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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입동(立冬) 절후를 관장하는 당검(唐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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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1 조회4,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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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당(唐) 창업 공신 당검   

  당검(唐儉, 579~656)의 자(字)는 무약(茂約)으로 병주(幷州)군 진양[晉陽, 현재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사람이다. 조부(祖父) 당옹(唐邕)은 북제(北齊)01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부친 당감(唐鑒)은 수나라 때 융주자사(戎州刺史)로 당을 세운 고조 이연과 일찍이 군사의 업무를 같이 관장한 적이 있어 친한 사이였다. 이런 이유로 당검은 뒷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李世民)과 일찍이 교유하였고 태원에서 같은 시절을 보냈다. 당검은 성격이 호방하여 작은 것에 매이지 않았고 어버이를 섬김에도 효성스럽다고 알려졌다.

  당검이 수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몰래 이세민에게 대계(大計)를 세우도록 유세하였다. 당을 세운 고조 이연이 일찍이 그를 불러 물으니 당검이 말했다.

  “공께서는 날로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시고 또 성씨(姓氏)가 도참(圖讖)의 예언과 부합하니 이는 천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일입니다. 만약 공께서 주변의 호걸들을 규합하고 북쪽의 융적(戎狄)을 부르고 오른쪽으로는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세력을 거둬들이고,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진(秦), 옹(雍) 지역에 근거지를 두신다면 이는 은(殷)나라의 시조(始祖) 탕왕(湯王), 주(周)나라의 초석을 다진 무왕(武王)의 업적과도 같을 것입니다.”

  이연이 말했다.

  “탕, 무의 업적에 내 어찌 다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난리가 극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꾀하니, 그대가 이런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면 내가 그대를 위해 생각을 한번 해 보겠소.”

  당검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연에게 거병을 촉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 가장 적극적으로 거병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이연이 병사를 일으키고 대장군부(大將軍府)가 설치되자 당검은 기실참군(記室參軍), 위북도(渭北道) 원수사마(元帥司馬)에 임명되었다. 당검이 이연을 좇아 수도 장안(長安)을 평정하니 상국부(相國府) 기실(記室)에 임명되고 진창군공(晉昌郡公)에 봉해졌다.

  당검은 618[무덕(武德) 1]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승진되었다가 중서시랑(中書侍郞),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619(무덕 2)년 하현(夏縣, 현재 산서성 하현)사람 여숭무(呂崇茂)가 현령을 죽이고 스스로 위왕(魏王)이라 칭했다. 여숭무가 유무주(劉武周, ?~622)02와 연합하자 고조는 영안왕(永安王) 이효기(李孝基), 공부상서(工部尙書) 독고회은(獨孤懷恩), 우균(于筠) 등에게 병사를 주어 여숭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당검도 같이 파견했다. 당군은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이효기 등이 포로가 되었고 당검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공부상서 독고회은은 포주(蒲州)에 주둔하여 있으면서 그의 장수 원군실(元君實)과 함께 모반을 꾀하고 있었다. 같이 포로가 된 원군실이 이 일을 당검에게 말하였다. 

  “독고 상서(尙書)가 장차 병사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하는데 주저하며 거사하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른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 용단을 내리지 못하면 수난을 당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얼마 후에 독고회은이 포위망을 뚫고 돌아오니 고조는 명령을 내려 예전처럼 포주를 지키도록 했다. 원군실이 다시 당검에게 다시 말했다.

  “독고회은이 어려움을 벗어나서 다시 황하에 주둔하였으니 제왕(帝王)이 될 사람은 죽지 않는가 봅니다.”

  원군실의 말을 듣고 당검은 이들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했다. 당검이 몰래 유세양(劉世讓)을 고조에게 보내어 이들의 음모를 알렸다.

  이때 고조는 독고회은이 있는 포주로 행차하던 중이었다. 고조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때마침 유세양을 만났다. 고조는 유세양의 보고를 듣고 놀라 말하길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리오.”라고 하며 뱃머리를 돌리도록 명하였다. 이후 모반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잡아들이니 독고회은은 자살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얼마 후에 유무주가 이세민이 이끄는 당군에 패하여 돌궐로 도망갔다. 당검은 관청의 창고와 무기고를 봉인하고 이세민의 당군을 맞이했다. 고조는 당검이 포로로 잡혀 욕을 보았으면서도 조정을 잊지 않았음을 칭찬하며 옛 관직으로 복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병주도(幷州道)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하고 독고회은에게서 적몰한 재산을 모두 당검에게 주었다.

  당검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천책부장사(天策府長史), 검교황문시랑(檢校黃門侍郞)에 임명되고, 거국공 에 봉해졌다. 후에 수주도독(遂州都督)이 되어 면주 600호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정관(貞觀) 초년(初年)에 당검이 돌궐(突厥)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자 당태종이 그에게 물었다. 

  “경(卿)이 보기에 우리가 힐리 를 취할 수 있겠는가?”

  당검이 대답했다.

  “선왕들의 영령이 보호하사 아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630년(정관 4) 당검은 돌궐의 힐리가한에게 사신으로 파견된다. 

  돌궐문제는 당으로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국가적 숙제였다. 돌궐은 당시 군사대국으로 중국이 혼란해진 틈을 타 중국의 여러 세력에게 꾸준하게 군사적 원조를 하면서 중국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당태종은 즉위한 뒤 꾸준히 국력을 길러 돌궐 정벌을 준비했다. 마침내 당태종은 629년 이정[李靖 :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0만 병력으로 원정군을 조직하여 돌궐을 공격했다. 이정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전략과 급속한 진격에 돌궐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힐리가한은 철산(鐵山)03으로 도망가 보루를 만들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속국(屬國)이 되길 청했다. 이에 당태종이 힐리가한의 사자를 맞아들이도록 하면서 당시 홍려경04인 당검을 사자로 파견한 것이다. 힐리가한이 당의 속국이 되겠다고 한 것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전세(戰勢)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당검을 필두로 한 당의 사절이 도착하자 힐리가한은 더 이상 당군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정은 이번 기회에 돌궐을 완전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진군시켰다. 

  돌궐의 방비가 해이해진 틈을 탄 이정의 기습은 대성공을 거둬 당나라는 마침내 국가적 숙원이던 돌궐 정벌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때 당검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와 귀국했다. 

  돌궐에서 귀국한 당검은 얼마 뒤 민부상서(民部尙書)에 임명되었다. 이후 당검이 당태종을 수행하여 낙양원(洛陽苑)에서 사냥을 했는데 많은 멧돼지가 숲속에서 갑자기 나왔다. 당태종이 활을 꺼내어 네 발을 연달아 쏘아 네 마리를 잡았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당태종의 등자05로 뛰어 오르니 당검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 멧돼지를 주먹으로 

쳤다. 그 틈을 타서 당태종이 칼을 뽑아 멧돼지를 베고 돌아보아 웃으며 말했다.

  “천책장군부 장사(長史), 그대는 상장군(上將軍)이 적을 무찌르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어찌하여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당검이 대답했다.

  “한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놀라우신 무예로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짐승 한 마리에 그리도 흡족해 하십니까.”

  당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이 일로 사냥을 그만두고 당검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덧붙여 주었다. 그리고 당검의 아들 당선식(唐善識)과 예장공주(豫章公主)를 결혼시켰다. 

  당검은 650[영휘(永徽) 1)]년에 특진(特進)06이 추가되었다. 656[현경(顯慶) 1]년에 당검이 죽으니 그의 나이 78세였다. 당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병주도독(幷州都督)의 직책이 더해졌고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는데 시호(諡號)를 양(襄)이라 하였다. 

<대순회보> 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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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북제(北齊, 550~577). 후한(後漢) 이후 중국을 재통일한 진(晉)에서 내란(內亂)이 발생하고 이를 틈탄 북방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으로 중국은 양자강을 경계로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지게 된다. 북제(北齊)는 동위(東魏)의 실권자였던 고양(高洋)이 세운 나라로 남조(南朝)에도 제(齊)가 있었음으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북제라고 하며 5주(主) 22년 동안 폭군(暴君)과 암군(暗君)들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었고 577년 후주(後周)에 병합되었다. 

02 하간(河間) 경성[景城, 현재 하북성(河北省) 헌현(獻縣)] 사람으로 마읍(馬邑)으로 옮겨 살았다. 날래고 사나우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교위가 되었다. 이후 마읍에 돌아와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로 있던 617년(大業 13) 같은 군(郡)의 장만세(張萬歲) 등과 모의하여 태수 왕인공(王仁恭)을 죽이고 세력을 규합하여 스스로 태수라 칭했다. 그는 세력 확장을 위해 돌궐(突厥)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하여 이들의 무력을 기반으로 안문(雁門), 누번(樓煩), 정양(定襄) 등의 군(郡)을 점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돌궐로부터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임명되었고 황제를 자칭(自稱)했다. 619년(武德 2) 당군(唐軍)에 연승(連勝)하여 태원(太原), 진주(晉州), 회주(澮州)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돌궐로 도망갔는데 다시 마읍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피살(被殺)되었다.

03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남쪽에 있는 음산의 북쪽에 있다.

04 홍려시 의 수장(首長). 홍려시는 외국사절을 맞이하고 그들의 상장(喪葬)에 관한 의례(儀禮)를 담당한 기관으로 전객서(典客署)와 사의서(司儀署)를 하부기관으로 두었다.

05 말을 탈 때 디디고 올라가는 제구. 말등자. 

06 벼슬이름. 한 대(漢代)에 처음 두어 열후(列侯) 중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는 자에게 임명하였으며 관계(官階)는 삼공(三公)의 아래. 수당(隋唐) 이후 산관(散官)이 되었고 청대(淸代)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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