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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백의한사 전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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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6 조회4,3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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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한사 전명숙의 생애

 


 

천하를 움직인 만고명장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백성을 사랑한 큰 영웅
상놈과 천인을 귀히 여긴 마음으로 죽어서 조선명부로 임명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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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녹두장군이라 하면 전봉준을 떠올리게 된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탐관오리의 착취와 부패에 반발하여 일어나 그것이 발전되어 사회 개혁운동까지 번지게 한 전명숙(全明叔).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인 만고명장 전명숙(전경, 공사 1장 34절), 과연 그는 누구인가? 전명숙은 1854年 전북 정읍군(井邑郡)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적 이름은 봉준(琫準), 항렬명은 영준(泳準)이며, 자(字)는 명숙(明叔), 별호는 녹두장군이다. 부친은 형호(亨鎬), 또는 창혁(彰赫)이고 모친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그는 샛별같이 빛나는 눈에 작은 몸집(5尺)이면서도 단단한 체구였기 때문에 녹두장군이라는 별호를 가졌다. 그는 유년시절에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사서 ∙ 오경(四書 ∙ 五經)등을 숙독 ∙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는 장성하면서 때때로 병서를 탐독하여 무술 ∙ 병법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무복(巫卜) 점술법(占術法)에 관하여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어릴때부터 다양한 고양과 또, 체험을 쌓았으므로 그의 시문(詩文)과 도학(道學)은 물론 정치적 경륜도 남달리 탁월한 바가 있었다. 뒷날 갑오혁명(1894年)때 저 유명한 창의문(倡義文)과 포고문(布告文) 그리고 집강소(執綱所)의 개혁안등을 기초하여 근대화할 한국의 정치적 경륜을 뚜렷하게 한 바 있다.
    전명숙이 난을 일으켰을때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자. 밖으로는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아편전쟁과(1839~1842)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인한 우리 조선의 충격, 초기 자본주의의 시장개척과 원료공급을 위하여 동방에로 눈길을 돌린 서양세력으로부터 자신이 순수성을 지키려는 소박한 조선의 민족의식,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붕괴되어 가는 봉건체제의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사회 ∙ 경제적 혼란을 비롯, 전반적인 모순이 나타났고 또한 종교사회적으로는 유 ∙ 불 ∙ 선사상이 피폐되어 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전봉준으로 하여금 일어서게 끔 만든 결정적인 사람은 조병갑이였다. 그는 고부(古阜)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다른 벼슬아치보다 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인물이였다. 그곳 곡창지대인 고부에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용지불갈(用之不竭)인 만석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새로운 보(洑)를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노임없이 강제로 동원하여 쌓았는가 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속여 묵은 땅을 개간하게 한 다음 추수를 하자 약속을 어기고 징세를 했으며, 군내의 부호들에게 갖은 트집을 잡아 수탈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태인군수를 지낸 부친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긁어 모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의 부친의 죽음이였다. 부친은 마을에서 오늘날 이장(里長)에 해당되는 분이였는데,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였다. 그는 민간의 주모자로서 조병갑에 의해 죽었다. 그후 전명숙의 아내는 오랜 병마로 고생하던 끝에 어린 4남매를 남겨두고 일찍 죽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재가하지 않고 손수 자식들을 양육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비통함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아내의 무덤을 자주 찾아가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한편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조병갑은 익산(益山) 군수로 전임발령이 났지만 고부고을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전라 감사를 찾아가 뇌물을 바치고 유임운동을 하니 마침내 그는 고부군수로 다시 눌러 앉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군민들의 심정은 미칠 지경이였다. 전명숙은 마침내 새둥지같은 조소리(鳥巢里) 초가 집에서 날개를 치듯 몸을 일으켰다. 시대가 영웅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먼저 그는 관하에 찾아가 선치(善治)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논의 끝에 거사키로 작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그의 관심은 고부군청을 습격하고 조병갑을 몰아내는데 있었다. 1894年 1月 오전 고부에 도착한 전명숙 부대는 우선 군청을 습격한 다음 조병갑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난민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하였다. 난민들은 옥(獄)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풀어주고 다음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갖추었다. 고부는 전명숙 부대의 완전한 장악하에 들어갔지만 파면당한 조병갑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원명은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므로 전명숙도 더 이상 사태를 확대, 악화시키지 않기로 하여 일단 농민군을 해산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고부가 평온을 되찾는가 했는데 그 다음 달인 1894年 2월 장흥(長興)부사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어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용태는 신임군수 박원명에게 고부민란의 주모자를 찾아내라고 위협하는 한편, 역졸들을 풀어 마을마다 뒤지고 다니며 마구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가 하면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집을 불태우고 본인이 없으면 처자까지 붙잡아서 살육을 자행했다. 고부는 또 다시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고 전명숙은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그는 호남각지에 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보내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의 탄신일인 3月 21日을 기해 백산으로 모이게 했다. 바야흐로 우리 역사상 최초 ∙ 최대의 민중항쟁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4月 동학군과 관군은 황토재에서 처절한 역사적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은 전명숙의 매복계에 걸려 결정적 참패를 당하고 패주하고 만다. 황토재 싸움의 승리와 그 여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명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靑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는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인 홍계훈이 제시한 정부의 조치와 방침에 응하기로 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 노비의 해방 ∙ 토지균분제 실시등 12개 조목의 시장개혁에 대한 확약을 홍계훈으로부터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전후(戰後)를 마무리 짓는 일이였다. 그는 폐허가 된 호남땅을 돌아오면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동학교도의 작폐가 심각했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사세(事勢)의 흐름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는 교도들의 흥분을 제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통유문(通諭文)을 발표했다. 전후(戰後)의 일을 모두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모처럼 전진(戰塵)을 씻고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더 이상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와 대궐까지 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수시로 날아들어 그를 괴롭혔다. 10月 아침에 재봉기 하였다. 전명숙은 남부접주로, 손병희, 최시형은 북부접주로 병력을 지휘하였다. 제1차 진격목표는 공주(公州)였다. 동학군은 총사령관에 또다시 녹두장군 전명숙을 동도차의대장(東徒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공격하기 전날(10月 21日) 신식무기로 완전 무장한 왜군과 관군이 먼저 공주성에 도착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후 7일간 걸친 공주 우금치(牛禁峙) 공방전은 40여차례의 접전으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지옥도를 이루었다. 시운을 잃으니 영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왜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2月 2日 간밤을 백양사에서 묵고 다음날 순창 피노리(避老里)에서 옛부하 김경천을 만났는데 그는 배신자였다. 그의 밀고로 전명숙은 붙잡혔다. 감방에 갇힌 전명숙은 다섯차례나 심문을 당했는데 조금도 비굴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으며 변호사를 대라는 권유에도 “구차한 삶을 위해 활로를 구하는 것은 내 본 뜻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였다. 옥중에서 전봉준은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때가 오면
천지도 힘을 합하지만
운이 다하매
영웅도 어쩔길이 없구나
백성을 사랑한 정의뿐
아무 잘못이 없건만
나라위한 붉은마음
그누가 알아주랴!


時來夫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

 

  1895년 3月 29日 사형이 선고된 전명숙은 그날로 즉시 형이 집행되었다. 삼천리 강토에 북소리 크게 울려 민중을 잠 깨우려 했던 백의한사(白衣寒士) 전명숙, 봉건왕조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을 구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그는 끝끝내 신천지 새나라가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의 막을 버리고 말았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간다

 

    이 동요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입에서 면면히 전해오는 동요이다. 파랑은 팔왕(八王)을 의미해서 전(全)의 파자(破字)이니 이는 전명숙의 씨를 의미한다. 깊이 음미해 볼만한 노래이다. 전명숙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편안함을 추구하였다면 그는 이름없는 촌부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홀로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천하의 난을 동케하고, (공사 1절 34절)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상제께서는 그를 조선의 명부로 임명하셨다.(교법 1장 2절) 그러므로 도인들도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을 생각하지말고 인간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찾아서, 험난한 역경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4군자(四君子)처럼, 굳굳이 바르게 정진할 때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대순회보》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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