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신명(2) > 인물

본문 바로가기

인물
HOME   >  교화   >   인물  

인물

28수 신명실(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신명(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21 조회4,174회 댓글0건

본문

d0e18dd551f6ad63e70b561d897ca4d0_1516493 


 

광무제의 후한 건국과 풍이의 활약
  주유를 물리친 후 풍이는 격문을 돌려 상황을 보고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승전을 축하하면서 유수에게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수는 세 번에 걸쳐 신하들의 즉위 요구를 뿌리친 다음에야 풍이를 불러 사방의 동정을 물었다. 풍이가 대답하였다.

  “삼왕(三王; 淮陽王, 穰王, 隨王)이 모반하고 경시제가 패망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으므로 종묘를 지키고자 하는 우려가 대왕에게 달렸습니다.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위로는 사직(社稷)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소서.”
  유수가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붉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깨어나 보니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오.”
  풍이는 그 말을 듣자 아랫자리로 내려가 두 번 절하면서 축하하고 말하였다.
  “그것은 천명(天命)이 정신에 나타난 것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대왕의 신중한 성품 탓입니다.”

  마침내 풍이는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여 존호를 올렸다. 이렇게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26(건무 2)년 봄, 풍이는 양하후(陽夏侯)에 봉해졌다. 풍이는 병사를 이끌고 양적(陽翟)의 엄종(嚴終), 조근(趙根)을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렸다. 광무제는 조칙을 내려 풍이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돌아보게 하였다. 더불어 태중대부(太中大夫)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고 2백리 내의 태수(太守)와 도위(都尉) 이하의 관리와 종족(宗族)을 모이게 하였다.

  그때 적미(赤眉)와 연잠(延岑, ?-36)01이 삼보(三輔)02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군현(郡縣)의 호족들도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각기 군대를 만들어 일어났다. 대사도 등우(鄧禹)가 이를 평정하지 못하였다. 광무제는 등우를 대신하여 풍이를 파견해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광무제는 풍이를 하남까지 전송하러 가서 풍이에게 수레와 7척 보검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풍이에게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삼보가 왕망(王莽), 경시(更始)의 난을 만나고 또 다시 적미, 연잠의 만행을 겪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의지할 데가 없다. 지금 정벌에 나서면 반드시 다음의 사항을 주의하라. 먼저 노략질과 인명을 많이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평정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해주는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힘껏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략질을 좋아한다. 경은 본래 관리들과 병사들을 잘 다스리니 이 칙명을 염두에 두어 스스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라.”

  풍이는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 서쪽으로 가니 그가 이르는 곳마다 위의와 신망(信望)이 널리 퍼졌다. 홍농(弘農)의 도적떼 가운데는 장군을 칭하는 자가 10여 명 있었는데 모두 풍이에게 항복했다. 풍이는 적미를 화음(華陰)에서 만나 서로 60여 일을 대치하면서 수십 차례나 싸웠다. 마침내 적미의 장수 유시(劉始), 왕선(王宣) 등 5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27(건무 3)년 봄 광무제는 사자를 파견해서 풍이를 정서(征西)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때 마침 등우가 거기(車騎)장군 등홍(鄧弘)을 거느리고 돌아왔다가 풍이와 만났다. 등우와 등홍은 풍이에게 함께 적미를 공격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군대가 적군과 대치한 지가 수십 일이 됩니다. 비록 용맹한 장수들을 여러 차례 생포했다고 해도 아직 남은 적병이 많으니 서서히 은덕과 신의로써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급속히 병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깨뜨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황상께서 지금 여러 장군들을 민지(黽池)에 주둔하면서 동쪽을 막으라 하시고 저에게 서쪽을 공격하라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한꺼번에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등우와 등홍은 풍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되는 실책으로 공훈을 세우지 못한 까닭에 조급했다. 등홍은 적미와의 전쟁에 나섰고, 적미는 거짓 패한 척 하고 군대의 짐을 버리고 달아났다. 적미가 버린 수레는 표면에만 콩이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천하대란으로 어느 지역에서나 식량이 귀중한 시기였다. 등홍의 병사들 또한 굶주려 있었으므로 콩을 본 병사들은 다투어 수레에 달려들었다. 전쟁 도중에 지휘 통제가 되지 않는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적미가 등홍에게 반격을 가하게 되니 등홍군은 무너져버렸다. 풍이와 등우가 군대를 합쳐 등홍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자 적미는 잠시 퇴각했다. 풍이는 병사들이 굶주려 있고 피곤하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등우는 듣지 않았다. 등우가 다시 싸워 크게 패하고 3천여 명의 병사가 죽고 다쳤다. 등우는 간신히 탈출하여 의양(宜陽)으로 갔고, 풍이는 말을 버리고 걸어서 회계판(回谿阪)으로 갔는데 그의 휘하의 몇 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풍이는 다시 성벽을 굳게 하고 패전을 수습하였다.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여타 진영의 병사 수만 명을 불러 모아 적과 싸울 것을 기약하였다. 풍이의 작전은 병사들을 적미와 똑같이 변장하게 하고서 길옆에 매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적미의 병사 만여 명이 풍이의 선봉대를 공격하였다. 풍이는 병사를 조금만 내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였다. 적들은 풍이군의 구원 병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전군을 동원해 공격해 왔다. 풍이도 이에 맞서 싸웠다. 해가 기울자 적병들의 기운이 떨어졌다. 그 틈에 풍이가 배치한 복병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 복병들의 복장이 적미와 같았기 때문에 적미군은 대혼란에 빠져 패주하기 시작했다. 풍이는 퇴각하는 적미를 추격하여 효저(崤底)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남녀 8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적미의 나머지 무리도 10여만 명이 있었으나 동쪽의 의양으로 패주한 끝에 항복하였다. 광무제가 글을 보내 풍이의 노고를 치하했다.

  “적미를 깨뜨리고 평정시켰으니 병사들과 관리들의 노고가 많았소. 처음에는 비록 회계로 도망갔었으나 마침내는 민지에서 분연히 일어났으니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다시 찾아 거두었다고 할 만하오. 공을 논하여 큰 공훈에 답하리라.”
  그때 적미가 비록 항복하였다고는 하나 도적들이 여전히 성하였다. 연잠(延岑)은 남전(藍田), 왕흠(王歆)은 하규(下邽), 방단(芳丹)은 신풍(新豊), 장진(蔣震)은 패릉(覇陵), 장한(張邯)은 장안(長安), 공손수(公孫守)는 장릉(長陵), 양주(楊周)는 곡구(谷口), 여유(呂鮪)는 진창(陳倉), 각굉(角閎)은 견(汧), 낙연(駱延)은 주질(盩厔), 임량(任良)은 호(鄠), 여장(汝章)은 괴리(槐里)에 근거하여 각각 장군이라 칭하면서 많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적은 자는 수천 명이었다. 이들은 세력 확장을 골몰하여 서로를 공격하였다. 중국 전역이 거대한 도적 소굴이 되어 이들이 뒤엉켜 싸우는 일이 일상이 되었던 시기였다. 풍이는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행군하면서 상림원(上林苑)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연잠은 적미가 격파되자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이라고 칭하고 관리들을 배치하였으며 관중(關中)을 점거할 계획을 세웠다. 도적으로 일어났지만 세력을 키워 지역의 왕을 자칭하고 관리를 두는 사례는 이 시기에 흔한 일이었다. 연잠은 장한과 임량을 끌어들여 공동으로 풍이를 공격하였다. 풍이가 그들을 격파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어버렸다. 풍이의 승리로 연잠의 세력에 빌붙었던 많은 군소 세력들이 모두 풍이에게 투항했다.

  패주한 연잠은 다시 석현(析縣)을 공격하였다. 풍이는 복한(復漢)장군 등엽(鄧曄), 보한(輔漢)장군 우광(于匡)을 보내 연잠을 공격하여 그를 대파하였다. 또한 연잠의 장수 소신(蘇臣)과 8천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연잠은 마침내 무관(武關)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그때는 백성들은 굶주려서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곡식 값이 급등하여 황금 한 근이 콩 다섯 되와 맞바뀌는 시절이었다. 이것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잃고 떠돌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들이 도적이 되고 약탈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단지 힘이 센 자가 해당 지역을 차지하고 왕 혹은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세력 확장를 위한 전쟁이 반복되었다.   

  길은 막히고 군수품은 이르지 않아서 풍이의 병사들은 모두 과실로 끼니를 때웠다. 광무제가 명령을 내려 남양의 조광(趙匡)으로 하여금 우부풍(右扶風)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풍이를 구원하도록 조처했다. 광무제의 조처로 풍이군에 비단과 곡식이 당도하니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광무제의 적절한 조처로 군대를 정돈한 풍이는 곧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다. 먼저 호족들 가운데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자들을 그 죄과의 경중에 따라 처벌했다. 투항한 자들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들은 포상하였으며 이들 중 우두머리는 경사로 보내고 나머지 무리들은 본업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풍이의 이름은 관중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많은 도적들 가운데 여유, 장한, 장진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36)03에 투항하였다.

  그 다음 해인 28(건무4)년 공손술은 정언(程焉)을 파견해서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유(呂鮪)에게 가서 진창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풍이는 조광과 함께 이들을 맞아 싸워 대파하니 정언은 한천(漢川)으로 패주하였다. 풍이는 그들을 추격하여 기곡(箕谷)에서 싸워 다시 대파하고 돌아와 여유를 격파하니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그 후 촉에서는 여러 차례 장수를 파견해 출병하였으나 풍이는 그때마다 그들을 꺾어 버렸다. 풍이가 상림에 주둔하여 3년이 흘렀다. 그는 전란과 도적들에게 지친 백성들을 품어주고, 억울한 사건들을 해결해 주었다. 3년만에 상림은 도시를 이룰 정도로 인구가 늘었다.

  풍이는 너무 오래 변방에 있어서 스스로 편안치 않았다. 그래서 조정을 생각하여 광무제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글을 올렸으나 광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말했다.
  “풍이가 관중에서 권력을 휘둘러 장안의 현령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의 권위가 대단히 강해서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그를 함양왕(咸陽王)이라 부릅니다.”
  광무제는 사신을 보내 이 글을 풍이에게 보여주었다. 만약 광무제가 풍이를 의심했다면 그를 수도로 소환했을 것이다. 광무제가 사신을 풍이에게 보낸 것은 풍이를 신뢰한다는 것을 표하는 것이었다. 풍이는 놀랍고 당황하여 사죄의 글을 올렸다.

  “신은 본래 유생으로 다행히 명을 받을 기회를 만나 군대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이미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아 대장이 되고 제후로 봉직을 받았습니다. 임무를 받아서 미미하게나마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모두 황상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 우매한 제가 미칠 수 있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기에 폐하의 명령을 받고 전공을 세우는 것은 매번 뜻대로 되었으나 때로 제 마음대로 결단한 일에는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황상의 탁월한 식견을 접한 지가 오래되어 더욱 멀어져 보니 이제야 ‘성(性)과 천도(天道)는 듣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사를 처음 일으키던 어지러운 때에는 호걸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미혹케 하는 자가 천(千)을 헤아렸습니다. 신은 다행히 황상을 만나 성스러운 명견(明見)에 몸을 위탁하였습니다.

  위급하고 어지러운 중에도 감히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천하가 평정되고 상하의 질서가 잡힌 지금 신이 폐하께 받은 작위가 높고 높아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진실로 바라는 것은 황상의 칙명을 삼가 받들어 죽을 때까지 다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보여주신 글을 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밝으신 황상께서 신의 우매함을 알고 계시니 감히 올립니다.”
  광무제는 풍이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면서 변함없는 신뢰를 전했다.

  “장군은 짐에게 있어서 의로는 군신이고 은혜로는 부자이다. 무엇을 걱정 근심하여 두려워하는가?”
  30(건무 6)년 봄 풍이는 경사의 광무제를 조견하였다. 광무제는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내가 병사를 일으킬 때의 주부였다. 나를 위해 온갖 고난을 겪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조회가 끝나자 광무제는 진기한 보물, 의복, 금전을 풍이에게 하사하였다. 또한 풍이에게 말했다.
  “위급한 때 무루정에서 콩죽을 바치고 호타하에서 보리밥을 바쳤었는데 그 고마운 뜻을 오래도록 갚지 못하였소.”
  풍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에게 ‘원컨대 공께서는 허리띠에 화살이 박히던 때를 잊지 마소서. 신은 죄인으로 호송 수레에 태워져 끌려오던 일을 잊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관중에게 의지하였습니다. 황상께서는 하북(河北)에 있었을 때의 어려움을 잊지 마소서. 소신도 감히 건거(巾車)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예로부터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힘들다고 한다. 어려울 때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일정한 성과를 얻은 후에는 이 성과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게 되었는지 쉽게 잊고,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다가 끝내 그 성과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패자(覇者)로 만든 명재상이다. 그러나 천하를 재패한 환공이나 관중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환공과 경쟁 관계에 있던 관중은 화살을 쏘아 환공을 죽이려 했었다. 그런데 관중의 화살이 환공의 허리띠의 쇠붙이 장식에 맞았고 그 순간 환공은 기지를 발휘하여 죽은 시늉을 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관중은 도망갔다가 환공을 저격한 죄로 노(魯)나라에서 잡혀 제나라로 압송되었다. 이후 포숙의 추천으로 환공에게 사면받고 등용되었지만, 죄수의 신분이었던 힘든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광무제와 풍이 또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환공이 관중을 사면했듯이 광무제도 건거향에서 잡힌 풍이를 그의 말을 믿고 풀어주어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광무제는 이후에도 여러 번 잔치자리에서 보고 이야기하며 촉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다가 10여 일 머물러 있은 뒤에 풍이의 처자식에게 풍이를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풍이의 대활약과 죽음
  30(건무 6)년 여름, 광무제는 장수들을 파견해서 농(隴)지역을 점령하라고 하였으나 외효(隗囂, ?-33)04에게 패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풍이에게 명령을 내려 순읍(楯邑)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런데 풍이의 군대가 순읍에 이르기 전에 외효가 움직였다. 외효는 왕원(王元), 행순(行巡)에게 2만여 병사를 이끌고 진격하게 했고, 군대를 나누어 행순이 순읍을 점령하도록 했다. 풍이는 곧장 군대를 몰아가 먼저 순읍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말하였다.

  “적병의 기세가 성하고 새로이 승세를 타고 있으므로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땅히 군대를 편리한 곳에 주둔시켜 놓고 천천히 전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풍이가 말하였다.
  “적병이 경계에 임박하였으니 그들은 사소한 이익에 급급하여 더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오. 만약 순읍을 얻게 되면 삼보(三輔)가 동요할 것이니 이것이 내가 걱정하는 바요. 대개 ‘공격하는 자는 부족해 하고 수비하는 자는 여유 있다.’고 하였소. 지금 먼저 성을 점거하게 되면 편한 상태에서 피곤한 적군을 상대하는 것이니 싸울 바도 못 될 것이오.”

  풍이는 순읍에 몰래 가서 성문을 닫고 군기(軍旗)와 북을 내리게 했다. 팽순은 풍이군이 순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급히 달려왔다. 팽순이 순읍에 접근하자 풍이군은 갑자기 북을 두들기고 깃대를 세워 출병하였다. 행순의 군대가 놀라 어지럽게 달아나니 풍이는 수십 리를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또한 좨준(祭遵)도 왕원을 견(汧)에서 격파하였다. 그러자 북지(北地)의 호족인 경정(耿定) 등이 투항했다. 풍이는 이 일로 광무제에게 보고서를 올리면서도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장수들이 풍이의 공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자 광무제가 이를 근심하여 편지를 내려 말했다.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 호아(虎牙)장군 합연(蓋延), 건위(建威)장군 경감(耿弇), 한충(漢忠)장군 왕상(王常), 포로(捕虜)장군 마무(馬武), 무위(武威)장군 유상(劉尙)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병이 내려와 삼보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순읍이 위급하여 망하는 것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북지의 진영과 보루에서 군대를 억류하고 관망하였다. 지금 성마다 위급함을 면하고 적병을 꺾어서 경정의 무리로 하여금 다시 군신의 의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한 정서대장군(풍이)의 공훈은 산더미 같지만 그는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노(魯)나라 대부 맹지반(孟之反)이 분연히 달릴 수 있으나 후진으로 남았던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05 지금 태중대부(太中大夫)를 보내 정서대장군의 관리, 병사들 가운데 죽거나 다친 이들에게 쓸 장례용품과 의약을 보낸다. 대사마 이하의 장군들은 직접 죽은 이를 조상하고 부상병을 위문하여 이로써 겸양(謙讓)을 받들도록 하라.”

  이때에 광무제는 풍이로 하여금 의거(義渠)로 진군케 하고 북지태수 일을 맡도록 하였다.  청산(靑山)의 호(胡)가 만여 명을 이끌고 풍이에게 투항했다. 풍이는 또한 노방(盧芳)06의 장수 가람(賈覽), 흉노(匈奴)의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풍이의 활약으로 상군(上郡), 안정(安定)도 모두 항복하였다. 풍이는 다시 안정태수에 임명되었다.

  33(건무 9)년 봄 좨준이 죽자 광무제는 풍이를 정로(征虜)장군에 임명하고 그의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외효가 죽자 그의 장수 왕원, 주종(周宗)이 외효의 아들 외순(隗純)을 다시 세우고 여전히 병사를 모아 기현(冀縣)에 근거하니 공손술이 조광(趙匡)을 파견해 구원하였다. 광무제는 풍이를 천수(天水)태수에 임명하고 조광을 공격하게 하니 1년이 지난 후에 그들을 모두 목 베었다. 풍이는 여러 장군들이 함께 외순의 근거지인 기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회군하여 병사들을 잠시나마 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34(건무 10)년 여름 풍이는 낙문(落門)07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기 전에 병이 나서 군중에서 죽었다. 풍이의 시호(諡號)를 절후(節侯)라 하였고, 큰아들 풍창(馮彰)이 뒤를 이었다(풍이 끝).
 


01 남양(南陽, 현재 하남성 남양) 사람.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주변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진풍(秦豊)과 연합하였다가 진풍이 패하자 공손술(公孫述)에 투항하여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다. 36(建武 12)년, 오한(吳漢)이 촉(蜀)을 평정할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연패하였다. 공손술이 죽자 항복했고 처형되었다.

02 장안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져서 이를 삼보(三輔)라고 칭하는데, 우부풍(右扶風, 장안의 서쪽), 경조(京兆), 좌풍익(左馮翊)이다.

03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제(更始帝)가 선 이후 경시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장군(輔漢將軍)이라 칭하고 촉군태수(蜀郡太守)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니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

04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05 전쟁 과정에서 퇴각하는 군대의 후미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노나라 대부 맹자반은 제(齊)와의 전투에서 스스로 후진에 남아서 최후로 퇴각했다. 그는 이를 자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늦게 퇴각한 이유는 “내가 뒤처지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06 자(字)는 군기(君期). 안정(安定) 삼수[三水, 현재 감숙성(甘肅省) 고원(固原) 北]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전한 무제의 증손자 유문백(劉文伯)을 사칭하여, 삼수 속국(屬國)에 사는 강족(羌族), 호족(胡族)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경시제가 장안에 이르자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해 안정 서쪽을 진무(鎭撫)토록 했다. 경시제가 패망하니 삼수지역의 호걸들이 그를 상장군(上將軍) 겸 서평왕(西平王)으로 세우고 사신을 보내 서강(西羌), 흉노(匈奴)와 화친하게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전한 무제의 증손자라고 사칭했으므로, 흉노는 그를 한나라 황제에 임명했다. 이후, 도읍을 구원(九原)에 정하고 흉노와 함께 북쪽 변방을 자주 침략하여 광무제가 여러 번 군대를 파견했으나 정벌하지 못했다. 36(건무 12)년 그의 부장(部將) 수욱(隨昱)이 모반을 일으키자 흉노로 달아났다가, 40(건무 16)년 고류(高柳)에 들어와 살면서 한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해 광무제가 대왕(代王)에 봉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자를 데리고 흉노로 달아났다. 10년 뒤 흉노 땅에서 병사(病死) 했다.

07 외순이 기거하는 기현(冀縣)의 낙문으로 지금의 감숙성 감곡현(甘谷縣)에 있다.
  


 
<대순회보 172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2616)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전화 : 031-887-9301 (교무부)     팩스 : 031-887-9345
Copyright ⓒ 2016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