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한로(寒露) 절후를 관장하는 우세남(虞世南)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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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9 조회5,446회 댓글0건본문
글 교무부
“후한(後漢) 영제(靈帝, 168~188) 때에 푸른 뱀이 천자의 자리에 나타났다가 저잣거리를 거쳐 종묘로 들어갔습니다. 뱀은 응당 초야(草野)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저잣거리에 나타났으니 이것이 괴이하게 여기는 까닭인 것입니다. 오늘에 뱀이 산택(山澤)에 나타난 것은 살 장소에 알맞은 것이므로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산동과 양자강, 회수에 큰물이 진 것을 보니 아마도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는 듯합니다. 마땅히 죄수들의 명부를 살펴 형량을 줄여주시면 혹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요사(妖邪)스런 일은 덕(德)을 이기지 못하니 오직 덕을 닦으시어 변고(變故)가 소멸되게 하소서.”
당태종이 그럴 듯하게 여기고 사자들을 보내어 주린 백성들을 구제케 하였다. 또 옥(獄)의 송사(訟事)를 살펴 많은 죄수들을 사면해 주었다.
후에 혜성(彗星)이 나타나 100여 일 넘게 머물다 사라지자 당태종이 근심하여 군신(群臣)들에게 물었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으니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이때 우세남이 대답했다.
“옛날 제(齊) 경공(景公) 때에 혜성이 나타나자 안영 에게 물었습니다. 안영이 대답하기를 ‘공께서 못을 팔 때는 깊지 않을까 걱정하시고 대(臺)를 쌓을 때는 높지 않을까 걱정하시며 형벌을 행할 때도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혜성을 보내어 경계토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자 경공이 두려워하며 치덕(治德)에 힘썼는데 혜성이 열엿새 뒤에 소멸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덕을 닦지 않으신다면 기린(麒麟)과 봉황(鳳凰)을 얻으신다 해도 마침내는 소용없을 것입니다. 단지 정사(政事)에 큰 잘못이 없다면 비록 재난이 일어나고 혜성이 보인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원컨대 폐하께서 공이 높다고 자긍(自矜)하지 말며, 태평시절이 오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그 끝을 신중하기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하시면 비록 혜성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려하실 바가 아닙니다.”
이에 당태종이 대답했다.
“진실로 그렇소. 내가 정사를 봄에 경공처럼 허물이 없고 다만 열여덟에 의병을 일으키고 스물넷에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서른이 덜 되어 천자의 위에 올랐던 까닭에 삼왕(三王)12이래로 어지러움을 평정한 군주 중에 나만한 사람이 없어 내가 이를 뿌듯해하고 자랑스럽게 여긴 나머지 천하의 선비들을 가볍게 보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오. 하늘이 변고를 보인 것이 이 일 때문이오?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도륙하고 수양제가 천하의 부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다가 교만 때문에 자멸하였는데 내 어찌 그 경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리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상을 떠나자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 묘소의 산릉(山陵)을 한(漢) 장릉[長陵,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능] 고사(故事)처럼 하고 장례식을 후히 하도록 지시했다. 당태종의 지시는 부조(父祖)의 장례식을 성대히 하고 그 능을 크게 하는 것을 효도로 여긴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는 힘든 고역(苦役)이었다. 게다가 국가의 재정(財政)도 적지 않게 소모되는 일이었다. 우세남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의 제왕들이 장례를 소박하게 한 것은 숭대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 부모를 영예롭게 하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을 높이 쌓고 둔덕을 두터이 하며 진귀한 보배를 사자(死者)와 함께 묻는 것이 돌아가신 분에게 누(累)가 되는 것임을 알아 장례를 소박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인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원려(遠慮)하시어 장사(葬事)를 소박하게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기며 이를 장구(長久)한 계획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B.C.E. 32~B.C.E. 7)께서 연(延), 창(昌) 두 릉을 만들 때 심히 후하게 장사지내고 비용도 많이 쓰게 하시니 간의대부(諫議大夫) 유향(劉向)이 상서하여 이르길, “문제(文帝)께서 군신들에게 말하길 ‘아 북산(北山)의 바위로 곽(槨)을 만들고 비단 솜을 채워 넣은 뒤 그 안에 관을 넣어 옻칠을 한다면 어찌 흐트러짐이 있겠느냐!’라고 하자 이에 장석지(張釋之)가 대답하길, ‘마음속에 어떻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 계시다면 남산(南山)을 금고(金庫)처럼 하여 관곽을 이루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고, 그런 생각이 없으시다면 석곽(石槨)이 없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무릇 사람이 죽는 일엔 끝이 없지만 국가엔 폐흥(廢興)이 있는 법입니다. 문제께서 장석지의 간언을 받아들여 마침내 소박하게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라고 간언하였습니다.
또 한나라 법에 천자의 장례는 천하의 공부(貢賦) 1/3을 비용으로 쓰고 산릉을 조성하도록 했습니다. 무제(武帝)는 재위(在位, B.C.E. 142~B.C.E. 87) 기간이 가장 길었는데 자신의 장례에 대한 태도를 볼 것 같으면 관곽 안에는 아무 것도 넣지 말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곽광 13이 사치스럽게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 후에 적미적(赤眉賊)14들이 장안으로 들어와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을 헐고는 재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어찌나 사치스럽게 장례를 치렀던지 약탈을 당한 뒤에도 무릉에 패물들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여 도적들 좋은 일만 시킨 것입니다.
위(魏) 문제(文帝, 220~226)가 자기의 무덤인 수릉(壽陵)을 만들 때 마지막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요(堯)임금을 수릉에 장사지낼 때 산으로 그 능의 형체를 이루고 봉분의 나무도 침전도 원읍(園邑)15도 없게 했으며 관곽(棺槨)은 몸 눕힐 정도의 크기로 하도록 하고 수의(壽衣)도 쉬이 썩을 수 있는 것으로 하도록 시켰다. 나의 이 무덤도 먼 후대의 사람들이 그 장소가 어디쯤인지 알지 못하게 하라.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은 쓰지 말 것이며 모두 와기(瓦器)로 통일시키도록 하라. 난리 통에 한나라의 능들은 도굴되지 않은 것이 없고 심지어는 옥갑(玉匣), 금루(金縷)가 불에 타기도 하고 유골마저 온전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 아니 한스러운 일인가. 만일 나의 이 조칙을 어겨 망녕되이 바꾼다면 내가 지하에서 도륙되어 두 번 죽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장차 너희들에게 복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영원한 법도로 삼아 종묘(宗廟)에 간직하라.” 라고 했습니다. 위문제의 이 법제는 가히 일의 이치에 통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의 덕은 요순(堯舜)조차 미치기 어려운데 격을 떨어뜨려 진한(秦漢)의 군주들처럼 호화롭게 하시려고 하니 신은 이것이 슬픈 것입니다. 오늘에 무덤의 크기가 그렇게 크다면 그 속에 진귀한 보물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들 후세에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신은 어리석게도 능이 산을 몸체로 삼아 봉분을 하지 않는 것이 저절로 높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지세(地勢)를 점쳐 터를 닦고 계시는데 의당 주제(周制)에 의거하여 3인[仞, 1인은 8척(尺)] 정도의 높이로만 봉분을 만들고 그릇은 금은동철을 하나라도 쓰지 말게 하며 장사 일이 끝나면 비석을 새겨 능 옆에 세워두어 대소고하의 규범이 되게 하시는 한편 종묘에도 이를 간직해 두도록 해 자손 만세토록 법식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우세남의 간절한 상소에도 통보가 없었다. 이에 다시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漢)의 초기에 능묘(陵墓)를 만드는 데 짧은 것은 10여 년이 경과했고 긴 것은 5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몇 개월의 기한으로 수십 년의 일거리를 부과하시니 백성들에게 어찌 수고로움이 없겠습니까. 한나라 때는 대군(大郡)으로 호수(戶數)가 50만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사람 수가 그때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공역(功役)을 똑같이 하신다니 신은 의아할 따름입니다.
당태종이 우세남의 상소문을 관료들에게 보이고 그 적당한 것을 처리하게 하였다. 방현령이 말하였다.
“한 장릉의 높이가 9장(丈)이고 원릉[原陵,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25~57)의 능]의 높이는 6장이었습니다. 9장은 지나치게 높고 3인 은 너무 낮으니 청컨대 원릉의 예에 의거하십시오.”
하니 당태종이 이를 좇았다.
당태종이 일찍이 궁체시(宮體詩)를 지어 우세남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시에 화답하여 시를 짓도록 했는데 이에 우세남이 말했다.
“폐하의 시는 진실로 아름다우나 그 체가 아정(雅正)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바이니 아래엔 반드시 더 심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신이 두려운 것은 이 시가 받들어 행해져 천하를 쓸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당태종이 말하길
“짐이 경(卿)을 시험해 본 것 뿐이오.”
라고 하고는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당태종이 늘 우세남의 오절(五絶)을 칭찬했으니 그 오절이란 첫째가 덕행(德行), 둘째가 충직(忠直), 셋째가 박학(博學), 넷째가 문사(文詞), 다섯째가 서한(書翰)이었다.
우세남은 638년(정관 12)에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라는 명예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홍문관학사의 직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방합시경관직사(防閤視京官職事)에 해당하는 봉록을 하사받았다. 그가 나이 81세에 세상을 떠나자 당태종이 매우 애통해하며 통곡했다. 당태종이 칙서를 내려 소릉(昭陵)에 배장(陪葬)토록하고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諡號)를 문의(文懿)라 했다.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남은 나와는 한 몸과 같았으니 나의 모자라는 점을 보충해 주길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진실로 당대의 명신이오 인륜의 전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짐의 작은 잘못도 반드시 지적했는데 이제 그가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황실의 서고(書庫)에 그만한 사람 다시 누가 있으리.”
후에 당태종이 시 한 수를 지어 옛날의 흥망성쇠를 술회했는데 시를 짓고서 탄식했다.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하는데 나의 이 시는 장차 누구에게 보여줄꼬?”
라며 저수량 을 시켜 우세남의 영전에 가 불사르도록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당태종이 꿈에 우세남을 봤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바른 말을 올렸다고 한다. 그 다음날 당태종은 조서를 내려 죽어서도 자신에게 직언하는 우세남의 충직을 칭찬하고 그의 집안을 보살펴 주도록 했다. 또한 능연각(凌練閣)에 우세남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고 저수량에게 명하여 그의 문집(文集) 30권에 서문(序文)을 짓게 하였다.
<대순회보> 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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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은주(夏殷周)의 창업군주이면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던 세 임금. 하나라의 우왕(禹王), 은나라의 탕왕(湯王), 주나라의 문왕(文王) · 무왕(武王).
13 전한(前漢) 사람. 한무제(漢武帝)때 흉노(匈奴)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곽거병 의 이모제(異母弟).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고 무제 다음의 황제인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소제를 이은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옹립한 전한시대의 실권자.
14 후한(後漢) 초에 산동(山東)에서 일어난 비도(匪徒)의 이름. 이들은 모두 눈썹을 빨갛게 물들여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15 능묘(陵墓)를 수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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