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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제갈량(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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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3,9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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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량은 후한 말인 영제(靈帝) 광화 4년(181)에 낭사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01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외척과 환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 속에 내정(內政)은 극도로 혼란해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농민의 난이 끊임없이 일어나 수없이 사람이 죽어 열 명 중 한 명이 살아남는 시절이었다. 

  제갈량02의 고향인 낭사군 양도현은 원래 태산(泰山)의 북쪽에 위치한 제(濟)나라에 속하던 곳으로 태산 남쪽에 위치한 노나라와 더불어 빼어난 인물을 배출하여 중국 문명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곳이다. 이곳은 비교적 전란의 피해가 덜했는데 군벌 간의 혼전은 마침내 이곳 낭사까지 파급되었다. 4살에 모친을, 8살에 부친을 여의어 고아가 된 제갈량은 12살 되던 해 예장 태수로 부임된 숙부를 따라 남하하였다. 숙부가 세상을 떠난 후 형주(荊州) 남양(南陽)의 산촌 융중(隆中)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간 이곳에서 주경야독을 하며 많은 책을 독파하였고 전란을 피해 전국에서 몰려든 많은 현인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는 천하를 평정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시대를 초월한 큰 업적을 남기고 싶은 큰 꿈을 가슴에 품은 와룡(臥龍)으로 성장해 갔다. 당시의 학문은 주석(註釋) 위주의 훈고학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제갈량은 상세한 주석 위주의 정독보다는 그 뜻의 대의를 파악하는 공부 방법을 택하였다. 그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여 훗날 승상이 되어서는 정치ㆍ외교ㆍ군사ㆍ경제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제갈량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교의 전통적인 민본사상인데 그가 태어나 자라온 환경이 외척과 환관 그리고 군벌 간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을 몸소 체험한 데서 저절로 나온 것이었다. 그 외에 도가나 법가 사상의 장점을 두루 섭취하여 그만의 독특한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융중에서 그는 많은 현인들과 사귀게 되었고 자연히 그의 명성이 그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오직 한실부흥을 기치로 조조와 대항하려 하는 유비가 있었다. 

  유비는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 사람으로 한나라 경제의 아들 산정왕(山靖王) 유승의 후손이다. 황실의 먼 종실이지만 집안이 대를 거듭할수록 쇠락하였고 부친은 일찍 죽어 모친과 함께 돗자리를 짜거나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유비는 평소 말수가 적고 사람들을 잘 단합시켰고 호방한 기운이 쇠하지 않아 그의 주변에는 많은 인사들이 왕래하였다. 그는 영웅의 재질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깊이 얻었다.

  관도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가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조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꼈다. 역부족을 느낀 유비는 장막 안에서 천리를 내다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다. 주변인물의 소개로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량을 만나게 되었다.

  제갈량은 유비와 첫 대면에 마음이 끌려 그가 평소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천하통일의 계책을 털어 놓게 된다. 이른바 융중대책(隆中對策)이다. 이는 훗날 촉한 정권의 정치적ㆍ외교적 지침이 되었다. 이 대책의 핵심 내용은 당시의 정치적ㆍ군사적 형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토대로 적으로 삼아야 할 대상과 동지로 삼아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힘을 기른 뒤 적절한 때를 선택하여 최종적인 북벌을 하여 천하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계책을 들은 유비는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조조가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하여 곧 천하가 그의 손에 들어 갈 것만 같았던 시기에 그의 대책은 참으로 대담하고 절묘한 계책이었다. 그는 천명을 너무 맹신하지 말고 사람의 모의(謀議)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그는 이미 첫 만남에서 천하를 통일할 계책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조조가 이끄는 대군(大軍)이 형주로 남하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비와 제갈량은 융중대책에 이미 서 있었던 대로 오와 연합하여 이에 대항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은 조조 군대가 큰 형세에 비해 허점이 많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분석하여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 대항하려는 마음을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조조는 관도싸움에서 원소의 10만 대군을 3만으로 격파했고 그 여세를 몰아 형주를 쉽게 점령하여 교만한 마음이 생겼다. 유비는 고려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고 손권 역시 일격에 끝장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조의 10만 군대와 연합군의 3만 군대는 적벽에서 마주쳤다. 첫 전투에서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조조군은 멀미로 구토를 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배를 서로 연결해 연환선(連環船)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동(起動)에 불편을 주어 화공(火攻)에 취약하게 되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화공은 주유와 황개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거짓항복으로 경계심을 늦추게 한 다음 마른 갈대와 장작 그리고 쇠고기 기름을 실은 배를 신속하게 조조의 연환선에 접근하게 했다. 그러나 변수는 바람이었다.

  때는 겨울로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었다. 북서풍은 바람이 연합군 쪽으로 불어 화공이 무의미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공격의 시점이 되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동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제갈량이 칠성단을 쌓고 7일간 빌어 동남풍을 불게 했다고 묘사한다. 이는 적벽지방에 전해오는 전설을 토대로 한 것으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동남풍이 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정확한 시점의 예측이 문제이다. 우연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길 기대하여 화공을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람이 바뀔 것을 믿고 화공 작전을 진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천문ㆍ지리의 공부가 기상 예측이 가능한 정도인지 역사적 기록이 없어 가늠하기가 어렵다.

  조조의 군은 불길을 뚫고 오림(烏林)에서 화용(華容)쪽으로 길을 택해 강릉방향으로 퇴각했다. 유비와 주유의 군대는 추격해 강릉을 포위했다. 이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제갈량은 조조가 화용도로 패퇴하여 달아나는 길을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관우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조조를 화용도에서 붙잡으나 관우는 전에 조조가 자신을 풀어 준 적이 있어 목숨을 구걸하는 조조를 놓아 주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진수(陳壽)의 『삼국지』03에 의하면 조조가 화용도에서 매복하지 않은 것을 비웃었다고 하는 대목만 있다. 

  결국 적벽 대전에서 연합군이 대승을 한다. 이는 외교와 전략의 승리로 이로써 제갈량은 융중대책대로 천하를 정족(鼎足)의 형세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제갈량의 정책은 융중대책 이후 일관되게 서쪽을 기반으로 삼고 남과 동쪽과는 화친하며 내적으로 힘을 기른 다음 북벌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 승리 후 형주의 귀속(歸屬)문제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고 결국 이 문제로 오와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형주는 양분되어 귀속하게 되었고 촉한은 그 한 쪽을 관우에게 맡겼다. 촉이 중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형주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오는 촉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여러 차례 계략으로 나머지 반을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간파당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손권은 자기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켜 안전을 도모하고자 관우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관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손권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형주는 손권과 조조의 협공으로 함락 당하게 되었다. 관우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비는 이에 흥분하여 오와 이릉에서 전투를 벌이나 결국 패하게 되었다. 이로써 촉과 오의 동맹은 깨지게 되었다. 이는 촉한의 입장에서 전체의 형국에 치명적 타격이었고 제갈량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 후 제갈량은 촉한의 승상이 되었고 유비가 사망한 후에는 정국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관직을 줄이고 법제를 손질하였으며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생산력을 발전시켰고 인재를 선발해 각급 기구에 충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관우가 사망한 후 깨졌던 오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남중(南中)의 반란을 평정하여 주변의 우환을 없앴다. 대내외적으로 안정이 되자 북벌에 나서기 위해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린다. 출사표에는 예리한 정치적 안목으로 평소에 그가 품고 있던 치국의 방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구절절 제갈량의 간곡하고 성심어린 마음이 잘 묻어나 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건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남중을 정벌하였을 때도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 주었다는 일화가 있었고, 1차 북벌에서도 관우가 형주성에서 패배하였을 때 위나라로 달아났던 맹달에 대한 회유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1차 북벌은 전략적 요충지인 가정(街亭) 전투에서 판가름 났다. 누가 선봉장에 설 것인가에 대한 대중의 의견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위연과 오일 등을 추천했지만 제갈량은 평소에 군사 계책을 논하기 좋아하는 마속을 선택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친구의 동생으로 평소 자주 왕래가 있어 그와 대화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제갈량은 그가 재주와 그릇이 남다르고 군사 전략적 지식이 특출나다고 여겼다. 그러나 유비는 생전에 그가 말이 지나쳐 중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제갈량에게 유언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장으로 세우는 것이 다소 걱정이 되어서 실전 경험이 많은 왕평을 부관으로 붙여 보냈고 산 정상에 매복하지 말고 산 아래에 매복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는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 정상에 군대를 매복했다. 그러자 위의 군대는 산 아래에 진을 치고 공격하지 않고 시일을 끌면서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략으로 맞서 마속의 부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제갈량은 군법을 어긴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참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유선에게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아 일을 그르친 것이라 상주(上奏)하여 세 등급 강등을 청했다. 제갈량은 가정에서의 패배 후에도 군대를 재정비 한 후 4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했다. 그러나 위는 조조의 유언에 따라 수비를 굳건히 하다가 적이 지쳐 물러날 때를 기다려 공격하는 전략을 고수하였다. 촉한의 군대는 먼 거리를 행군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치고 식량 운반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적이 나와 싸우지 않음에 점점 초조해졌고 업무의 과로로 인해 중병에 걸려 오장원(五丈原)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때는 촉한 건흥 12년(234), 그의 나이 54세였다. 한 시대의 걸출한 전략가이며 정치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그는 한실 부흥이라는 대업을 이루지 못한 채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묻어 둘 것을 유언했다. 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을 등한시 하지 말고 북벌을 계속 실천해 줄 것을 요청한 듯하다. 그는 「계자서(誡子書)」에서 수신과 덕을 쌓아가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군자가 행동하는 데는 고요함으로써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써 덕을 기르니,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영정(寧靜)하지 않으면 멀리 내다볼 수 없다.”  또한 학문을 닦고 배움을 넓히는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배우는 데는 반드시 고요해야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재주를 넓힐 수 없으며, 뜻이 없으면 배움을 완성할 수 없다.” 

 

참고자료 

. 여명협, 『제갈량 평전』, 지훈출판사, 2007.

. 박윤규, 『재상(宰相)』, 이가서 출판사, 2005.

. 『二十五 史 2』, 상해고적출판사. 

<대순회보>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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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중국역사지도집』에 의하면 지금의 산동성 기남현 황탄촌 일대.

02 제갈(諸葛)은 원래는 갈(葛)씨인데 진(秦)말 진나라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을 도운 공을 치하하여 한나라 문제 때 그 손자를 제현(諸縣)의 제후로 봉(封)한 데서  제갈씨가 되었다.

03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의 무제기(武帝記) 편과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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