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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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6.17 조회7,897회 댓글0건본문
한신(韓信)은 한 고조의 퇴사식지(推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한신이 한 고조를 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신을 버린 것이니라.(교법 2장 49절)
위 성구에 등장하는 괴철(蒯徹, ?~?)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범양현(范陽縣) 사람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그의 이름이 한무제(漢武帝)의 이름과 같다 하여 바꿔 쓴 후 괴통(蒯通)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사기』 「회음후열전」, 『한서』 「괴통전」 등에 남아있다.
괴철이 활약한 시기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아들 호해(胡亥)가 폭정을 행하던 때이다. 진나라의 가혹한 폭정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고 마침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봉기하여 반진(反秦)의 불을 지폈다. 당시 괴철은 진승의 부하 장수인 무신(武臣)을 잠시 따르다가 정세를 보고 항우(項羽)를 좇다가 다시 한신(韓信, ?~기원전 196)과 교류하였다. 특히 위 성구는 항우와 유방(劉邦)이 천하의 패권을 다툰 이른바 초한 전쟁 당시 유방의 신하였던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하였을 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이다. 한신은 신하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유방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괴철에 대한 기록은 진나라 말기에 봉기를 일으켰던 진승의 부하 장수인 무신과 연관하여 시작된다. 무신이 황하 북쪽 10여 개의 성을 함락하고 범양을 공격하려 할 때이다. 괴철은 무신이 자신의 고향인 범양을 공격 하려 할 때 범양 현령 앞에 나타났다. 괴철은 현령에게 천하의 민심이 등을 돌린 진나라를 위해 죽지 말고 무신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괴철은 현령에게 자신을 사자로 무신에게 보내준다면 범양 성민의 안녕과 재산을 보호하고, 현령의 직책도 보장받도록 하겠노라고 하였다. 현령은 괴철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복문서를 써서 괴철에게 건네주었다.
괴철은 항복문서를 들고 무신의 군영(軍營)으로 가서 전투를 치른 후에 토지와 성(城)을 점령하는 것은 잘못된 전략이며 범양 성민의 재산과 목숨을 보전해 준다면 나머지 성들도 스스로 투항할 것이라고 하였다. 괴철의 제안을 적극 받아들인 무신은 싸우지 않고 30여 개의 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괴철의 건의에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한 무신은 조(趙)나라의 도성이었던 한단(邯鄲)에서 진승을 배반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때 괴철은 무신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그에게 나아가 자신은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며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후 괴철은 고향인 범양으로 돌아가서 천하의 정세를 관망하였다. 이때 강동에서는 항우와 그의 숙부인 항량(項梁)이 봉기하였고, 패현(沛縣)의 유방도 소하(蕭何)와 함께 반진(反秦)의 깃발을 들었다. 무신과 항우, 유방이 진나라에 대항하였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진승의 세력이 제일 컸다.
그러나 진승의 부장인 주문(周文)의 대군이 진나라의 대장군 장한(章邯)에게 패하고, 얼마 후 진승이 부하에게 피살되면서 진승의 세력은 와해되었고, 무신 또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진승과 무신의 세력은 멸망하였다. 항우보다 먼저 함양에 도착한 유방은 진나라 2대 황제 호해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항우는 진나라의 주력부대인 장한의 대군을 거록(鉅鹿) 전투에서 대파하여 항복을 받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괴철은 진나라의 주력부대를 대파한 항우의 세력에 의탁하기로 하고, 낙양에서 진나라의 수도 함양성으로 가는 항우를 만나 그의 참모가 되었다. 항복한 장한의 병사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첩보를 듣고 크게 노한 항우는 진격을 멈추고 진나라 병사들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괴철은 20만이나 되는 진나라 군사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다른 부하 장군의 건의에 따라 사살 명령을 내렸다. 괴철은 이러한 항우를 폭정을 행한 진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나라로 떠났다.
괴철은 제나라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항우와 유방의 대결을 지켜보았으나 초한(楚漢) 전쟁은 승패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유방과 항우가 성고(成皋)와 형양(滎陽)에서 팽팽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유방의 신하인 한신은 조나라와 연나라를 점령하고 제나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한신보다 한발 먼저 제나라에 도착한 역이기(酈食其, ?~기원전 204년)는 제나라 왕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제나라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한신이 공격을 멈추려 하자 괴철은 한신에게 말했다.
장군이 왕의 조서를 받고 제를 공격하려는데, 한왕이 오직 밀사를 보내 제를 항복시켰으나, 장군에게 공격을 멈추라는 조서가 어디 있습니까? 어찌 진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역이기는 일개 변사(辯士)이지만 수레에 기대어 세 치 혀를 놀려서 제나라 70여 성을 항복시켰는데, 장군께서는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1년 여 동안에 겨우 조나라의 50여 성을 항복시켰을 뿐입니다. 장군이 되신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도리어 풋내기 유자(儒者:역이기)의 공보다도 못하다는 말씀입니까?01
괴철의 말을 들은 한신은 그의 계책에 따라 제나라 역하(歷下:산동성 역성현 서쪽)를 공격하였다. 이때 항우는 20만 대군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대장군 용저(龍沮)는 유수(濰水)에서 한신에게 패하였다. 한편 역이기의 유세(遊說)를 받아들여 항복하기로 했던 제나라는 한신의 기습적인 공격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한신은 제나라를 완전히 평정하고 괴철의 건의에 따라 유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 임시 왕)으로 삼아줄 것을 청하였다. 한신의 가왕 요청에 유방은 몹시 분노하였으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충고에 따라 한신을 제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이때 초한 전쟁은 3년 동안 대치를 하면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항우는 유방과 제나라에 있는 한신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이에 항우는 무섭(武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으로 하여금 유방을 배신하고 제나라의 왕에 올라 천하를 삼분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을 버리지 않았다. 항우의 사자 무섭이 떠나자 괴철은 천하의 대권이 한신에게 달린 것을 알고 한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한왕과 항왕의 운명은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나라의 편을 들면 한나라가 이기고, 초나라를 편들면 초나라가 이깁니다. 신은 속마음을 터놓고 간과 쓸개를 드러낸 채 어리석은 계책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진실로 대왕께서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실로 대왕께서 저의 계책을 써주신다면 한과 초를 이롭게 하고 두 왕을 존속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의 발처럼 버티게 하면 그 형세는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02
괴철의 말에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왕은 나를 아주 후하게 대해주었으며, 자기의 수레에 나를 태워주었고, 자신의 옷을 나에게 입혀주었으며, 자기가 먹는 음식을 나에게 먹여주었습니다.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몸에 싣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밥을 먹는 자는 남의 일을 위해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 어찌 의를 배반하겠습니까?03
한신은 괴철의 건의를 거절했다. 괴철은 한신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미친 척하고 그를 떠나 무당이 되었다. 항우와 유방의 초한 전쟁은 해하(垓下)에서 유방의 승리로 끝났다. 한나라 10년에 진희(陳豨)가 대주성(代州城)에서 모반을 하자 유방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정벌하러 갔다. 그 사이 여태후(呂太后)와 소하(蕭何)는 한신을 진희와 연계하여 모반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제거하려 하였다. 이들에게 속아서 잡혀 온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괴철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아녀자에게 속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여태후는 한신과 그의 삼족을 멸했다.
유방이 진희를 토벌하고 돌아와서 여태후에게 “한신이 죽을 때 뭐라고 하더이까?”라고 하자 여태후는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태후의 말을 들은 유방은 사람을 시켜 괴철을 잡아 오게 하였다. 괴철이 잡혀오자 유방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회음후에게 모반하라고 가르쳤느냐?” 괴철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한신이 저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멸했습니다. 만약 한신이 저의 계책을 썼다면 폐하께서 어찌 무찌를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유방이 노하여 “이놈을 삶아 죽여라”고 했다. 괴철이 “아 ! 원통하구나 이렇게 죽다니”라고 하자, 유방이 “네가 한신을 모반하게 해놓고는 무엇이 원통하단 말이냐”라고 묻자 괴철은 대답했다. “진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산동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사람들이 아울러 일어나자 영웅준걸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진나라가 그 사슴[皇帝權]을 잃어버리자, 천하가 모두 그 사슴을 쫓았습니다. 이리하여 재주가 많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그 사슴을 잡았습니다. 도척(盜跖)의 개가 요(堯)임금을 보고 짖는 까닭은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짖는 것입니다. 그때 신은 오직 한신만을 알았을 뿐이지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천하에는 칼끝을 날카롭게 갈아가지고 폐하께서 하신 일을 자기도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힘이 모자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유방은 “그를 놓아주어라”라고 하여 괴철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유방은 괴철에게 관작(官爵)을 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한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의 고향에 장사지냈다.
기인(奇人) 괴철은 한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기지로 유방으로부터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유방의 허락을 얻어 한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의 고향 강소성(江蘇省) 회음에 장사지냈다. 괴철은 현실적인 상황판단으로 전략적 선택을 통해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천하삼분지계[三分天下]’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유방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괴철의 충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괴철의 정치적인 상황 판단은 정확했다. 회음후의 장례를 마친 괴철은 제도혜왕(齊悼惠王)04의 재상으로 있던 조참(曹參)의 빈객(賓客)으로 있다가 물러나 책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반고(班固), 『한서(漢書)』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01 사마천(司馬遷),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사기(史記)』, “將軍受詔擊齊, 而漢獨發閒使下齊, 寧有詔止將軍乎? 何以得毋行也! 且酈生一士, 伏軾掉三寸之舌, 下齊七十餘城, 將軍將數萬眾, 歲餘乃下趙五十餘, 為將數歲, 反不如一豎儒之功乎?”
02 사마천(司馬遷),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사기(史記)』, “當今兩主之命縣於足下, 誠能聽臣之計, 莫若兩利而俱存之, 參分天下, 鼎足而居, 其勢莫敢先動. 蓋聞天與弗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 願足下孰慮之.”
03 사마천(司馬遷),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사기(史記)』, “漢王遇我甚厚, 載我以其車, 衣我以其衣, 食我以其食, 吾聞之, 乘人之車者載人之患, 衣人之衣者懷人之憂, 食人之食者死人之事, 吾豈可以鄉利倍義乎!”
04 유비(劉肥, ?~기원전 189). 한고조 유방의 장남으로 서자(庶子)이다. 한신을 대신하여 제나라 왕에 봉해졌다. 조참(曹參)을 상국으로 양릉후(陽陵侯)를 우승상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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