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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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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4,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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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전성기

 

  상제께 김 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이 이 순신에게 두률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 항복에게는 슬프지 않은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니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1장 32절) 

 

  위의 구절에 등장하는 이항복은 임진왜란 중에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이다. 그는 선조(宣祖, 1552~1608)의 의주 파천(播遷)을 수행하고 명(明)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전란(戰亂)이 끝난 후에는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으로 애민(愛民)사상을 실천했다. 이 글에서는 상제님께서 영재01라고 하신 이항복의 생애와 사상, 활약과 업적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생애와 학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경주 이씨 몽량(夢亮)의 넷째 아들로,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백사(白沙)·청화 진인(淸化眞人)02 등이며 서울 양생방에서 태어났다. 이항복의 처가는 안동 권씨로, 행주대첩의 명장(名將)인 권율(權慄: 1537~1599)이 그의 장인이다. 8세 때,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란 검금(劍琴)의 시를 지어 일찍이 총명함을 드러냈다. 20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성균관에서 지기(知己)인 이덕형과 교류하였다. 

  그의 관직 생활은 1580년(25세, 선조13)에 알성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항복은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과 함께 장원이 되곤 하였다. 남다른 인품과 재능을 지녔던 그는 이조 전랑이 되었다. 이 자리는 관리 추천권이 주어지며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고 다른 관직으로 옮길 때는 자신의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핵심요직이었다. 전랑을 역임하면서도 이항복은 당파에 휩쓸리거나 인사 청탁에 흔들린 적이 없었고 오히려 청탁하는 자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정도였다. 진실로 강직하고 청렴하기가 마치 한사(寒士)03처럼 쓸쓸했다. 그의 이러한 청렴성은 관직 생활 내내 흐트러짐이 없었다. ‘깨끗한 모래’를 의미하는 ‘백사(白沙)’란 호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여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였던 경연(經筵)04에서 그는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의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시점에는 임금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전란(戰亂) 중에는 병조판서의 직책을 맡아 나라를 구하고자 진력을 다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의정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며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항복은 해학과 기지가 뛰어나서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다음은 기축년(1613년) 옥사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이춘복’이란 사람이 고발되어 의금부 도사가 그곳에 가서 경내를 수색했지만, 문제의 이춘복은 잡지 못하고 엉뚱하게 ‘이원복’이란 사람을 잡아왔다. 그럼에도 국청에서 심문이 있었는데 이때 재판장이던 이항복이 “내 이름도 비슷하니 나부터 먼저 진술하여 변명해야 죄를 면하겠구먼.”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좌의정·우의정이 웃었다. 그러자 일순간에 삼엄했던 분위기가 바뀌어 옥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이항복의 기발한 농담으로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건진 명재판이었다.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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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복 신도비와 사당 / 경기도 포천시  / 2014년 7월 21일

 

  이항복의 학문을 살펴보면, 어려서 조식의 제자인 이제신과 이웃하여 학문을 배웠으며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인 신흠(申欽, 1566~1628)과는 평생지기로 살면서 학문적 성향을 같이 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중기로 조선 성리학(性理學)이 정립되고 서원(書院)을 통한 성리학의 보급이 활발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항복은 성리학에서 배격하는 불교의 설과 양명학에도 호감을 느꼈고, 『신당서(新唐書)』06 보기를 좋아할 만큼 학문적 개방성을 지녔다. 어머님 작고 후 뒤늦게 학문에 정진하여, 선도(仙道)·불도(佛道) 등 여러 방면에서 깨우치지 못한 것이 없었고 천문지리와 서화(書畵), 의술(醫術)의 기예까지도 섭렵하였다. 특히 『좌전(左傳)』07과 『한서(漢書)』08 읽기를 즐겨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비도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경계하고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며 실학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런 그의 현실 정치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청(淸)나라와의 화의론(和議論)09, 조세 개혁, 역법(曆法)의 교체, 향교의 부흥, 영장제(營將制) 등 국가 중심의 경세론(經世論)은 명분보다 현실론을 중시한 정책들이었다. 또한 그는 『좌전』을 통하여 외교에 능하였고, 역사서인 『한서』를 통하여 현실정치에 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장에서도 『좌전(左傳)』과 명에 풍미하던 진한시대의 고문장(古文章)을 사용하던 학풍까지도 연구하였다. 문장력이 출중했으며 20년 동안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다 할 정도였다.10 이 점은 정치활동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신흠은 이항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그의 문장이 웅장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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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서원 / 경기도 포천시  / 2014년 7월 21일

 

활약과 업적

  이항복의 활약과 업적은 임진왜란 당시와 이후에 잘 드러나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부산진성(釜山軫城)이 함락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한양(漢陽)이 함락되는 긴박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이항복은 국가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임금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명나라의 망명까지도 고려해 의주 파천이란 탁견을 내놓았다. 한때 한양을 고수해야 한다는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었지만 끝내 의주 파천 행을 이끌어냈다. 당시 그의 파천 주장은 기민하고도 바른 선택이었다. 

  선조가 평양성으로 옮겼을 때 대사헌인 이항복은 병조판서를 겸직하게 되어 명에 구원병을 청하도록 주청했다.12 이윽고 왜군이 평양성 턱밑까지 오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이항복의 구원병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렬하여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요동으로 보내 다시 구원병을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명은 오히려 왜(倭)와 조선이 모합(謨合)하여 명을 치려 한다고 의심하여 출병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이항복은 명의 차관 황응양을 만나 일본의 침략 원인이 정명가도(征明假道)13에 대한 조선의 거부에 있음을 설명하고, 침략 의도가 담긴 왜군의 편지를 그에게 보여주어 명의 의심을 풀게 했다.14 이러한 이항복의 신속하고 지혜로운 대처로 마침내 명은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송응창이 12월 16일에 요동에서 출병하니15 이항복이 1592년(선조 25년) 12월 25일 용만관(龍灣館)에서 이여송을 영접하고 평양 수복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명군은 평양성을 수복하고 벽제관까지 공격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왜병에게 참패했다. 그러자 이여송은 개성에 머물며 왜와 협정 맺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항복은 명의 참전 배경에는 ‘조선이 망하면 명나라도 위태롭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이 명분을 활용해 선조 임금을 비롯하여 북인(北人)들, 명의 장수들까지도 직접 만나 일본과의 화의협정에 반대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처럼 이항복은 임진왜란 중 대명 외교에 전심전력을 다 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며 강화(講和)가 아닌 종전(終戰)을 이끌어냄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16

  전란이 끝나고 이항복은 백성의 생활기반에 뿌리를 둔 실학 정책을 수립한다. 그는 선조에게 “위에서 능히 성심을 열고 공도(公道)를 펴며 아래에서는 붕당을 깨뜨리고 당쟁의 화를 면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急先務)입니다.”라고 말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의 주원인은 정치가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하는 본래의 사명(使命)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입장에서 백성을 위하고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이 전란 후 가장 시급한 일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영의정에 오른 뒤 전라도와 경상도를 돌아보며 조세(租稅)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항복은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휴식을 도모하고, 백성의 안정을 되찾아 주고자 각종 안민책(安民策)을 마련했다. 그의 정책을 살펴보면, 첫째 토지개혁 안으로 토지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걷는 양전제(量田制)를 통하여 안정적 재정 확보와 조세가 실현되게 하였다. 둘째, 국가의 세금을 쌀과 베로 내게 하였다. 백성이 과중한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관청이 미리 내고 이자를 받는 고리대의 피해를 막으려 함이었다. 셋째,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져서 수확량이 떨어져 백성들이 곤란을 겪고,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자와 전쟁으로 고아나 홀로 남은 자들을 구하는 진휼책(賑恤冊)을 쓸 것을 강조하였다.17 또한, 시장의 물가를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하여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백성을 진휼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애민정책으로 선조와 광해군의 신임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인망(人望)이 매우 두터웠다. 

  이처럼 이항복은 선조·광해군 대에 걸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병조판서를 다섯 번 역임했으며 대사헌, 형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관직을 두루 지냈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18의 봉작을 받았다. 언제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붕당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애썼다.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큰 활약을 펼쳤던 그는 전란 중에는 조정의 안녕을 위하여 어려운 파천의 길을 모색하고 명나라의 의심을 풀고 구원병의 파견을 성취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데 온 힘을 다 하였다. 전후에는 백성을 위해 조세제도의 개혁·토지제도의 개혁·진휼책 등의 현실적인 정책들을 건의하여 실행하였다. 

  이항복이 공신의 자리에서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청백리에 올랐다는 것은 ‘백사(白沙)’라는 호처럼 청렴한 삶으로 선비 정신을 구현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북청(北靑)19으로 귀향을 떠나게 되니 위로 조정 사대부부터 아래로 시골 백성과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우러러 절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20 그 후 유배생활 중 1618년(광해군 10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니 그의 저서로는 『백사집』·『북천일록(北遷日錄)』·『사례훈몽(四禮訓蒙)』이 전해진다.

 

참고 문헌

이항복, 『백사집』, 1629년(인조 7년).

장유, 『백사집』, 부록 「행장」. 

장유, 『계곡만필』 권1, 「만필」, 1635년(인조 13년).

기자헌, 『선조실록』, 1616년(광해군 8년).

김육·채유후, 『선조수정실록』, 1657년(효종 8년).

김동현·이해철·조수익, 『국역 국조인물고』, 서울, 문양사, 2005.

권영대·이정섭·조명근,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서울, 화산문화, 1994. 

정억기, 『이항복의 정치 외교 활동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대순회보>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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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상제께서 말씀하신 영재는 지나가는 말로 해도 훗날 긴박한 상황에 임하여 그 뜻을 깨달았던 이순신과 이항복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로 일컬어지는 율곡을 영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02 청화진인(淸化眞人)으로 자호(自號)한 바 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백사(白沙)로 널리 일컬어져 왔다. 그밖에 동강(東岡), 소운(素雲), 필운(弼雲)이란 호가 있다.

03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는 가난한 선비를 뜻함.

04 중국 한 나라 때 기원하여 우리나라에는 고려 예종 때 도입되었고 조선 고종 때까지도 대체로 유지되었던 제도이다. 여기에 추천되는 인사는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직이거나 학문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상당한 명예와 권위가 따르는 직책이었다.

05 권영대ㆍ이정섭ㆍ조명근,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서울, 화산문화, 1994년, p.28.

06 『신당서』는 당나라의 정사서(正史書)로서 구양수(歐陽修)ㆍ송기(宋祁) 등이 1044~1060년까지 17년에 걸쳐 『구당서(舊唐書)』를 새롭게 고쳐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문화적 가치를 중시한 사장 전통의 학문성향을 가진 구양수의 저작으로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 주자 성리학을 계승한 조선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는 금기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터 k. 볼, 심의용역, 『중국지식인들과 정체성(원제: This Culture of Ours)』, 서울, 북스토리, 2008. p.12 참조). 

07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또는『좌씨전』이라고도 하며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중국 노(魯) 나라의 역사책인 『춘추』에 대한 해설서이다. ‘춘추’라는 제목은 한해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일 년 사계절 가운데 봄과 가을 두 계절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08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로서 전 120권이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하며 한 무제에서 끊긴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뒤를 이은 정사(正史)로 여겨지므로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으로 ‘두 번째의 정사(正史)’라 하기도 한다.

09 무관 출신인 영장이 임명되어 군사훈련만 전담한 제도.

10 『선조실록』 권 112, 32년 윤4월 13일 신묘. 

11 김동욱, 『국역 기문총화』 권2, 아세아 문화사, 1999, p.96.

12 이항복의 청병 상소: “지금 팔도가 무너져 수습해서 온전하기를 도모할 희망이 없습니다. 제갈공명의 지혜로도 선주가 몸을 의탁하여 용무할 곳이 없음을 보고 손 씨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벽의 승리를 이루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명나라에 갖추어 아뢰어 구원병을 청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13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 정부에 강요한 내용. 곧, “일본군이 명을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14 『선조수정실록』 권28, 25년 7월 1일 무오.

15 『선조실록』 권32, 25년 12월 17일 계묘.

16 『전경』에 나타난 “율곡이 … 슬프지 않은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니라.”는 구절은 율곡의 후학들인 서인의 영수로서 상징되던 이항복이 이여송 장군으로 대표되는 명나라 구원군의 파병을 성사시키고 그 임무를 완수하는데 끝까지 자신의 지혜와 용력을 다 하여 그 공로가 가장 탁월했던 이항복의 면모를 백성들이 우러러보아 설화적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고 판단된다. 정사(正史)에서는 그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17 『광해군일기』 권 22, 1년 11월 15일 임진. “오늘날 진휼하는 한 가지 일은 가장 긴급한 데 관계되니 의당 십분 마련하여 서둘러서 조치해야 할 바입니다. 이렇게 공사의 비축이 모두 떨어진 시기를 당하여 다시 곡식을 얻을 계책도 없고,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앞서 계청한 양호의 쌀인데, 그 숫자 또한 넉넉하지 않으니 앞날의 일이 극도로 민망하고 염려스럽습니다.”

18 ‘오성’이란 칭호는 그가 오성부원군의 봉작을 받은 데서 유래했다.

19 함경남도 동북부에 있는 읍.

20 김동현ㆍ이해철ㆍ조수익, 『국역 국조인물고』 24권, 서울, 문양사, 2005,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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