집안과도 줄곧 연락을 못 했지 않습니까? 굳이 편지까지 보내왔으니 돌아가서 뵙는 것이 도리지 않겠습니까? 왕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주저하고 있던 손빈은 방연의 권유에 힘을 얻었다. 다음날 혜왕을 찾아가 두 달간의 휴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혜왕은 손빈이 위나라의 기밀정보를 빼내 제나라에 전해주기 위해 가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압송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손빈은 그 자리에서 결박당한 채 옥사로 끌려갔다. 한참 후에 당황한 기색의 방연이 찾아왔다.  

  “왕이 진노하여 기필코 형님을 죽이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극구 간청하여 목숨만은 부지시켜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형벌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맙네. 진심으로 나를 염려해주는 것은 자네밖에 없는 듯하네.”  

 

  손빈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을 위해 힘써준 방연이 고마웠고, 지금으로써는 왕의 오해를 풀 길도 없어서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그는 빈형(臏刑 )01과 묵형(墨刑)02을 당하였다. 손빈은 방연이 집으로 데려가서 간호를 해주자 따뜻한 보살핌에 감격하였다. 그래서 방연이 『손자』의 필사(筆寫)를 부탁하자 보은(報恩)할 생각으로 흔쾌히 수락하였다. 동문을 위하여 힘겹게 붓을 놀려가던 어느 날, 그의 수발을 들어주던 시종이 충격적인 진실을 말해주었다. 방연이 가짜편지를 만들어 손빈에게 보냈고, 그것을 빌미로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형벌을 당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사가 끝나는 대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손빈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동안 작업한 필사본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날만 밝으면 온 시장 바닥을 두 팔로 기어 다니다 돼지우리에 들어가 잠을 자곤 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미(珍味)를 들고 와서 그를 곧 구해주겠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나 손빈은 음식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리고는 분뇨를 한 움큼 집어 들어 고개를 처박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방연이 손빈을 찾아오는 일이 없어졌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제(齊)나라에서 사신(使臣)이 왔다. 손빈은 몰래 사신을 만나 병법에 관해 유세(遊說)를 하였다. 사신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그의 재능이 출중함을 알아보고, 몰래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데려 갔다.03 손빈이 당도한 곳은 제나라 장군인 전기(田忌)의 거처였는데,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아 빈객으로 예우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전기는 자주 제나라의 공자(公子)들과 경마(競馬)로 큰 도박을 하곤 하였다. 손빈은 그 말들의 주력(走力)에는 별 차이가 없으나 상, 중, 하의 등급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전기에게 반드시 이기게 해줄 테니 큰돈을 걸라고 하였다. 전기는 그를 믿고 제나라 위왕(威王)을 비롯한 여러 공자들과 함께 천금(千金)을 걸고 시합 일정을 잡았다.   

  마침내 시합 때가 되자 손빈은 “지금 장군의 하등 마와 상대편의 상등마를 겨루게 하고, 다음 차례에 장군의 상등 마와 상대편의 중등마를 겨루게 하고, 마지막에는 장군의 중등 마와 상대편의 하등마를 겨루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세 번의 시합이 끝나자 전기는 2승 1패로 승리하여 천금을 얻게 되었다. 위왕이 승리의 비결을 묻자 전기는 손빈의 기지 덕분임을 알려주며 그를 천거하였다. 왕은 손빈과 대담한 후, 크게 경탄하며 스승으로 삼았다.   

  기원전 353년에 위(魏)나라가 방연을 대장군으로 세워 조(趙)나라를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위왕(威王)이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고 하자 그는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 자가 장군이 될 수 없다며 극구 사양하였다. 왕은 그의 대답에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은 군사(軍師)로 삼아 천막을 친 수레 안에 들어앉아 계략을 짜도록 하였다.   

  전기가 병사들을 이끌고 조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은 “엉킨 실타래를 풀 때는 가닥을 힘껏 잡아당기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싸울 때 말리려고 직접 뛰어들면 오히려 싸움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전투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허실을 살펴 실한 곳을 피해 허한 곳을 공격해야 합니다. 지금 위나라의 정예 병사들은 모두 조나라를 침공하러 갔으므로 국내에는 노약자들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속히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大梁)으로 진격하여 그 요로를 장악하고, 방비가 허술한 곳을 공격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조나라를 포기하고 자기 나라를 구하러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조나라의 포위를 풀어주고 위나라를 피폐하게 할 수 있는 상책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전기가 손빈의 전략대로 하자, 과연 위군(魏軍)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회군하던 위군은 계릉(桂陵)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나라의 정예 병력과 맞닥뜨려 교전을 벌였으나 대패(大敗)하고 만다. 

  그로부터 13년 후, 위(魏)ㆍ조(趙) 연합군이 한(韓)나라를 침공하였다. 한나라는 즉각 제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제나라 위왕은 전기를 파견하여 대량(大梁)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위군(魏軍) 수장이었던 방연은 이 소식을 듣고 한나라를 떠나 본국으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군(齊軍)은 이미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한 상태였다. 손빈은 전기에게 위나라 땅에 들어서면 군사들에게 10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다음날에는 5만 개, 또 그 다음날에는 3만 개를 만들며 이동하는 전략을 쓰라고 했다. 

  전기는 손빈의 말대로 행하며 진군(進軍)을 계속했다. 방연은 추격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보병들을 떼어놓고 날렵한 정예 부대를 구성했다. 그리고는 이틀 거리를 하루에 달리며 제나라 군을 급히 추격하였다. 손빈이 어림잡아보니 저녁 무렵이면 그들이 마릉(馬陵)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협소하고 양쪽으로 험한 산이 많아 병사들을 매복시키기에 좋았다. 손빈은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거기에 “방연, 이 나무 아래에서 죽다(龐涓死于此樹之下)”라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만 명을 골라 길 양쪽에 매복시켰다. 

  손빈의 예상대로 그날 밤, 방연이 마릉에 도착하였다. 계속 행군하려고 했지만, 길 앞에 웬 하얀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나무 밑으로 걸어간 방연은 무언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을 밝혔다. 그러자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이 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흩어졌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손빈에게 미치지 못하여 결국 싸움에 패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결국 저 풋내기의 명성을 세워주고 말았구나!”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04 제나라 군은 이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위나라 군을 전멸시키고 위나라의 태자(太子) 신(申)을 포로로 잡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큰 공로를 세우게 되어 이름을 높이게 되었으나 위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은둔(隱遁)하면서 『손빈병법』을 저술하였는데, 병서가 완성되자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ㆍ韓國學資料院 普及, 『二十五史』「史記 券65 - 孫子吳起列傳 第5」, 韓國學資料院, 1985  

ㆍ강용규, 『인물로 보는 중국사』, 학민사, 2000 

ㆍ정범진 외 譯, 『사기(史記) 5 - 열전(列傳) 上』, 도서출판 까치, 2003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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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기(史記)』의 원문에는 ‘단기양족(斷其兩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실제로는 두 다리를 자르는 월형(刖刑)을 받은 것이다. 손빈의 본명이 빈(賓)이었는데, 사람들이 형벌을 받은 그를 보고 월(月)자를 붙여 빈(臏)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원문과 다르게 무릎의 슬개골을 들어내는 빈형(臏刑)을 받았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는 이유는 ‘빈(臏)’이라는 별칭이 생기는 과정에서 혼동이 생기며 와전된 것으로 추측된다. 

02 얼굴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죄인임을 표시하는 형벌. 원문에는 ‘경(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묵형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黥刑≒墨刑)  

03 이 부분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손빈의 재능과 딱한 처지에 대해 알게 된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가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를 구출하도록 했다는 설도 있고, 묵자(墨子)의 제자인 금활리(禽滑釐)가 그를 구하기 위해 순우곤에게 부탁하여 제나라로 갔다는 설도 있다. 원문에서는 그저 ‘손빈이 몰래 제나라 사신을 만나 유세하였다’라고만 적혀 있는데, 손빈의 처지에서 일국의 사신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직접 손빈을 구출하기 위해 힘을 썼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으나 그 발단을 찾을 수가 없어서 원문의 내용대로 기술하였다.  

04 방연의 최후에 대해서는 날아오는 화살들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에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거나 찔러 죽거나,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의 ‘자경(自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원문에 따라 기술하였다. (自剄≒自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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