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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0 조회4,0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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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백경언

 

  이윤에 대해서는 이미 《대순회보》 34호에서 한 차례 다룬 적이 있다. 많지 않은 자료를 종합하여 하·은(夏·殷)의 왕조 교체기에 재상으로서 활약했던 이윤을 잘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윤의 삶을 굵직한 과정으로 다루는 데 그쳐, 그로부터 수도에 필요한 교훈을 얻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여러 문헌에 나타난 이윤에 대한 평가와 기록을 통하여 그의 면모를 살펴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통해 “桀之亡湯之興在伊尹(걸왕이 망하고 탕왕이 흥한 것은 이윤에 달려 있었다)”01는 말씀과 “이윤의 도수를 맡기는 극히 어려우리라”02 하신 상제님 말씀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보통 이윤은 중국 은대(殷代) 초기의 재상(宰相)으로 이름은 지(摯)이고 윤(尹)은 자(字)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윤에게는 상(商)나라 재상이었다고 해야 예의를 갖춘 듯하다. 우리에게는 하(夏)·은(殷)·주(周)라 하여 익숙한 ‘은’이지만 탕왕이 천하를 평정하고 호(號)로 삼은 것은 ‘상(商)’이다.03 상은 우(禹)임금이 치수사업을 도운 설(契)을 봉(封)한 지역의 이름이며 탕은 그의 14대 손(孫)이다. 『서경』 「상서」에도 “설04이 처음 상(商)에 봉해졌는데 탕(湯)이 천하를 소유한 후 이를 나라의 칭호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상서」라는 편명은 물론 이를 반영한 것이다. 은(殷)은 하나라 20대 왕인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의 이름에 지나지 않아, 주(周)나라가 자신의 혁명을 정당화하고 상나라를 폄하하여 ‘은이 수도였던 나라’라는 의미로 칭한 것이 현재의 은나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이 공을 세운 나라의 이름은 ‘상(商)’이라고 해야 옳은 셈이다.

  이윤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진(秦)의 재상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가 식객 3,000명에게 저술을 맡겨 편찬했다는 『여씨춘추』에 기록되어 있다. 『여씨춘추』는 선진(先秦)시대의 여러 학설과 사실, 설화를 백과사전식으로 편찬한 것으로 여불위가 이 책에서 글자 하나라도 보태고 뺄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책이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05 유학의 풍토에서 제작된 관찬사서(官撰史書)에 기록되지 않은 신비한 일들이 이러한 책에 유사(遺事)의 형식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윤이 그러하다. 이 책의 「팔람(八覽)」을 보면 유신씨(有侁氏)의 딸이 뽕을 따다가 비어있는 뽕나무, 즉 공상(空桑)에서 어린아이를 얻어 군주에게 바쳤는데 아기의 내력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 어미는 이수(伊水)의 물 위에 살면서 잉태하였는데, 꿈에 천신이 나타나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돌절구에서 물이 나오면 동쪽으로 달려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밝은 날 돌절구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이웃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동쪽으로 10리를 달려 그 고을을 돌아보니 고을은 모두 물에 잠기고 그 몸은 변하여 공상(空桑)이 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이름 지어 이윤이라 하였다.06 

 

  이윤이 활약한 시기는 맹자가 말한 일치 일란(一治一亂)07이 교체하는 격변기라고 할 수 있다. 치수(治水) 사업을 성공한 우(禹)가 세운 하(夏,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나라는 15대 왕 공갑(孔甲)에 이르자 미신과 귀신을 지나치게 섬기고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 급기야 17대 걸(桀)에 이르러서는 유시씨(有施氏) 지방을 공격하여 전리품으로 얻은 매희(妹喜)에 빠져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를 일삼자 민심이 이반되고 망국의 징조가 완연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윤이 탕왕을 만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상나라 탕왕이 이윤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다섯 번이나 사람을 시켜 맞아들였다는 것과,08 반대로 이윤이 탕을 만나려 했는데 길이 없자 유신씨(有莘氏)의 잉신(媵臣), 즉 시집갈 때 따라가는 노복이 되어 솥과 도마를 지고 가서 탕에게 음식 맛의 예를 들어 설득함으로써 왕도(王道)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09 현명한 군주의 행위에 방점을 두면 전자가, 이윤의 애민(愛民)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것에서는 후자가 거론된다. 현명한 군주가 도(道) 있는 인사를 구하는 데 어떠한 방법이라도 쓰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과 도(道) 있는 인사가 군주를 가려 구하는 데도 행하지 않는 방법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고 말한다.

  역사는 대부분 영웅적 군주와 위대한 재상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데, 현사(賢士)가 홀로 거만하게 그 재주를 스스로 믿거나, 군주(君主)가 분발하여 그 힘을 홀로 자랑하는 일이 있으면 그 명호(名號)는 반드시 폐(廢)하여 멸(滅)하고 사직(社稷)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고 했다.10 결국, 군주와 재상은 홀로 뜻을 이루는 경우가 없으므로 서로를 알아보고 통정신이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윤이 신야(莘野)에서 농사짓고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 바닷가에서 은거할 때 세상에 탕왕과 문왕이 없었다면 그대로 인생을 마쳤을 것이요, 도를 굽혀 남을 따르고 옥(玉)을 자랑하여 팔리기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공명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11 또한 탕왕과 문왕 역시 일국의 제후로 일생을 마감했을 뿐 성군(聖君)으로서의 창업군주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군주와 신하의 만남은 결코 목가적(牧歌的)이지 않았다. 『한비자』 「난언(難言)」에서 저자인 한비(韓非)는 “옛 은의 시조 탕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며 이윤은 지혜가 뛰어난 재상이었다. 이 최고의 지자(智者)가 최고의 성인인 탕왕을 설득하여 그 뜻을 펴보려고 했으므로 당장 상통(相通)했을 법한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윤은 70회에 걸쳐 설득하려 했지만 탕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2 최고의 지혜로서 지극한 성인을 설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탕의 천거로 걸을 설득하러 갔을 땐 어떠했을까? “이 해는 언제 없어질까? 만일 없어진다면 내 차라리 너와 함께 모두 망하겠다.”13는 백성의 원성(怨聲)에 눈 하나 깜박 않고 오히려 충언(忠言)을 요언(妖言)이라며 사람 죽이기를 일삼던 걸왕이다. 이윤은 이러한 폭군을 모시고 음식으로 기분과 비위를 맞춰가며 백성을 위하여 왕도(王道)로써 설득해야 할 입장이었다. 『한비자』에서 ‘지혜로운 언어의 처참한 말로’를 기록했다 해서 ‘난언’ 이라 하는데, 재상으로서의 이윤의 삶은 ‘꺼리면서도 말해야’ 하는 난언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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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일반적으로 유교에서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없으면 물러났다.”14는 처신과도 다른 삶이었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백이(伯夷)와 이윤의 인물됨에 대하여 묻자, 맹자는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워지면 물러감은 백이요,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혼란해도 나아감은 이윤이었다.”고 말했다.15 이는 이윤이 탕왕에게 있다가 탕의 천거로 걸왕에게 나갔으나 걸왕이 등용하지 않자 다시 탕왕에게 돌아오기를 다섯 번이나 거듭한 일을 말한다.16 이러한 이윤의 행위는 오직 백성들을 위한 측은한 마음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맹자는 이를 두고 이윤이 천하의 백성들이 필부(匹夫)라도 요순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밀어 도랑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 것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7

  한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나의 죄’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중책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임(自任)하였던 이윤이다. 맹자는 성인(聖人)들을 평하면서 백이는 청(淸), 유하혜(柳下惠)는 화(和), 공자는 시중(時中), 이윤은 자임(自任)한 사람이라고 하였다.18 공문중(孔文仲)은 이때의 임(任)이란 ‘천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다.19 한비가 “이윤은 패왕의 술을 터득한 자로 오직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일에 힘을 다했으며, 세속의 언설에 구속받지 않아 백리의 땅을 가진 탕을 천자가 되게 했다고 하였다.”20 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윤은 본성을 회복하여 교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논어』 「안연(顔淵)」편을 보면 “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고요(皐陶)를 들어 쓰고, 탕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이윤을 들어 쓰니 불인(不仁)한 자들이 사라졌다.”21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곧은 자로 하여금 부정(不正)한 자를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22 이는 양심인 본성(本性)을 회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수신(修身)이 되어 자연스럽게 수·제·치·평(修齊治平)으로 나가는 유교의 이상적 교화를 실현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품성을 온전히 하는 사람은 밝은 거울이 되어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천성 그대로의 본성을 회복하면 하늘은 반드시 그를 선택하여 만인의 스승으로 삼아서 천하를 교화(敎化)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이윤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자세는 탕왕이 죽고 난 뒤 더욱 뚜렷하여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탕왕 사후(死後) 큰아들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둘째 외병(外丙)은 2년, 셋째 중임은 4년을 왕 노릇 하였다.23 이들을 이어 왕이 된 사람이 태갑(太甲)이다. 태갑은 태정의 아들인데 불민하여 탕왕의 법을 괴란(壞亂)시켰다. 이에 이윤이 그를 탕왕의 묘소가 있는 동(桐) 땅에 3년 동안 유폐하였는데, 이곳에서 태갑은 무덤을 지키는 사람으로부터 힘들여 창업한 조부(祖父)의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태갑은 자신의 행동과 조부의 행적을 비교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다. 깊이 반성하여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기를 결심한 태갑을 보고 이윤은 몹시 기뻐하며 그를 수도 박(亳)으로 모셨다. 이에 태갑이 “소자는 덕에 밝지 못하여 욕심으로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예를 무너뜨려 이 몸에 죄를 불렀으니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도망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 사보(師保)의 가르침을 저버려 그 처음에는 잘하지 못했으나, 바로잡아 구제하는 덕에 힘입어 그 끝을 잘 마칠 것을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24 

  이 일에 대하여 공손추가 맹자에게 “신하가 되어 그 군주가 어질지 못하다고 추방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이윤과 같은 뜻이 있으면 가하거니와 이윤과 같은 뜻이 없었다면 찬탈이다.”라고 하였다.25 후세에 많은 권력자들이 이윤의 입장이 되었을 때 권력을 선양한 자는 일찍이 드물었다. 탕의 사후에 이윤은 천자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이훈(伊訓)』, 『사명(肆命)』, 『조후(徂后)』, 『태갑(太甲)』, 『함유일덕(咸有一德)』 등을 저술하였다. 이는 모두 왕자를 훈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26 주자는 이윤이 천하를 공적으로 여겨 일호(一毫)의 사욕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고 하였다.27 태갑마저 세상을 뜨고 옥정(沃丁)이 즉위했을 때 이윤은 서거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00살이었다. 상나라 사람들은 그를 천자(天子)의 예로서 장사지냈다. 

  그는 천명(天命)은 상덕(尙德)을 지닌 사람에게만 내려지며, 천자는 조상의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사상을 바탕으로 걸왕 탕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 그 덕을 순일(純一)하게 할 것을 진언하였다.28 혼란한 세상에 태어나 백성의 고통을 없애고 요순의 혜택을 입히는 것을 자신의 중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죽는 순간까지 한 점 사심 없어 재상으로서의 길을 감으로써 “하늘은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뒤에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 하시니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 먼저 깨달은 자이다.”29라고 자임했던 바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 하신 상제님 말씀은 50년 공부종필(工夫終畢)의 도수와 겹쳐, 일제치하(日帝治下)의 지극히 어려운 과정에서도 인간이 도통을 성취하고 지상에 천국이 가능하도록 진심갈력(盡心竭力)으로 공부하여 법방을 짜신 도주(道主)님을 연상하게 한다. 

 

【참고문헌】

『전경』

『대순지침』

《대순회보》

『논어』

『맹자』

『서경』

성백효, 『(懸吐完譯) 論語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_____, 『(懸吐完譯) 孟子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_____, 『(懸吐完譯) 書經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_____, 『(懸吐完譯) 書經集註』,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여씨춘추 8람』. 정영호 역, 서울, 자유문고, 2006.

일연,『삼국유사』, 김원중 역, 서울, 을유문화사, 2002.

사마천,『사기본기』, 박일봉 역, 서울: 육문사, 2012.

 _____,『사기본기』, 김원중 역, 서울, 민음사, 2011.

한비, 『한비자』, 김원중 역, 경기: 글항아리, 2010. 

<대순회보>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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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3장 39절. 

02 공사 2장 16절 참조.

03 『서경집주』, 성백호 역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1), p.268. “契始封商 湯因以爲有天下之號.”

04 설(契)은 탕왕의 시조가 되는 인물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奇異編) 서문(序文)에 “簡狄呑卵而生契(간적이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05 『논어』,「술이」, “子不語怪力亂神.”

06 “有侁氏女子采桑得嬰兒于空桑之中獻之其君 其君令烰人養之察其所以然曰其母居伊水之上孕夢有神告之曰 臼出水而東走 毋顧 明日視臼出水告其隣 東走十里而顧其邑盡爲水 身因化爲空桑 故命之曰伊尹”

07 『맹자』,「등문공장구 하」,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

08 『사기』,「은본기」에는 “或曰 伊尹處士,湯使人聘迎之,五反然後肯往從湯”라 해서 다섯 번, 『맹자』,「만장장구 상」에는 “湯三使往聘之”라 하여 세 번을 말하고 있다. 횟수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09 『사기』,「은본기」, “伊尹名阿衡 阿衡欲奸湯而無由 乃爲有莘氏媵臣 負鼎俎 以滋味說湯”

10 『여씨춘추 8람』, 정영호 역 (서울: 자유문고, 2006), p.62. 

11  『논어』,「자한」, 범조우(范祖禹) 주(註), “若伊尹之耕於野 伯夷 太公之居於海濱 世無成湯文王 則終焉而已 必不枉道以從人 衒玉而求售也” 

12 『한비자』「난언」, “上古有湯 至聖也 伊尹 至智也 夫至智說至聖 然且七十說而不受”

13 『서경집주』「상서」, “湯誓 時日 曷喪 予及汝皆亡”

14 『논어』,「태백」 ,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15 『맹자』,「공손추장구 상」, “曰 伯夷伊尹何如 曰 不同道 非其君不事 非其民不使 治則進 亂則退 伯夷也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 伊尹也”

16 『맹자』,「공손추장구 상」, 주자 주(註), “伊尹 有莘之處士 湯聘而用之 使之就桀 桀不能用 復歸於湯 如是者五.”  

17 『맹자』,「만장장구 상」, “思天下之民 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

18 『맹자』,「만장장구 하」, “孟子曰 伯夷聖之淸者也 伊尹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19 『맹자』,「만장장구 하」, 주자 주(註), “孔氏曰 任者以天下爲己責也.” 

20 『한비자』「간겁시신」, “伊尹 … 此三人者 皆明於霸王之術 察於治强之數 而不以牽於世俗之言 … 湯得伊尹, 以百里之地, 立爲天子”

21 『논어』,「안연」,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22 『논어』,「위정」, “孔子對曰 擧直錯諸枉則民服”

23 이것에 대해서는 탕왕이 붕어할 때 외병의 나이가 2세였고, 중임은 4세였으며 오직 태갑의 나이가 조금 많았으므로 그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 

24 『서경』,「상서」, 태갑 중, “王拜手稽首 曰予小子 不明于德 自底不類 欲敗度 縱敗禮 以速戾于厥躬 天作孽 猶可違 自作孽 不可逭 旣往 背師保之訓 弗克于厥初 尙賴匡救之德 圖惟厥終”  

25 『맹자』,「진심장구 상」, “公孫丑曰… 賢者之爲人臣也 其君不賢 則固可放與 孟子曰 有伊尹之志 則可 無伊尹之志 則簒也”

26 『서경』,「상서」, 태갑 상, 주자 주(註), “唐孔氏曰 伊訓 肆命 徂后 太甲 咸有一德 皆是告戒太甲 不可皆名伊訓 故隨事立稱也”

27 『맹자』,「진심장구 상」, 주자 주(註), “伊尹之志 公天下以爲心 而無一毫之私者也”

28 『유교대사전』, (유교사전편찬위원회, 1990), p.1219. 이윤.

29 『맹자』,「만장장구 하」, “天之生斯民也 使先知 覺後知 使先覺 覺後覺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此道 覺此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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