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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홍성문(洪成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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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9 조회4,6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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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신상미

 

  이후에 상제께서 김 보경의 집에 계시면서 공사를 보고 계셨는데 어느 날 백지에 二十七년이라고 쓰셨도다. 이에 대해 종도들이 묻기에 상제께서 “홍 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二十七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二十七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백지 한 장을 열두 쪽으로 오려서 쪽지마다 글을 써서 한 쪽만을 불사르고 나머지 열한 쪽을 치복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셨도다. 이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가뭄에 마르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더라. (예시 5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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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대봉에서 본 회문산 전경

 

  홍성문(洪成文)은 전라도의 전설적인 풍수가로 홍문대사 또는 홍석문 등으로 불린다. 홍성문에 관한 자료는 주로 그의 고향인 임실과 그가 수행한 회문산(回文山)이 있는 순창에서 전해오는 설화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홍성문은 남양 홍씨 문성공파 후손으로 전북 임실군 하운암면 텃골 마을01에 사는 홍 진사와 마을 앞 주막집 주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 중종(中宗) 때인 약 450년 전,02 혹은 영조(英祖) 때인 250여 년 전03이라 전해진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홍 진사의 몸종처럼 지냈다. 서자(庶子) 출신으로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13세에는 아버지마저 별세하게 되자 집을 떠나 순창 회문산 만일사(萬日寺)04에서 머물렀다. 형제 중에서 특히 셋째 형이 가문의 수치라며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 나온 것이다.
  홍성문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부엌에서 쓸 장작을 패면서 주지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회문산 사자암(獅子庵)으로 나와 불공을 드리면서 풍수지리를 공부하였다. 그 결과 27년 만에 득도하게 된다.
  그가 득도하여 처음 행한 일은 맏형의 부탁으로 아버지의 묘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묘지가 정해지고 택일이 되자 셋째 형이 손님들 앞에 부끄럽다며 홍성문을 쫓아내려고 하였다. 이 속셈을 안 홍성문은 혈을 정확하게 재혈(裁穴)05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홍씨 집안의 전설에는 묘지를 설정하지 못하던 중 호랑이가 내려와서 발로 긁어 재혈하여 주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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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기리 텃골 마을


  홍성문은 득도 후 맏형의 간곡한 부탁으로 고향에 와서 부친의 묘지를 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나 셋째 형에 의해 일이 이렇게 되자 양반들의 횡포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이후 그는 떠돌아다니면서 명당(明堂)을 판다며 양반들을 희롱했다. 그 예로 ‘홍성문과 노 진사’ 이야기가 전해온다. 노 진사가 우렁이 형상의 혈을 사고 싶어 하자 홍성문이 삼천 냥이란 큰 액수를 불렀다. 노 진사는 홍성문을 잡아 고문하여 강제로 명당을 얻으려 하였으나 홍성문이 꾀를 써서 무사히 빠져나와 그를 희롱하고는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다.06 간혹 돈이 없거나 지극한 정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혈이라도 대가 없이 알려주어 선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 예가 ‘홍성문과 만석꾼 거부’ 설화이다. 가난한 경주 김씨 사람이 머슴살이를 면하기 위해 홍성문에게 명당을 구해달라고 청해서 3년 만에 만석꾼이 된다. 그러나 3년 후 다른 명당을 구해야 계속 부자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홍성문이 그의 집에 들렀는데 만석꾼이 그를 천한 승려 취급을 하며 은혜를 저버리자 홍성문은 말없이 사라졌고 3년이 지나서 만석꾼은 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홍성문은 어린 중 한 명을 데리고 주로 임실군 주변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명당을 팔다가 3개월이 되면 사자암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수도하고 다시 나와 명당을 팔면서 양반을 희롱하였다. 한 달 동안 수도하며 먹을 식량이 부족할 때마다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에 사는 정  씨 집에 들러 쌀을 얻곤 하였다. 홍성문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갈 때마다 도와준 정 씨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명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홍성문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정 씨를 찾아 부친의 묘를 이장할 곳을 정해 주고 주의할 부분을 일러 주었다. 그러나 정씨가 깜빡하고 묘지의 구덩이를 파는 이에게 뾰족한 돌 세 개를 그대로 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 씨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려고 홍성문을 찾았을 때 이미 그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위독했다. 그래서 성분(成墳)07한 이후 홍성문을 찾았으나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시장에서도 명당을 사라고 외쳤던 그를 볼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홍성문이 기록하였다는 회문산 24혈에 관한 내용이 담긴 「회문산가(回文山歌)」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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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문산 만일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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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문산은 현재 3개 군, 6개 면에 연루되어 임실에서는 덕치 회문산, 정읍에서는 산내 회문산, 순창에서는 순창 회문산으로 부르고 있다. 오선위기혈(五仙圍基穴)08이 있는 명산으로 유명한 회문산은 『전경』에서도 많이 언급되었다. 행록 5장 21절에 상제께서 회문산 오선위기혈09을 언급하셨고, 공사 2장 3절에는 단주의 해원도수를 회문산 오선위기혈에 붙여 공사 보신 내용이 있다. 공사 3장 6절에는 상제께서 정기를 뽑는 공사에서 부모산인 회문산의 정기를 뽑으신 내용과 예시 66절에 최수운을 초혼하여 회문산에 장사하는 공사를 보셨다. 회문산에서 수도하여 득도한 홍성문은 회문산의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사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풍수를 논하는 가사를 지었다. 회문산이란 지명도 홍성문이 득도하여 지었다는 이 「회문산가」에 의해 유래되었다고도 전한다.
 「회문산가」는 한 편이 아니라 『역대가사문학전집(歷代歌辭文學全集)』에 이본(異本)이 다섯 편 존재한다. 수일대사소제(守一大師所製)의 「회문산가」, 수일승작(守一僧作)의 「순창회문산가(順昌回文山歌)」,「순창 회문산가(淳昌 回文山歌)」, 수일대사(須一大師)의 「회문산가(回文山歌)」, 「부회문산홍성문(附回文山洪成文)의 회문가(回文歌)」 등이다.10 저자로 표기된 스님이나 대사는 홍성문을 의미한다. 가사 내용에 회문산 정상에 24명당과 오선위기가 있는데, 그곳에 관(棺)을 보토(補土)11하여 묘를 쓰고 나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 있다. 그래서 아직도 풍수를 아는 이나 명당을 원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찾곤 한다. 회문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 능선과 주변에 있는 수많은 무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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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문 대사 옛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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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가사에는 천장지비(天藏地秘)12한 명당은 적선(積善)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교화적(敎化的)인 면도 담겨 있다. 이는 자신들의 부와 명예 때문에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으려는 당시 조선 후기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욕망만을 좇으려 한다면 하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
  홍성문은 명산인 회문산의 기운으로 수도하고 지리(地理)에 통하여 선행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주로 명당을 팔면서 양반을 희롱하며 세월을 보내는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상제님께서 그의 27년 공부가 헛되다고 하신 것은 시대를 잘못 만나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시대를 잘못 만난 그였지만 회문산 24혈에 대한 기록을 남겨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쓰인 회문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전경』
『순창의 구전설화』, 전북: 순창문화원, 2012.
『순창의 구전설화(上)』, 전북: 순창문화원, 2002.
『순창의 구전설화(下)』, 전북: 순창문화원, 2003.
『순창군지』, 전북: 순창군청, 2015.
『임실군지』, 전북: 임실군지 편집위원회, 1997.
곽장근 외 12명, 『순창문화유산 탐구Ⅰ』, 광주: 순창문화원, 2009.
김두규, 『내 운을 살려주는 풍수 여행』, 서울: 동아일보사, 2008.
박성순ㆍ최성미, 『옥정호 이야기, 풍경을 담다』, 전북: 임실문화원, 2014.
양상화, 『형상으로 보는 풍수』, 서울: 유니프레스, 2000.
허 웅, 『한국 지명 총람』12, 서울: 한글 학회, 2003.
김보근, 「<回文山歌>에 나타난 風水理論과 그 文學的 變容의 樣相」, 『한민족문화연구』15, 2004.
김보근, 「풍수가사『回文山歌』의 원전비평」, 『한국문학연구』27, 2004.
최삼용, 「全北地域의 道家에 대한 考察」, 『도교문화연구』4, 1990.
2016. 06. 20 금기리 이장(홍원기) 인터뷰 및 사진 촬영.

 

 <대순회보>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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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운암면 금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란 뜻으로 텃골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02 최삼용, 「全北地域의 道家에 대한 考察」, 『도교문화연구』 4 (1990), p.316 참조.
03 양상화, 『형상으로 보는 풍수』, (서울: 유니프레스, 2000), p.312 참조.
04 673년(문무왕 13)에 창건되어 고려 말 이태조(李太祖)의 등극을 위해 무학대사가 만일(萬日) 기도를 모신 절.
05 하관(下棺)을 하기 위해 생기(生氣)가 흐르는 지맥을 정확하게 정하는 행위.
06 『순창의 구전설화(上)』(전북: 순창문화원, 2002), pp.195-197; 『순창의 구전설화(下)』(전북: 순창문화원, 2003), pp.93-96 참조.
07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무덤.
08 다섯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는 형국.
09 한국도교문화학회 편, 『증산사상의 다층적 분석』(서울: 청홍, 2015), pp.104-111 참조.
10 김보근, 「<回文山歌>에 나타난 風水理論과 그 文學的 變容의 樣相」, 『한민족문화연구』15 (2004), p.107 참조.
11 흙을 메워서 채움.
12  하늘과 땅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파묻혀서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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