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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대한(大寒) 절후를 관장하는 두여회(杜如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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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6 조회3,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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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여회(杜如晦, 585~630)의 자(字)는 극명(克明)이고 경조(京兆, 현재 섬서성 서안) 두릉(杜陵)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 과(果)는 북주(北周)01와 수(隋)대에 유명 인사였다. 여회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풍류(風流)를 즐길 줄 알았다. 수(隋) 양제(煬帝) 대업(大業, 605~616) 연간에 이부(吏部)의 관리 선발에 응모하였는데 시랑(侍郞, 현재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인 고효기(高孝基)가 그를 비범하게 여겨 “그대는 마땅히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터이니 부디 밝은 덕을 잘 보존하시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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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년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장안을 평정하였고 이때 진왕(秦王) 이세민이 두여회를 데려다 진왕부(秦王府)의 병조참군(兵曹參軍)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섬주(陝州) 총관부(總管府) 장사(長史)로 옮기었다. 이때 두여회의 나이 33세였다.

 

당시는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이 진압되지 않아서 진왕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외지(外地)로 옮겨 다니는 자가 많으니 이세민이 이를 염려했다.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이 말하기를 “떠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까워하실 것없습니다. 여회만이 왕을 보좌할 재목입니다. 대왕께서 변방을 지키는 일로 평생을 마치시려 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신다면 여회를 버리고 누구와 더불어 공을 세우시겠습니까?” 이세민이 놀라서 답하기를 “그대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놓칠 뻔하였소.”라고 하고는 두여회를 발탁하여 진왕부에 머물게 하였다. 두여회는 이때부터 4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세민의 최측근에서 그를 보필하였다.

 

당의 성립 초기 주요한 전투에는 거의 이세민이 출정하였다. 그때마다 두여회는 항상 따라 다녔고 군중(軍中)의 비밀회담에도 늘 참여했다. 당시 군중(軍中)에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두여회가 다 잘 처리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인재로 여겼으며 그의 능력에 한계를 본 사람이 없었다. 두여회는 이세민이 섬동도(陝東道)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일 때 대행대사훈랑중(大行臺司勳郞中)이었고, 문학관(文學館) 학사(學士)를 겸하게 되었다.

 

문학관은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문관들을 모으기 위해 이세민이 만든 사조직으로 그의 정치자문기관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은 두여회를 비롯하여 방현령, 우세남[虞世南: 한로(寒露) 절후를 관장], 공영달(孔穎達) 등 모두 18명이었다. 이세민은 이들을 우대하고 공무(公務)가 끝나면 이들과 밤늦게까지 문적(文籍)을 토론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학문을 위한 단체라고 해도 실은 인재들을 모아 장차 국가 경영의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는 기관이었다.

 

이때가 621년으로 이세민은 당의 존립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두건덕(竇建德)02과 왕세충(王世充)03을 한꺼번에 평정하고 개선(凱旋)하여 그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세민은 두건덕과 왕세충을 토벌한 공으로 고조(高祖)로부터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직위를 받게 되었다. 이세민이 천책상장이 되고 천책상장부(天策上將府)가 건립되자, 두여회는 천책상장부의 중랑(中郞)이 되었다. 그리고 문학관의 학사를 겸하고 있었으니 두여회에 대한 이세민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기존의 진왕부가 있는 가운데 또 ‘천책상장부’까지 이세민을 보좌하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인 위상은 황태자인 건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렇게 황태자를 압도하는 명망과 지위로 인해 이세민과 황태자 건성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양대 세력은 고조 다음의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방을 어느 쪽이 선제공격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상황이었다. 양쪽의 참모들은 먼저 상대방을 제압하기를 주장하였고 이건성과 이세민도 그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골육상쟁은 정치적 부담이 큰 만큼 상대방 제거에 있어서 명분이 필요했다.

 

그런데 무덕(武德) 9년(626) 돌궐(突厥)이 변경을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조는 제왕(齊王) 원길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의 침입을 격퇴할 것을 명하였다. 황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 군대의 송별연을 기회로 이세민을 제거하고자 기도하게 되는데 이세민이 이를 사전에 탐지하게 되었다. 이세민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고조를 알현하여 이건성과 이원길의 음모를 고했고 고조는 다음날 이세민과 함께 이들의 소환을 명하였다.

 

이세민은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를 보내어 두여회와 방현령을 은밀히 불러서 계책을 세웠다. 황태자 이건성과 이원길 그리고 이세민이 소환되던 6월 4일 이세민의 참모들과 진왕부의 병사들은 현무문(玄武門)에 매복(埋伏)하였다. 그리고 고조의 명으로 입궁하던 건성과 원길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04

 

이세민은 정변(政變)이 발생하고 3일 만에 황태자가 되었다. 이세민이 황태자가 된지 두 달 만인 626년 8월 그는 고조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29세의 나이로 당의 2대 황제로 즉위했다. 이가 바로 당 태종(太宗)이다. 그리고 고조는 정변 이후 모든 사무를 태자가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세민은 황태자 시절에 이미 모든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궁(東宮)에 속한 관리들은 실질적인 조정 대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 두여회는 방현령과 함께 동궁의 관속(官屬)인 좌서자(左庶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겼고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두여회의 식읍(食邑)은 삼천 호였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익주(益州)에 천 삼백 호의 식읍이 주어졌다. 이윽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보좌하였고 또한 동궁(東宮)의 병사를 총감독하였다. 다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진급하였으며 과거로 선발한 자들을 관리하였다. 두여회는 방현령과 더불어 조정의 일을 보면서 능력 있는 선비를 관리로 발탁하고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합당한 관직을 주었다.

 

감찰어사(監察御使) 진사합(陳師合)이 ‘발사론(拔士論)’을 올렸는데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관직을 겸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두여회와 태종의 공신들을 은근히 비난하는 글이었다. 그러자 태종이 진사합에게 말하기를 “방현령이나 두여회는 옛적의 공훈(功勳) 때문에 진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가히 더불어 천하를 다스릴 만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러한 글로 나와 신하간의 관계를 이간하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이에 진사합을 영표(嶺表)05로 내쳤다.

 

두여회가 재상으로 있을 때는 수(隋)에서 당(唐)으로의 왕조 교체로 인한 혼란이 겨우 수습된 상황으로 대간(臺諫)과 내각(內閣) 제도, 법률과 각종 규정 등 모든 면에서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제반 사항은 방현령과 두여회 두 사람이 모두 의논하여 태종의 재가(裁可)를 받았다. 방현령은 두여회 보다 6살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방현령은 반드시 “여회가 오기 전에는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두여회가 오면 최종적으로는 방현령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이는 두여회는 결단력이 있어 훌륭했고 방현령은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 훌륭했기 때문이다. 두여회와 방현령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했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마음을 합해 잘 결정하여 태종을 보좌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훌륭한 재상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방두(房杜)’라 하여 방현령과 두여회를 칭하였다.

 

세월이 흘러 두여회가 병으로 사직하게 되니 태종이 명령을 내려 두여회가 집으로 돌아가 쉬면서도 평상시의 봉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의원과 안부를 묻는 관리들을 끊임없이 파견했다. 그런데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황태자로 하여금 문병 가도록 하고 황제도 친히 두여회의 집에 이르러 그를 위로함에 슬픔으로 목이 메었다. 두여회가 죽기 전에 황제는 그의 아들 좌천우(左千牛) 구(構)를 발탁하여 상사봉어(尙舍奉御)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관(貞觀) 4년(630) 두여회가 죽으니 그의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황제로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태종으로선 너무 아까운 인재를 잃은 것이다. 태종은 울며 애통해 했으며 두여회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내리고 다시 사공(司空)의 벼슬을 더하고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그리고 우세남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군신(君臣)의 슬픔과 애도(哀悼)를 비석에 새겨 전하도록 했다.

 

후일 태종이 참외를 먹다가 그 맛이 좋으니 먹던 것을 멈추고 그 참외의 나머지 반을 여회의 제단에 바치도록 한 적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방현령에게 황은(黃銀)으로 만든 띠를 하사하다가 문득 “여회가 그대와 더불어 짐을 보좌하더니만 이제 여회의 모습은 볼 수 없구려.”라고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황은은 귀신들이 무서워한다지.”라고 하고는 금으로 띠를 만들어 방현령으로 하여금 두여회의 집에 그것을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 후일에 홀연히 꿈속에서 두여회를 보고는 이튿날 방현령에게 그 사실을 말하며 태종이 먹는 음식을 내려 두여회의 제사에 쓰도록 했다. 그 다음해 두여회의 제삿날 상궁(尙宮)을 보내어 두여회의 처자를 위로토록 하였다. 또한 국고(國庫)에서 그의 제사를 보조하도록 하였고 태종의 은혜도 줄지 않았다. 그리고 정관(貞觀) 11년(637) 21제왕(諸王)과 장손무기를 비롯한 공신들에게 그 벼슬을 세습토록 명령을 내리면서 두여회에게도 소급하여 밀주자사(密州刺史)를 내리고 봉국(封國)을 래(萊)로 옮겼다.

 

<대순회보 82호>

 

01 선비족(鮮卑族)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 535~557)를 멸하고 세운 나라. 후주(後周)라고도 함. 5주(主) 24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함.(557~580)

02 두건덕(竇建德, 573~621)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3 왕세충(王世充, ?~622)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4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라고 한다. 현무문은 궁궐의 북문으로 황제를 배알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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