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염락제현: 정이천(程伊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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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8.19 조회5,967회 댓글0건본문
도주님께서 1923년 계해(癸亥)년에 내려주신 「전교(傳敎)」에는 유교를 전한 이들로 송(宋, 960~1279)나라 때 염락제현(濂洛諸賢)이 언급되어 있다.01 염락제현은 송나라 때 유교의 중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02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그중에 한 명인 주회암(朱晦庵, 1130~1200)을 유교의 종장으로 임명하셨다.03 주회암의 본명은 주희(朱熹)이고 우리에게는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주자가 주렴계(周濂溪, 1017~1073),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정이천(程伊川, 1033~1107), 장횡거(張橫渠, 1020~1077),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의 사상을 종합하여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염락제현은 유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04 이중 정이천은 특히 성리학의 리(理) 개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생애
▲ 정이천 초상화, 자료출처: 중국역대 인물 초상화
북송(北宋)시대를 살았던 정이천의 본명은 정이(程頤)이고, 자(字)는 정숙(正叔)이며 이천은 그의 호(號)이다. 정이천의 생애에 관련된 내용은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宋史)』에 보인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정이천은 정명도의 친동생으로 어려서는 주렴계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주렴계가 남안(南安)에서 아전 노릇을 할 때 통판군사(通判軍事)인 아버지 정향(程珦, 1006~1090)이 주렴계의 비상한 기상과 용모를 보고 그와 사귀었고, 두 아들 명도와 이천을 그에게 보내어 공부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05 주렴계가 도학(道學)의 비조(鼻祖)라고 알려진 까닭은 사실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가 크다. 당시 주렴계 나이가 30세, 정명도는 15세, 정이천은 14세였고 교류 기간이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영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두 형제에 관한 후대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06 비록 정이천과 정명도의 사상은 송명도학(宋明道學)에서 리학(理學)과 심학(心學)이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의 학문을 형성하지만,07 주렴계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적 원류가 같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이천은 18세 때에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송사』에 실린 “천자(天子)가 세속적인 논의들을 내쫓고 사사로움 없는 왕도(王道)정치에 마음 쏟기를 바랐다.”08라는 상소 내용은 이천의 기개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태학(太學)에 들어가서는 학교의 선생이었던 호원(胡瑗)이 이천의 글을 보고 매우 놀라 직접 만나서 학식을 교류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09
이천은 명도와는 형제, 주렴계와는 사제관계이면서 장횡거와는 친척 관계, 소강절과는 친구 관계였다. 이 중에서 이천과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인물은 장횡거였다. 명도와 횡거는 1057년 같은 해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당시 명도의 나이 26세, 횡거의 나이 38세였다. 이천과 횡거의 교류는 명도와 횡거가 주고받은 편지를 이천이 보고 질문을 보내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천은 횡거가 우주의 본체(本體)를 태허(太虛)인 기(氣)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리를 강조한다. 이러한 리와 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송대 유학사의 중요한 분기로서 후대 성리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천은 형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관직에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50세가 넘어서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철종(哲宗, 재위 1085~1100) 초에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여공저(呂公著, 1018~1089)는 이천의 품행에 대해서 높이 칭송하며 관직에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다고 전해진다.10 그러나 이천은 스스로 학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철종의 임명을 애써 사양했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는 것 대신 한결같이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40세 때부터 제자를 두어 함께 모여 공부하는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다.11
명도가 죽은 뒤에야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는데,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라는 관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철종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남짓이었는데, 이천은 그에게 경전을 설명해 주는 선생이 되었다. 이천이 평민에서 갑자기 황제에게 강의하는 관리가 된 일은 당시에는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12 관직에 발탁된 후 이천은 곧장 임금에게 상소하여 환관이나 궁녀들과 만나는 시간을 피하고 현명한 사대부들과 시간을 갖고 유자(儒者)들을 선별하여 강연을 듣도록 간청하였다고 한다.13
이천의 관직 생활은 말년에 이르러 평탄치 않았다. 이천이 37세 때 아버지 정향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내놓은 신법(新法)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는데, 이천 또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신법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로부터 오랫동안 고통받았다고 한다.14 결국, 개혁적 정치인 신법을 추구하던 신당파들의 모함으로 서경(西京)에 국자감(國子監)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쫓겨났다가 얼마 후 면직당하고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즉위하자 유배지가 협주(峽州)로 옮겨졌고 관직을 회복하였지만, 다시 또 면직당했다. 관직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07년, 그가 숨을 거둔 나이는 75세였다고 한다.15
사상과 학문적 의의
160년간 이어온 북송의 후기 인물인 이천은 염락제현인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정명도 등과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문제들을 고민했다. 그들에게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새로운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세우기 위한 당면 과제였다. 당(唐, 618~907)나라에서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59)을 거쳐 송나라가 건립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 제국이었던 당나라가 오대십국으로 분열된 원인을 도교와 불교사상에서 찾았다.그래서 그 내면에는 도교와 불교를 극복하고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의 가르침을 재건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도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신들이 도교와 불교에 출입했던 경험을 토대로 그 사상의 장단점을 종합하여 유학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16 이천의 철학사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의 철학은 주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자의 성리학을 정주(程朱) 성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주 성리학에서 정은 정명도·정이천 두 정 씨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이천을 말한다. 이는 주자가 40세 이후 자신의 철학체계를 정립할 때 이론적 토대를 정이천의 철학 안에서 찾았기 때문이다.17
주자의 사상이 이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되는 이유는 바로 리의 사상 때문이다. 특히 기와 대비시켜 리의 초월적 의미를 강조하는 분석적 태도가 이천으로부터 전해졌다고 본다. 주자의 리에 관한 이론은 이천이 주창한 ‘리일분수(理一分殊)’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었다. ‘리일분수’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리는 하나인데 그것이 나누어져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이 하나의 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18 ‘월인천강(月印千江)’으로도 비유되는 ‘리일분수’는 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치는 것처럼 하나의 리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주자는 ‘리일분수’의 사상을 통해 성리학의 핵심적인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이천과 명도는 낙양에 살면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그들이 후에 낙학파(洛學派)라고 불리게 된 것도 낙양지방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염락제현에서 ‘락’의 의미도 이천형제가 활동했던 낙양지역을 지칭하고 있다. 이천의 제자들은 주순명(周純明), 여대림(呂大臨), 양시(楊時), 이간(李旰), 주광정(朱光庭) 등이 있다. 낙학이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는 때는 1077년 장횡거와 제자들이 형성한 관학파(關學派)와 교류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여대림은 횡거의 제자였다가 그의 사후에 이천의 제자가 되었다. 낙학과 관학은 서로 경쟁의식을 드러내며 학문적 원류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교류를 통해 각자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 갔다.19
이천의 주요 저서로는 『주역(周易)』과 『춘추(春秋)』에 자신의 견해를 담아서 완성한 『역전(易傳)』과 『춘추전(春秋傳)』이 있다. 이 중 『역전』만이 온전히 남아서 전해지고 있고, 그의 어록들을 제자들이 모아서 『이정집(二程集)』에 수록해 놓았다.20 그의 저서 『역전』과 『춘추전』 서문에는 성인의 뜻이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고, 성군이 다스리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천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성인의 뜻이 후세에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춘추전』을 지어 밝히고자 한다. 그리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그 글을 이해하여 그 의리를 구하고, 그 의미를 깨달아 그 쓰임을 본받게 되면 삼대(三代: 夏ㆍ殷ㆍ周)의 정치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이 『춘추전』이 비록 성인의 깊은 뜻을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배우는 자는 이 책을 통해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21
이처럼 이천은 누구 못지않게 유교의 높은 이상을 꿈꿨고, 리의 철학을 통해 그 이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이천의 『역전』이 『주역』이 지닌 점서(占書)로서의 기능을 넘어 인간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 것도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그의 리 철학 때문이다.22 그가 추구했던 리의 철학은 송대의 사상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유교의 사상이 주자에 의해서 신유학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01 “…佛道中興, 其後五百年, 距今略一千年前, 大宋之時, 濂洛諸賢, 一時傳道.” (교운 2장 26절 )
02 《대순회보》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인물인 주렴계(213호), 정명도(215호), 장재(217호)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03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교운 1장 65절)
04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따르면 염락제현으로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소강절, 사마광, 주회암까지 언급되어 있다. (『동몽선습』, “宋太祖, 立國之初, 五星聚奎, 濂洛關閩, 諸賢輩出, 若周敦頤, 程顥, 程頤, 司馬光, 張載, 邵雍, 朱熹, 相繼而起, 以闡明斯道, 爲己任.”)
05 『송사(宋史)』 「도학전(道學傳)」, “掾南安時, 程珦通判軍事, 視其氣貌非常人, 與語, 知其為學知道, 因與為友, 使二子顥, 頤往受業焉. 敦頤每令尋孔, 顏樂處. 所樂何事, 二程之學源流乎此矣.”
06 한국철학사연구회, 『주자학의 형성과 전개』 (서울: 심산, 2005), pp.24~30 참고.
07 풍우란, 『중국철학사』下, 박성규 옮김 (서울: 까치, 2007), p.498 참고 .
08 『송사』 「도학전」, “程頤, 字正叔. 年十八, 上書闕下, 欲天子黜世俗之論, 以王道為心.”
09 『송사』 「도학전」, “游太學, 見胡瑗問諸生, 以顏子所好何學, … 瑗得其文, 大驚異之, 即延見, 處以學職.”
10 『송사』 「도학전」, “治平, 元豐間, 大臣屢薦, 皆不起. 哲宗初, 司馬光, 呂公著, 共疏其行義, 曰伏見河南府處士程頤, 力學好古, 安貧守節, 言必忠信, 動遵禮法.”
11 박호석, 「정이천의 생애와 문제의식」, 『동양예학회』 11 (2003), p.196 참고.
12 진래, 『송명성리학』, 안재호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06), p.142 참고.
13 『송사』 「도학전」, “既入見, 擢崇政殿說書. 即上疏言 … 大率一日之中, 接賢士大夫之時多, 親寺人宮女之時少, 則氣質變化, 自然而成.”
14 박호석, 「정이천의 생애와 문제의식」, 『동양예학회』 11 (2003), p.201 참고.
15 『송사』 「도학전」, “董敦逸複摭其有怨望語, 去官. 紹聖中, 削籍竄涪州 … 徽宗即位, 徙峽州, 俄複其官, 又奪于崇寧. 卒年七十五.”
16 우노세이이찌, 『중국의 사상』, 김진욱 옮김 (서울: 열음사, 1993), p.35 참고.
17 한국철학사연구회, 『주자학의 형성과 전개』 (서울: 심산, 2005), p.96 참고.
18 안유경,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새문사, 2015), p.131 참고.
19 이현선, 『장재와 이정형제의 철학』 (서울: 문사철, 2013), pp.46~51 참고.
20 같은 책, p.334 참고.
21 『송사』 「도학전」, “予悼夫聖人之志不明於後世也, 故作《傳》以明之, 俾後之人通其文而求其義, 得其意而法其用, 則三代可複也. 是《傳》也, 雖未能極聖人之蘊奧, 庶幾學者得其門而入矣.”
22 김익수, 「이천역학의 형성과 한국적 수용」, 『동방학지』 105 (1999), pp.95~9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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